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품 강의 21
묘호렝게교 여래수량품 제16
묘 호 렌 게 쿄 뇨 라이 주 료 혼 다이 주 로쿠
【본 문】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 億제阿僧祇
자아득불래 소경제겁수 무량백천만 억제아승기
지 가 토쿠 붓 라이 쇼 쿄 쇼 콧 슈 무 료 햐쿠 센 만 오쿠 사이 아 소 기
常說法敎化 無數億衆生 令入於佛道 爾來無量劫
상설법교화 무수억중생 영입어불도 이래무량겁
조 셋 포 쿄 케 무 슈 오쿠 슈 조 료 뉴 오 부쓰 도 니 라이 무 료 코
내가 부처를 득한 이래 경과한 바의 모든 劫數(겁수)는 무량백천만억 억재아승기
이다. 항상 법을 설하여 무수억의 중생을 교화해서 불도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무량겁이니라.
【강 의】
부처를 得한이란 자신의 부처의 작용을 나타냄
법화경은 소생의 경전이다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어서 947쪽)이다.
묘법에는 희망이 있다. 용기가 있다. 확신이 있다. 지금 간사이의 여러분은
묘법의, 생명의 위대한 힘을 증명해 주시고 있다. 여러분의 모습이 전세계의 희망이다.
자, 소생의 경전을 통해 희망의 一節을 공부하자.
이제부터 자아게(自我偈)의 경문에 들어간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자아게는 부처 자신에 대해 설한 경전이다. 도다(戶田)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자아득불래(내가 부처를 득한 이래)를 아(我) 즉 석존이 부처가 되고 나서 라고
읽는 것은 문상(文上)으로 읽는 것이고, 문저(文底)로 배독한다면 더욱 깊은 의미가
설해져 있다고.그리고 부처를 득한다는 것에 대해, 은사는 "부처라고 하는 경애는
밖에서 오는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생명(生命)속에서 스스로 약동하는 바의 부처의
역할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셨다.
즉 문상으로 읽는다면, 이 일구(一句)는 석존이 시성정각(始成正覺)을 타파하고
구원실성을 밝혀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선언한 의의를 재차 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저로 읽으면 이것은 본유무작삼신(本有無作三身)을 가르치신 경문이다.
어의구전에는 "이 일구는 무작삼신을 배우는 문(文)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어서
756쪽). 무작삼신이라는 근원의 부처의 생명을 설한 경문이며, 그것이 우리들의 생
명에도, 구원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다고 읽는
것이 문저의 의미 이다.
久遠의 부처는 十界本有, 있는 그대로의 모습
수량품이 밝힌 영원한 생명의 입장에서는 불계도, 구계도 본유상주이다. 대성인은
自我得不來란 "자(自=구계)도 아(我=불계)도 득한 부처가 왔다"는
의미라고 말씀하셨다.
문저로 말하면 구원에 성불한 부처란 구계로부터 불계로 된 부처가 아니라 구계도
불계도 함께 득한 부처이다. 이것을 十界本有라고 한다.
본유란 원래 있다, 원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작용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본래 있는 그대로" (어서 759쪽)의 생명의 본성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도 무작이라고도 한다. 본래의 진실 된, 있는 그대로의 생명
의 모습다. 있는 그대로란 말하자면, 본래의 생명의 힘을 100%(퍼센트) 열어간다,
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이제 곧 싱싱한 어린 새싹이 돋아난다. 필사적으
로 뻗어나온 신록의 잎이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 모습에는 조금도
허술함이 없다. 장난스럽다거나 위축된다거나 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생명을 다해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딱하게 긴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답게 힘껏 살고 있다. 그래서 빛나고 있다.게다가 주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자기의 충실감을 얻었다! 나는 자기를 획득했다! 어떤 소유가 그것에 필적
하랴" (로망 롤랑).
하물며 묘법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본유의 자기자신을 열고 영원히 나의 생명을
빛나게 해 갈 수 있다. 얼마나 굉장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이 자아득불래 의 일절을 강의하시던 도다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실로
명강의였다.
"여러분 자(自)와 득(得)에 동그라미 쳐보시오"
회장(會場)에 선생님의 조금 쉰 목소리가 울린다. 모두 손에 쥔 연필로 동그라미를
친다.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사람 , 무엇을 시키려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 이 두글자를 합치면 자득(自得)이 되고 아불래(我佛來)가 남습니다. 이 아불래의
아는 법신여래, 불은 보신여래, 래는 응신여래로서 삼신여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자아득불래란 이 삼신여래를 스스로 득하였느니라, 자득이니라고 읽는 것이
대성인님께서 읽으시는 방법입니다" 라고.
