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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품 자아게의 의의
自我偈(자아게)의 의의
자아게란 생명자유의 찬가
우선 자아게의 게(偈)란 무엇인가. 이것은 범어
가타의 음사(音寫)이다.
게타(偈他)라고도 가타(伽陀)라고도 하지만 요컨대
시(詩)라는 뜻이다.
결국 시로써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거나 불. 보살의 덕(德)을
찬탄한 것을 게라고 한다.
게는 독송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경전이다.
그리고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로
시작되는 게이므로 자아게라고 불러 익숙해져 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위대한 시(詩)란 영지와 환희가 영원히
넘치는 샘이다"라고 말했다. 이 자아게야말로 실로 영지와
환희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생명의
진정한 자유의 찬가이다. 이 자아게를 독송하는
공덕은 광대무변하다.
니찌렌(日蓮)대성인은 자아게에 대해 법화경 28품에서
혼(魂)이라고 말씀하셨다.
(同1049쪽). 그리고 "전우주의 제불(諸佛)은 자아게를
스승으로 부처로 되셨도다.
(따라서 자아게는) 세계사람의 부모와 같다"
(同 1050쪽, 취의)고 찬탄 하셨다.
법화경. 수량품을 수지한 사람은 "제불의 명(命)을 잇는 사람"
(同 쪽)이다. 삼세시
방의 제불과 같은 생명이 우리들의 생명에 콸콸 흐르고 있다.
따라서 자아게를 수지한
사람을 적(敵)으로 한다는 것은 삼세의 모든 부처를 적으로 삼는
것과 같다고도 말씀하셨다. 이만큼 대성인이
찬탄하시는 자아게에는 어떠한 부처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인가.
앞부분에서 배운 수량품 장행(長行)의 마지막에 "거듭 이 의(義)를
말하고자 하여 게를 설해 말씀하시느니라"고 있었다.
자아게에는 수량품 장행에서 설해진 것이 반복된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라도 중생들이 알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전하고 싶다는 부처의 마음이 게문(偈文)을 낳은 것이다.
그럼 자아게는 장행의 단순한 반복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더 깊게 미래를 지향(志向)하고, 더 강하게 부처의 자비가
담긴 경문이다.
모두 부처라는 대자비의 경문
장행에는 석존의 영원한 생명이 밝혀져 있다. 과거 구원의
성도(成道)를 밝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바세계에서 항상
중생을 교화해 온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미래를 향해서도,
부처의 생명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고 설해져 있다.
그러나 자아게는 이 미래를 향한 상주불멸의
4문자를 더욱 넓게 찬탄한다.
천태는 이렇게 해석했다.
자아게에는 언제 어떠한 때에도 중생이 원할 때 부처는
반드시 출현하여 그 국토는 부처의 낙토가 된다는 것이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또 한편 부처는 상주불멸인데 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볼 수있을까 하는 것도 설해져 있다.
소위 자아게에는 부처와 부처를 구하는
제자의 연대, 삼세 영원한 사제의 연대를 깊게 맺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수량품은 미륵보살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설법이 시작된다.
그러나 수량품 전체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미륵보살들만을
위해 설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확하게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우리들을 위해
설해진 가르침이다.
따라서 수량품의 진정한 대고중은 석존 멸후 특히 말법의
일체중생이다. 그 중에서도자아게야말로 미래를 전인류를
향한 메시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아게의 마지막 일절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가속히 불신(佛身)을 성취할 수 있게
하리라고 부처가 소원하는 내용이 설해져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만인의 흉중에 진실한 행복경애를 확립시키려고
하는 부처의 자비가 자아게 전체에 넘치고 있다.
자아게 일구일구(一句一句)에 모두를 부처가 되게하려는
부처의 자비가 담겨 있다.
문저로 말하면 만인이 묘법의 당체이며 모두가 부처이다.
그 진리를 자각하는 공덕을 찬탄한 것이 자아게이다.
자아게는 장행에서 명백히 밝힌 진리를 향한 길, 참된
복으로의길을 모든 사람이걸을 수 있도록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깊이 호소하는 경문이다.
부처의 광대하고 영원한 생명을 밝힘
대성인은 법화경의 문자는 한문자 한문자가 금색의
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아게의 의의를 다시 알기 쉽게 말씀하셨다. 즉 "이 자아게의
금색 문자는 전부 5백 10자가 된다. 이 하나 하나의 문자가
우리들이 독송할 때에 태양이 되고 부처가
되어 어떠한 세계도 비추고 전우주도 비춘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자아게는 전인류를 비추는 경문입니다. 이 인류의 지보(至寶)인
경문을 우리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독송한다.
