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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불법세미나

御書 발간’의 의의

by 행복철학자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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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書 발간’의 의의  

 

니치렌 대성인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 
      
  
 
많은 사본을 남기신 닛코 상인

 옛부터 스승의 언행을 글로 써서 남겨, 후세에 무한하게

전하는 것은 제자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입멸하신 후, 그 후사(後事)를 의탁

받은 6명의 고제(高弟) 즉, 6명의 중심 제자 가운데 대성인의

언행을 후세에 바르게 전하신 분은, 닛코 상인(日興上人)

오직 한 분이었다.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富士一跡門徒存知之事)>’에는,

닛코 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5명(五老僧)이 저지른 일로써,

대성인 어서(御書)를 “혹은 그 종이를 물에 담가서 재생지

(再生紙)를 만들고, 혹은

불태웠느니라”(어서 1604쪽, 통해)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대성인 어서를 소중히 하고 어서 강의를 한 닛코 상인을

오노승은, “선사(先師)의 치욕을 노출시키는 자”라고까지 비난했다.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 닛코 상인은 대성인 어서가 흩어져 사라져

버릴 일이 염려되어 어서를 수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과 함께,

닛코 상인 자신이 서사(書寫)도 하며 많은 사본을 남겼다.

<닛코유계치문(日興遺誡置文)>에는, “당문류(當門流)는

어서를 심간에 새기어”(어서 1618쪽)라고 있으며, 얼마나 닛코 상인이 대성인

어서를 소중히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 그 ‘유계치문’에는, “대성인의 어서를 위서(僞書)라고 하면서,

당문류(當門流)를 비방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 같은 악려(惡侶)가 출현하면, 그와 친해져서는 안 된다” 

(어서 1617쪽 통해)라고.

 

그리고 “위서를 만들어서 그것을 어서라고 부르고,

(그것을 방패삼아) 본적일치(本迹一致)의 수행을 하는

자는 불법(佛法)이라는 사자(師子)의 몸 안에서, 사자의

살을 파먹는 벌레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617쪽)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노승의 문류는 대성인 어서를, 자문(自門)

의 형편에 비추어 불리한 곳은 위서 취급을 하며, 마침내는 위서를

만들어 어서에 혼입하기도 했다.

1951년 도다 제2대 회장이 취임한 직후 니치렌 대성인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발원, 1952년 입종(立宗) 7백년을

기념해서 발간된 것이 현재 우리들이 읽고 있는 '어서전집'이다.

 에도기에 들어와 어서 출판 대성인이 입멸하신 후 1백년부터

1백50년경에 걸쳐 각 문류에서는 대성인 어서목록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서가 집성(集成)되어, 그것이 문헌으로

처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1461년 무렵, 혼세이보

니치지쓰(本成房 日實)의 ‘종지명목(宗旨名目)’이라는 것이었다.

이 제 1차 집성 어서는 목록내 어서라는 의미로 ‘녹내어서

(錄內御書)’라고 불리고, 1백46편(編)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 후 제2차 집성하게 되어 제 1차 집성 때 빠졌던 것 등

2백59편이, 녹내어서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녹외어서(錄外御書)’라

불리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들어와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대성인 어서도

각 문류로부터 간행되게 되었다.

에도기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어서를 편년체(編年體)로

편집하는 방법 등으로 녹내와 녹외가 합해져 기획되기에 이른다.

1880년에는 ‘고조유문록(高祖遺文錄)’, 1904년에는 ‘니치렌성인

어유문(日蓮聖人御遺文)’이 간행되어, 후자는 영간각판(靈艮閣版)과

축책유문(縮冊遺文)이 있었으며, 근대 일련종계(日蓮宗系)의 여러

문류에서 이것을 모두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마키구치(牧口)

창가학회(創價學會) 초대 회장이 사용했던 것도 이

‘니치렌성인어유문’이었다. 

 

타문은 본불 진의를 왜곡  그 후에도 어서 발간은 이어져

닛코 문류에서 한 것은 없었고 다른 일련종 각파에 의해 발간 됐다.

