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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6-3 사고(死苦)를 이겨내는 불법의 생명관

by 행복철학자 202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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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고(死苦)를 이겨내는 불법의 생명관

 

석존(釋尊)은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인

‘사고’와 철저히 마주하면서 영원한 생명관에

이르렀습니다. 석존의 그 깨달음에 접근하며

생사를 응시한 불교의 본질을 말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

그 저편에 도대체 어떠한 세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석존은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죽음을 응시하고 싶지 않다’는 본디

인간이 지닌 본능을 이겨내고 위대한 용기를

내어 인생의 고()의 상()과

진실상(眞實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생과 사의 본질에 대해

사색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불법은 영원한 생명을 설하지만, 그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민중의 소원을 안이하게

받아들인 이론이 결코 아닙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고집멸도(苦集滅道, 불교가

설하는 고의 원인과 해결의 법리)라는

가르침은 인간이 피하고 싶어 하는 인생의

고()의 상()을 그대로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공상적(空想的)인 가설로 진실을 어물어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눈으로

진실을 응시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대전제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왜 죽는가. 생과 사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밀접한 관계인가.

생명은 어떠한 흐름이 있는가. 석존은

용기와 인내 그리고 냉정함을 지니고

자신의 생명에 빛을

비추어 그 진실상을 깨닫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깨달음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본연적으로 생과 사를 지녔다.

인간의 생명은 생과 사를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웅대한 물결을 이루며 영원히 흐른다.’

석존은 자기 생명의 분류(奔流) 속에서

이 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생에 집착하여 확립된 영혼

불멸과 같은 사상이 아니라, 한 생명에 일관된

엄연한 인과(因果)의 법칙을 간파하고

확립한 영원한 생명관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관에 서서 사()에 의의를

부여한다면 사는 오히려 생()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다음에 눈을 뜨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잠과 같습니다.

 

사는 생을 위한 방편(方便)입니다.

생을 더욱 빛내기 위한 것이며 생이 바로

생명 활동의 본태(本態, 본디 모습)입니다.

생과 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오히려 생을 위한 것이라고

자리매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에 설해진 ‘방편현열반

(方便現涅槃)’(부처의 생명은 영원하며 석존이

중생에게 부처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방편으로서 열반을 나타냈다.)이겠지요.

불교의 본질은 무익한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도

아니거니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인생의 고를 직시하고 거기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도전한 끝에

도달한 ‘생의 환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괴로움에서 도피하면 참된 기쁨은 없습니다.

 

남들이 외면하고 도피하려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거기에 용감하게 도전해

이겨냈을 때 비로소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은 한없는 환희가 솟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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