그 대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또 우리들은 자아게를 독송할 뿐만 아니라 자아게의
실천자이며 증명자이기도 하다.
자아게의 공덕을 전인류에게 전하고 넓히고 있다.
니찌렌(日蓮)대성인과 삼세시방의 제불의 찬탄은 틀림없다.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문자 하나 하나가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아게가 부처의 생명 자체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의 처음에
자(自)와 끝의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신(身)을 합하여
"시종 자신이니라"고 말씀하셨다.(어서 759쪽)
즉 자아게란 시종 일관하여 부처 자신, 부처의 생명을 설한
것이라는 지남 이시다.
대성인은 또한 이 자와 신사이에 설해지는 자아게 전문(全文)은,
모두 자신의 활동,행동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의구전에는 "자아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자수용신이란 원하는대로 받아 쓰는 몸이라 읽으며,
우주 전체를 자신이라 열고 우주 근원의
묘법의 힘을 자유자재로 받아 쓰는 몸을 말합니다.
결국 자아게는 대성인 자신의 자유자재의 경애를 나타낸
경문이라는 말씀이시다.
마치 대우주를 자유자재로 유희하는 것처럼 일체의 장애도
없으며, 더욱이 영원히계속되는 금강불괴(金剛不塊)의 행복경애,
그 광대하고 영원한 생명을 설해 밝힌 것이 자아게이다.
또한 이 자수용신이란 출존형(出尊形)의 부처라고도 한다.
즉 색상장엄하게 장식된
존형을 벗어난 범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부처의 경애의 詩(시), 위대한 자신의 찬가
도다선생님은 자아게에 대하여 부처 자신의 경문이며
우리들 자신의 경문이다라
고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자아게는 위대한 자신을 찬탄한,
삼세에 걸친 자신의 자유자재의 경애를 노래한 시(詩)이다.
대성인은 "한사람을 본보기로 하여 일체중생 평등" (同 564쪽)
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아게도 구원의 본불의 자신을 노래하는 동시에 바로
우리들 자신을 찬탄하는 것이다.
나자신을 나는 노래한다. - 미국의 민중시인 휘트만의 인간찬가는
이런말로 시작된다.(풀잎) 그는 힘찬 확신에 가득차서 노래했다.
"어떠한 사람도 내면에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
누구도 나보다 월등하게우수한 자는 없으며, 한사람이라도
보리 한알 만큼 열등한 자도 없다."
나는견실하며 건전, 나는 불멸, 나는 장엄,
나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도 인간 자신속에서, 자기 자신속에서 신성하고도 존극한
빛을 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아게에 통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본래의 위대한
자신을 깨닫는 길을 가르친 것이 불법이다.
도다선생님은 가르치셨다. 스스로의 생명에 살아라고
석존이 홍교의 여행을 개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숲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자신을 찾아라!고 호소했다.
자신을 찾아라! 진실한 자기를 알라! 자기 발밑을 파라!
거기에 행복의 샘이 있다.
희망의 길이 있다. 그러므로 도다선생님은 항상 자신(自身)의
생명에 살아라 자기자신에 살아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하여 고통받는 것도 사업에 실패하여 괴로운 것도,
부부싸움을 하여 비애를 맛보는 것도 혹은 화로에 걸려 넘어져
다치는 것도, 결국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의 생활이다.
즉 자기 자신의 생명 현상의 발로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인생생활은 자기 생명
의 변화이다. 때문에 더 좋게 변화하여 끊임없이 행복을 획득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살아라... 아니, 자기 자신에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저사람이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든가, 이 세상이 이렇게 되면 행복할것이라고 하며
타인에 살고 대경(對境)에 산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라고.
아무리 해도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 행복도 불행도
인생의 모든 것은 이 자신(自身)이라는 두자에 포함되고 만다.
결국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이 자신을 어떻게 단련하고
어떻게 장엄케 해 가는가. 여기에 인생의 승부가 있다.
바람부는 대로 우왕 좌왕하는 그런 약한 자신이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정사(正邪)를 깊이 판별하여 확고한 자기 자신을 갖는
사람은 하찮은 세평에 분동되지 않는다.