그런데 대성인을 말법(末法)의 본불(本佛)로 모시지 않는

타문류(他門流)에서 간행한 어서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관심의본존초(觀心本尊抄)> 등에서 곡해(曲解)에서

온 것이라고 해야 할, 치명적인 오독이 보인다.

 

즉 <관심의본존초>에서는 본문(本門)의 본존(本尊) 상모(相貌)에

대해서 “이때 지용천계(地涌千界)가 출현해서 본문의 석존(釋尊)을

협사(脇士)로 하는, 일염부제 제일(一閻浮提 第一)의 본존이,

이 나라에 서느니라”(어서 254쪽)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본문의 석존을 협사로 하고”의 구절을 “본문의 석존의

협사로 되어”라고 읽고 있다.

 

니치칸(日寬) 상인이 <본존초문단(本尊抄文段)>에서, “별(別)해서,

부처 중에서도 본문의 부처로서 협사로 하는 묘법오자(妙法五字)의

본존이니라. 어찌 염부제일(閻浮第一)이 아닐소냐”(니치칸상인

문단집 547쪽)라고 교시한 것으로도 분명하듯, 앞에서 보았던 것 같은

잘못된 독해 방법은, 대성인의 참된 뜻을 왜곡한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이 치명적인 과오는 오노승이 범한 잘못과 같은 것으로,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이라고 이해하지 못했던 데에

기인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도다 제2대 회장 발원으로 실현

 종문(宗門)에서 1929년에 ‘니치렌대성인 어서전집’을 발간한 일도

있었으나,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를 위서(僞書)로 취급하는 등,

너무나도 엉성한 내용은 니치코(日亨) 상인으로 하여금 “그 성과가

예기했던 바와 너무나도 반대 되었던데 대해, 경악했다.

 생각해 보건데 내가 그 그릇이 못된다고는 할망정 친히 직접

참가하였다면 이 같은 후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 후 오래도록

한탄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어서전집의 머리말) 

라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종문은 전시 중에 군부권력에 굴복해서 다른 일련종

각파와보조를 맞추어 어서 발간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대성인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성훈인,

<성인지삼세사(聖人知三世事)>에 있는“니치렌은

일염부제 제일의 성인이니라”(어서 974쪽)라는 말씀 등

합계 14곳이나, 종문(宗門)이 발간하고 있는

‘어서요문집(御書要文集)’에서는, 삭제되어 있었던 터였다.

그야말로 바로 오노승이, 그들이 생존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막부

권력이 두려워, 자기의 보신에만 급급해서, 천태사문(天台沙門)

이라고 자기들을 불렀던 모습과 조금도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1951년 도다(戶田) 제2대 회장이 취임한 직후,

대성인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하여 발원(發願),

다음해인 1952년 입종(立宗)7백년을 기념해서 발간된 것이

현재 우리들이 읽고 있는 ‘어서전집’이다.

 

이 어서전집은 다른 일련종의 것들과는 달라서, 상전서(相傳書)인

<백육개초(百六個抄)> <본인묘초(本因妙抄)>등을 수록하였다.

또 어서 전체를 ‘법문서(法門書)’와 ‘소식문’으로 나누고 있는 것 외에,

한문을 읽어 내리는등, 많은 사람이 읽기 쉽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야말로 종래의 어서와는 분명히 한선을 긋는 획기적인 책으로

발간되었던 것이다.그 이래 80여년이라는 창가학회의 발전에

의해 대성인 불법은 세계 1백92개국, 지역에 유포되었다.

 

이 같은 발전에 어서발간이 큰 역할을 다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대성인, 닛코상인의 정신을 바르게

현대에 소생시킨 어서가

있었기에 비로소 우리는 그 정신에 접할 수가 있었다.

역대 회장의 어서근본 정신에 의해서 발간된 ‘어서전집’은 미래를

향해서 더욱더 광채를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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