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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강한 기원으로 자신의 보탑을 열어라

by 행복철학자 2024.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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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기원으로 자신의 보탑을 열어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믿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면,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나에게 자신(自信)이 없다고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여기서는 니치렌(日蓮)대성인의 불법(佛法)을 통하여

신앙이 자기자신을 지켜보고, 높여 가는 처방전(處方箋)이고, 시대를 비추는

광명이라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만연(蔓延)하는 자신상실(自信喪失)의 풍조

심리학 용어에 자존감정(自尊感情)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자신(自己自身)에게서

가치를 찾아내고 자기를 존중하는 감정이라는 말이다.

심리학의 분야에서는 자기는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감각. 즉, 자존감정이 높을 때는,

사람은 평안(平安)한 기분을 가지고 어떤 일에 도전하고, 풍부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대로 자존감정을 잃고 나면, 자기는 아무 소용도 없다. 살아있는 가치를 느낄 수

없을 뿐 아니라 풍부한 인생길을 걸어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처럼 나는 자신이 없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있는 것은 아닌지.

정신과 의사인 마치사와시즈오(町澤靜夫)씨는 저서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학》에서

자기자신에게 자신을 가질 수 없다. 장래의 일이 불안하다.

 

이같이 조그마한 마음의 병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현대를 마음의 병의 시대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 젊은이라든가,

유명 브랜드의 물품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

 

당신이 불행한 것은 인감(印鑑)의 글자 탓 당신이 병약한 것은 발바닥이 나쁘기 때문 등등.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엉터리 싸구려 영감상술(靈感商術)이라고나 할까,

혹은 어컬트 즉, 초자연적 신비적인 요술, 주술, 심령술, 점성, 예언 따위를 흉내내고

이런 것들을 뒤섞어서 사람들을 홀리는 종교 등등.

 

이런 것에 사람들이 아주 간단히 믿고, 끌려 들어가 사기를 당하는 것도 그 뿌리는

자기에게 자신이 없다고 하는 불안에 떠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생명을 비추어내는 명경

그러면 왜 나를 믿을 수 없다 내가 놀랍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만연하고,

그래서 자존감정같은 것이 싹트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이 생각될 수 있다.

유, 소년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학대로 마음의 왜곡(歪曲) 서열화(序列化)를

동반하고 있는 현대 교육제도의 존재방식 개인의 중상(中傷)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흘리는 TV나 잡지 등으로 인한 매스컴의 영향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 등등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불법(佛法)의 눈이 파악한

인간생명의 심부에 숨은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는 근본적인 미혹(迷惑)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원품의 무명이란, 제일 알기 쉽게 말한다면, 자기의 생명에 부처(佛)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치렌대성인은 <여래멸후오오백세에 시작하는 관심의 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

우리들의 열심(劣心)에 불법계(佛法界)를 갖춘다는 것은 신(信)을 취(取)하기

어려운 일이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자기들처럼 열등한 범부(凡夫)의 마음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하는 말은

아무리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대로 생명이

존엄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물음은 현대사회에서도 통하는

인간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나의 기심(己心)을 관(觀)하여 십법계(十法界)를 봄(어서 240쪽)이라는 말씀이

같은 어초(同抄)에 있다.

대성인께서는 우리들 구계(九界)의 범부(凡夫)가 자신의 생명에 갖추어진

불계(佛界)의 생명을 관(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어본존을 나타내신 것이다.

자기의 모습을 비춰내 보여주는 거울이 없으면, 자기가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자기 생명을 그대로 비춰내는 명경(明鏡)이 없으면 자기의 생명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도리일 것이다. 대성인이 현현(現顯)하신 관심(觀心)의

본존(本尊)이란 자기의 생명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누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

법화경 견보탑품(法華經 見寶塔品)에서는 설법이 시작될 때, 갑자기 엄청나게

장대(壯大)한 보탑(寶塔)이 출현한다. 그 보탑의 높이는 아무리 작게 잡아도 지구

직경의 3분의 1, 폭은 그 반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전단의 향(香)을 내뿜는 이 보탑은 금, 은, 유리, 진주 등 7종류의

보물로 장식되어 있고, 그 가운데 방이 천 만개나 있다고 설해져 있다.

보탑(寶塔). 그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게 빛나고 있고,

상상을 넘어선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 보탑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묘법(妙法) 신앙자(信仰者)인

아부쓰보(阿佛房)가 보탑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대성인께 질문했을 때,

대성인은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어서 1304쪽)라고

 단적으로 교시하고 계신다.

당신의 생명 이상으로 존귀한 보탑은 없다. 이것이 대성인의 결론이었다.

법화경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을 나타내는 데 있어 지구의 3분의 1의

스케일을 가진 보탑을 출현시켰던 것이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나의

몸이 장엄(莊嚴)한 보탑인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보는 것이 견보탑(見寶塔)이고, 그것을 보기 위한 거울(鏡)이

보탑품(寶塔品)의 의식(儀式)이다. 또, 보탑품의 의식(儀式)을 사용해서

건립(建立)된 어본존(御本尊)도 명경(明鏡)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자신이 보탑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명경이야말로

대성인이 도현하신 어본존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니치렌대성인이나 석존이 설하고자 하신 것은,

자기자신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보탑즉일체중생(一切衆生) (어서 797쪽)이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나의 몸이 보탑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도 보탑인 것을 의미한다. 창가학회가

펼치고 있는 대화운동은 자기자신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라는 것을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알려가는 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어본존을 향한 강한 기원(祈願), 강한 신심(信心)으로 나의 보탑을 열고,

확신있는 대화운동에 선두를 달리는 학회원의 존재야말로 시대를 뒤덮고 있는

불신(不信)의 어둠을 걷어내고, 미래를 여는 서광(曙光)이라고 호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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