삼신여래(三身如來)는 자득(自得)이니라. 그렇게 말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의미도
잘 모르고 읽던 자아득불래의 한구절에서 자득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부처란 스스로 득(得)하는 것, 본래 자신의 흉중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구
나 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강의에는 우리들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묘법(妙法)을 봉창하는 범부야말
로 부처라는 것을 어떻게든 가르치고자 하는 열성이 있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니찌렌(日蓮)대성인의 마음이시다. 어의구전의 자유자재의 활석
(活釋) 인간석(人間釋) 그것은 모두 이 일점에 집중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결정이다.
광포로 달리는 그 행동에 無作의 부처가
여기서 삼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말해두고자 한다.
법신여래란 상주불멸의 진리인 묘법 그 자체이다. 이것이 자신은 본체이므로 아불
래(我佛來)의 아(我)에 해당한다. 보신여래란 그 묘법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智慧)
이고, 깨달음의 과보로서 갖춰지는 부처의 공덕이다.
본래의 자기자신을 깨달은 각자(覺者)를 부처라고 하므로 보신여래는 불(佛)이라
는 자(字)에 해당된다.
응신여래란 중생구제의 작용을 그 근본은 자비이다. 중생의 주처에 출래하는 것이
므로 이것이 '래'에 꼭 들어맞는다.
이 삼신(三身)이 구원의 석존의 일신(一身)에 갖춰져 있다.
영원의 법에 주하며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무량의 지혜를 쓰고 무량의 공
덕을 낳아 간다. 이 영원히 중생을 구하는 부처가 구원(久遠)의 석존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에 본유의 삼신 - 무작의 삼신여래를 자득하신 것이 대성인의
경애이시다.
무작삼신이란 요컨대 묘법의 힘에 의하여, 자신도 마음껏 즐기며 타인도 구제해 가
는 생명 본래의 힘이다. 이 자타 모두의 행복을 원하는 참된 자신을 아는 것 이상의
기쁨은 없다. 이만한 안심도 없다.
어의구전에는 대성인께 이어지는 우리들도 또한 무작삼신여래라고 설해져 있다.
"지금 니찌렌(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함은
자아득불래의 행자(行者)이니라" (어서 756쪽) 고 말씀하셨다.
우리들도 묘법을 봉창하고 자행화타에 걸쳐 실천해 갈 때 대성인과 똑같은 경애
무작삼신여래를 자득(自得)할 수 있다. 지용의 보살로서 고난과 투쟁하는 사람,
광선유포를 위해 진지하게 싸우는 사람.
그 사람의 흉중에 무작삼신여래의 생명이 나타난다.
위대한 부처의 경애도 信의 一字로 득한다.
저 벗이 괴로워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절대로 본체
만체할 수 없다. 자신도 힘들지만 자기를 희생 하면서까지 주위 사람을 위해서
행동(行動)해 간다. 그러한 서민의 영웅의 모임이 학회다.
저 한신, 아와지 대지진 때 동지 여러분들의 활약이 실로 그러 했다.
질 수 없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이었다. 누구나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쥐어짜낸 행동과 한마디 말, 그리고 격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가.
또한 괴로워하는 벗을 위해 시간가는 것도 잊고 어본존께 기원해 가는 진지한,
괴로워 하는 벗의 얼굴을 보면 괜찮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으니까!라며 격려해
마지 않는 저 대확신,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도 아니다. 체면이나 형식이나 외관에
사로잡혀있으면 생명 본유의 힘은 나오지 않는다.
진심으로 다른사람들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
이다.
그 마음, 그 일념, 그 행동 속에 삼신여래가 생생하게 나타난다. 생명 본래의
무한한 힘이 솟아 오른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누가 삼신여래란 말인까. 여러분들의
인생이야말로 "일념에 억겁(憶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의 삼신이 염념
(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어서 790쪽) 는 말씀 그대로의 인생으로 된다.
우리들은 삼신여래의 경애, 구해도 얻을 수 없는, 아니 너무나도 위대하여 구하려
고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부처의 대경애를 자득할 수 있다.
신(信)의 일자(一字)로서, 묘법(妙法)을 끝까지 수지함으로써
스스로 득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경문 그대로 "無上寶聚 不求自得(무상의 보취, 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득
했느니라)". (개결 264쪽)쪽이 아닌가.
우리들의 가슴에 최고의 보물이 있다. 고난에 맞서는 용기(勇氣), 한없는 희망, 불
타오르는 정열,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는 지혜 - 전부가 자신의 본유의 보물이
다.
그것을 확신하고 투쟁한 사람이 부처이다. 그 사람 자신이 최고의 보물 덩어리(무상
보취)로 된다. 세세생생 대장자이며 대만족의 인생으로 된다.
결국 자득이란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얻는 것이다. 이 삼세에 걸친
자신의 자유자재의 대경애를 신심으로 스스로 쟁취해 갈 수 있다. 또한 반드시
쟁취해 갈 수 있다. 이것이 자아게의 진수이자 壽量品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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