우뚝 솟은 자신이다. 나는 본래 부처이니라!, 그 진짜의 자
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자아게는 그것을 찬탄한다.
부처의 덕과 가르침을 찬탄 자신의 존엄을 설하는 일체경의
간심(肝心) 우리들은 조석 근행시에 법화경의 방편품 제2와
여래수량품 제16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수량품에는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부터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에
이르는 일구(一句)가 5자로 된 운(韻)을 밟는 경문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자아게(自我偈)라고 합니다.
자아(自我)부터 시작하는 게이므로 이런 명칭이 생겼습니다.
게(偈)란 부처의덕과 가르침을 찬탄하는 시(詩)를 말합니다.
자아게의 경우 다섯 자로 된 일구가 넷이 이어져 일게(一偈)로
되어 있는 시(詩)입니다.
산문적으로 설한 수량품의 이시불고(爾時佛告) 제보살급
(諸菩薩及)으로 시작되는 장행(長行)의 설법 내용을 재차
운을 밟은 시의 형태로 설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중송(重頌)이라 합니다.
송(頌)이란 인도의 말인 범어(梵語:산스크리트 어)의 가다
(게<偈>)를 번역한 말입니다.
생명 본래의 모습을 설함 그러면 이 자아게는 법화경 28품
중에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요.
니치렌 대성인은 <호렌초>라는 어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저 법화경은 일대성교(一代聖敎)의 골수이고 자아게는
28품의 혼(魂)이니라」(어서 1049쪽) 즉 일체경 중에서도
최고의 경인 법화경의 자아게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그 진실한 뜻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自)란 구계(九界)이며 아(我)란 불신(佛身)이고, 게(偈)란
도리법리(道理法理)이며 본유(本有)라고 도리를 밝힌
게송(偈頌)이니 깊이 이것을 사색할지니라.
도리의 실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어서 759쪽)
진실한 자아(自我)를 밝히다 구계 불신이란 우리들의 생명을
지옥계로부터불계까지의 열 종류의 경애로
구분한 가운데서 불계와 그 이외의 경애를 말합니다.
구계 각각의 생명에는 원래 불계라는 최고의 인격, 경애가
구비되어 있으며, 불계에도 구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이 구계즉불계의 생명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연속되어 있다
이 사실을 도리(道理)로서 설하여 밝힌 것이 자아게입니다.
또한 이 진실된 생명의 모습을 도리로서 교시하면서
일체중생에게 본래 구비되어 있는 불계를 개발하는 근본의
가르침이야말로 南無妙法蓮華經의 본존님이시다라고
그 대공덕을 찬탄한 것이 자아게라고 결론지으시고 있습니다.
또 <어의구전>에 「자(自)란 시(始)이고 속성취불신
(速成就佛身)의 신(身)은 종(終)이며, 시종(始終) 자신(自身)이고
중간의 문자는 수용(受用)이니라.
따라서 자아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니」
(어서 759쪽)라고 있습니다. 자아게의 서두에는 자(自)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신(身)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자아게는 말법의 본불이신 니치렌 대성인
자신(自身)의 일을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란 진실한 자아(自我)이고 생명의 주체이며,
이것을 설하여 교시한 것이 자아게입니다.
자(自)에서 시작하여 신(身)으로 끝나는 중간의 문자는
모두 자신의 행위와 활동(수용<受用>)이 됩니다.
여기에 자수용신이란 마음대로 받아 사용하는 몸이란 뜻으로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는 가장 청정하고 강력하며 영원한
행복경애를 확립하신 대성인 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이 자수용신으로서 불계의 생명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본래 구비되어 있다
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가 이것이니라」
(어서 759쪽) 생명의 명경(明鏡)은 본존님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의문을 제기하는 작금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의 구극의 과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행복한 인생, 뜻있고 삶의 보람이 있는 나날을 구축하려면
자신의 주체성 확립이 필요합니다.
주체성의 확립은 자기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알아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복장이나 머리의 형태가 바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를 알려면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흐리지 않은 맑은 거울을 향해야 자기의 옷차림을 알고
정돈할 수 있습니다.
삼대비법(三大秘法)의 본존님은 이 거울에
비유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본존님을 신수함으로써 자기의 생명의 비뚤어짐을
알고 본래의 존귀한 모습대로 단정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인간혁명이라고 합니다. 자아게는 이 자신의
진실한 모습과 작용을
찬탄의 말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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