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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佛法에서 보는 보편성과 토착성

by 행복철학자 202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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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에서 보는 보편성과 토착성


인도 중국 불교쇠퇴 원인은 승려의 타락과 민중과의 결별에


13세기는 세계사의 큰 변동기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출현한 13세기는 세계사에서 큰 변동기였다고 평가되는

데, 불교의 역사상으로도 일본에서 대성인이 삼대비법(三大秘法)의 하종불법(下

種佛法)을 확립한 반면 인도, 중국에서는 불교의 쇠퇴, 멸망이 결정적으로

된 시대였다.

 

즉, 인도의 불교는 1203년 이슬람교의 군대에 의해 사원(寺院)이 파괴되어,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또 중국에서는 그 전세기인 1126년에 북송(北宋)의 왕조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고, 그에 의해 중국불교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경전류는 산일(散逸)되고 교의(敎義)의 전승도 곤란할 만큼

이 되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인도에서 중국, 일본으로 전래해온 대승불교는 인도, 중국에서는 활력을 잃고

본에서 새로운 전개를 시작하였다.

이념적으로는 바로 이 시대에 석존의 불법에서 대성인의 하종불법으로 불법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미 불법이 잃어버려져 있는 것에 대해 니치렌 대성인은 <현

불미래기(顯佛未來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달은 서에서 나와 동을 비추고, 해는 동에서 나와 서를 비추니 불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정상(正像)에는 서에서 동으로 향하고 말법에는 동에서 서로 가나니,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 어찌 중국에서 법을 잃고 이를 사유(四維)에서 구함

이 아니리오 등 운운. 천축(天竺)에 불법이 없다는 증문(證文)이니라. 한토(漢土)

에서 고종(高宗)황제시에 북적(北狄)이 동경(東京)을 영유(領有)한지 이미 일백

오십여년이며, 불법과 왕법(王法)이 함께 다 없어져 버렸노다.

(어서 508쪽)이라고.

 

농촌에 기반을 갖는 세력 대두

 

융성을 자랑하던 인도와 중국의 불교가 왜 쇠퇴, 멸망해 갔는가.

이 흥미깊은 문제는 물론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반적인 견해로

불교가 토착사상에게 졌다는 것이다.

 

석존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폭넓은 계층으로부터 지지받아 인도사회에 정착되고

소승, 대승의 수많은 유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6세기경부터 전통적인 토착신

앙에 입각한 힌두교가 넓혀짐에 따라 압박을 받게 됐던 것이다.

 

주술과 신비주의 강조한 밀교


힌두교 대두의 배경에는 5세기의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의해 인도와 서방세계의

무역이 쇠퇴한 일이 있었다고 되어있다.

무역의 쇠퇴에 의해 도회적, 상업적 세력이 후퇴하고, 그와 바뀌어서 농촌에 기

반을 가지는 전통적인 세력이 대두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의 발전이

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에 응해서 불교도 차츰 그의 보편성이라는 개성을 잃고 토착신앙과 결부하는

경향을 강화해 갔다. 여기서 성립한 것이 밀교(密敎)였다.

밀교의 특징은 주술과 신비주의를 강조하는데 있다. 이것 이전의 불교경전에도

다라니(陀羅尼)등 주술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인 것이어서 교리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밀교는 주술을 중심에 두었다. 그 가르침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태도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에 영합하는 것뿐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밀교의 등장으로 인도불교는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길을 걸어갔던 것이

다.

또 승려의 타락과 민중으로부터의 유리(遊離)도 진행되어 있었다. 밀교화가 진행

된 인도의 불교사원은 높은 담과 망루(望樓)를 가지는 성과 같은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중(僧)들은 왕의 보호를 받으며 성과 같은 사원에 틀어박혀 민중 속으로 들어가

려고도 하지 않고, 관념적인 의론과 가지기도(加持祈禱)에 빠져 있었다.

이슬람 군대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었을때 불교를 지키려는 민중의 에너지는

수 없었다.

같은 상황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불교는 천태대사(天台大師), 장안대사(長安大師) 등이 나온 수(隋), 당(唐)의

시대에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했는데, 천태종(天台宗)등의 정통불교는 민중 사

이에는 정착되지 못했다.

민중차원으로 퍼진 것은 여기서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에 영향받은 선

(禪)이나 정토교(淨土敎) 등이다.

 

불교가 장의(葬儀)에 관련되는 일은 인도에서는 별로 보여지지 않고, 중국에서

일반화 됐는데, 그것은 사자(死者)의 장송의례(葬送儀禮)를 중시한 유교에서 영

향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승려의 부패타락도 심각했다. 당나라때에는 이미 황제의 탄생일에 궁중에

서 법회(法會)가 열리는 등 불교와 국가권력의 유착이 시작되어 있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은 사원은 광대한 영지를 기진받아 대지주로 되어,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승려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재정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으로 되

었다.

 

중국에서도 불교는 토착사상에 밀려버리게 되거나 혹은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서 쇠퇴해 갔다고 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한 대성인 불법

이들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불교는 홍통(弘通)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말해

서 단순히 법리(法理)를 설하면 족하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불교의 독자성, 보편성을 잃는 일 없이 또 고유의 토착사상에 밀려버리는 일 없

이, 그러고서도 깊고 강한 뿌리를 민중의 토양에 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찌기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브라질 문학아카데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편적인 이론이나 이념,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구

체적인 한사람의 인간에 근거해서 전개돼있다라고.

 

보편성과 토착성은 어디까지나 한사람의 인간에 근거해서

훌륭하게 융합하는 것이다.

니치렌 대성인이 불법홍통에 있어 주의할 것으로 교(敎), 기(機), 시(時), 국(國),

교법유포의 선후(先後)라는 종교의 오강(五綱)을 설한 소이(所以)도 각기 구체적

인 사람이 사는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총합적으로 판단해 가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배찰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주위의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하고 민중 속으로 신뢰의

동그라미를 쌓아가는데에 불법홍통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명기해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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