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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행화타
마차의 두바퀴같은 자행과 화타
日蓮(니치렌)대성인은 <제법실상초>에서 먼저 일염부제
제일의 어본존을 믿으실지어다
(어서 1361쪽)라고 하셨다.
세계 최고의 어본존에 대한 신(信)을 강조하시고
그 위에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느니라.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시라(어서 1361쪽)고 하셨다.
행과 학이 끊긴 곳에 불법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 행과 학중에서 학에 대해서는 戶田(도다)회장의 이(理)는
신을 낳고, 신은 이를 구(求)하고,
구해진 이는, 신을 높이고, 높여진 신은 이를 깊게 한다라고 하는
지언(至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를 학으로 바꿔 넣으면 학이 갖는
의의(意義)는 명백해진다.
행학의 이도 중의 행이 갖는 의의를 생각해 보려 한다.
우리 불법에서 행이라는 것에는, 자행과 화타가 있다.
이 자행과 화타의 실천에 대해서 池田(이케다) SGI회장은
광선유포의 활동에서는
무엇보다도 자행화타에 걸치는 신심의 실천이 근본이다.
자행과 화타의 실천은 마치 마차의 두 바퀴와 같이 서로
불가결의 관계에 있다.
(중략) 극언(極言)하면, 제목을 진지하게 올리는데
광포를 위한 사람들을 위한, 화타의 행동이 없다고 하면
완벽한 신심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한 바 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의 불도수행의 실천은 자행을 위함이었지,
널리 타를 위하여 설하지 않으셨으니(어서 1022쪽)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시면서 사람들을 위해,
법을 위해, 광포를 위해 행동해 간다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계시다.
안좌하지 않고 편력을 계속한 석존
불법의 개조, 석존.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그의 행동범위의 넓음에 압도 당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야말로 법은 스스로 홍통되지 않는다. 사람이 법을
홍통하는 고로 인법이 함께 존귀하니라
(어서 856쪽)라는 것이다.
석존은 19세(일설에는 29세)에 출가한 이래 죽을 때까지
안주(安住)의 땅에 좌정하고서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고, 넓은 인도의 땅을 걷고 또 걸으면서
법을 설해 갔던 것이다.
석존을 두고 당시의 민중이 집없는, 편력하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은
이의 증좌라 하겠다. 행동할 때, 석존은 스스로 선언하고 있었다.
사방 어느 곳이나 편력하라. 사심(私心)없이
손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
여러 고난에 견디어내고 두려워말고 혼자 걸으라.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건조와
열풍(烈風)과 태양의 열과 등에와 뱀-. 모든 것에 이기며
홀로 걸으라(《수타니파타》)라고 하셨다.
그 위에 그 행동의 범위가 놀랍다. 동으로는 갠지스강
하류부터 서쪽으로는 현재의 델리 동쪽까지.
남쪽은 가야로부터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기슭에 걸치며,
지금과 같이 도로사정도 정비돼 있지 않고, 삼림이나 하천,
산이나 건조지대, 나쁜 길에 저지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존은 감연(敢然)히 걸었다.
법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 언제나 지금이야말로 나부터라고
그런데도 그 행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이고
사회 사람들의 공감을 부르는 것이었다.
수행자들이여, 걷기를 시작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그리고 사회의 민중과 공감을 가지고-. 이 세계에는
마음의 눈이 아직 흐려져 있지 않은데도
아직 법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법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을 설하기 위해 나는 우루베타의 세나 마을로 가겠다.
(《율장대품11》 등)
그 위에 특필할 것은 구제할 민중이 있는 한, 석존은 같은
장소라도 몇 번이고 걸음을 옮기셨다.
예를 들면 베사리에는 약50회, 후자크리하에는 1백20회 이상,
웬걸 슈라바스티에는
9백10회 이상도 방문하고 있다.
석존 자신이 불법광선유포를 위해 선두에 서서 위대한 행동의
인생을 관철하신 것을 보여주시는 에피소드이다.
바로 교주석존의 출세의 본회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
(어서 1174쪽)라는 어금언이 가슴에 다가온다.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도 광포를 위해 싸우신 일생이었다.
어떠한 장마나 고난에도 한번도 물러서는 일없이 광포의 행동에 관철된
강한 삶의 모습이 맥동치고 있었다.
다쓰노구치 법난에서조차 이처럼 기쁜 일이니 웃으시오
(어서 914쪽)라고 엄연(嚴然)히 말씀하셨다.
또 유죄(流罪)의 땅, 사도(佐渡)에서 극한(極限)의 생활속에서도
희열(喜悅)은 한량(限量)없도다
(어서 1360쪽)라고 외치시며, 문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퇴전해서는 안 된다.
절복시키는 일에 살자라는 격려의 편지를 쓰셨다.
즉 어떠한 역풍이 불건 밖에 나가 광포를 위해
행동하도록 격려하셨다.
<어의구전>에서는, 내 몸이 묘호렌게쿄의 당체라고
하는 것을 설하시며, 발(足)은
경(經)이니라고 하셨다. 심심(甚深)의 의의(意義)는
여하튼 자기의 발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것,
광포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경(經)이요, 불법이라고 하셨다.
그 행동, 실천이 있는 곳에 내 몸이 묘호렌게쿄의
당체로서 빛나는 것이다.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
(어서 1598쪽)는 어금언도,
사람들을 위한, 광포를 위한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도 되고,
자타 모두의 행복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의 행자의 결의와 자각
행동에 시점(視占)을 두고, 어서를 배견할 때, 법화경의 신자라는 말은
오직 1개소에만 사용했는데, 법화경의 행자라는 말은,
실로 1백30개소를 넘는 곳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 위에 법화경의 행자는 니치렌대성인의 의미로 사용돼 있을 뿐 아니라,
효에노사에몬전(兵衛左衛門殿)은 법화경의 행자로다
(어서 1231쪽), 법화경의 행자,
니치렌 등의 류(類)(어서 812쪽) 등 문하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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