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품 강의 22
본 문】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위도중생고 방편현열반 이실불멸도 상주차설법
이 도 슈 조 코 호 벤 겐 네 한 니 지쓰 후 메쓰 도 조 주 시 셋 포
我常住於此 以諸神通力 令顚倒衆生 雖近而不見
아상주어차 이제신통력 영전도중생 수근이불견
가 조 주 오 시 이 쇼 진 즈 리키 료 텐 도 슈 조 스이 곤 니 후 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고로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낸다. 그러나 실제로는
멸도하지 않고, 항상 이곳에 住(주)하여 법을 설하노라. 나는 항상
이곳에 주하지만 여러가지 신통력을 가지고 전도된 중생으로 하여금
가까워도 보이지 않게 하느니라.
【강 의】
대좌담회운동 -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 서민의 대화의 화원이 넓혀지고 있다.
좌담회는 굉장한 생명의 광장이다. 어본존을 중심으로 한 신심의 환희, 감격,
약동, 연대. 그장소에 우주의 제천선신이 계속해서 결집한다.
불,보살이 여러분을 복덕의 빛으로 감싸간다. 흥겨운 생명과 생명의 촉발로 SGI는
더욱 위광세력을 더해간다.
마키구치선생님도 도다선생님도 이 민중 共和의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고 계실까.
자, 오늘도 불법의 생명론을 함께 공부해 가자.
부처의 입멸은 전도된 중생을 위한 방편
오백진점겁(五百盡点劫)의 구원에 성불한 석존은 삼세영원에 걸쳐 중생을 항상
구제하는 부처이다. 그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부처가 왜 입멸하는 것일까.
그 대답이 위도중생고. 방편현열반(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고로 방편으로 열반을 나
타낸다)이다. 부처의 열반(죽음,입멸)도 중생을 구하기 위한 방편(수단)이라고 설해
져 있다.
열반이란 본래 번뇌를 극복한 고요한 경지를 말한다. 더욱이 소승교에서는 번뇌라
는 마음의 차원만이 아니라 신체의 영향으로 부터도 탈각(脫却)하는 죽음을, 완전한
열반이라고 했다. 거기에서부터 부처의 입멸(죽음)도 열반이라고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량품에서는 그와 같은 부처의 입멸, 열반의 모습은 방편으로서 나타난 것
이고, 자비와 지혜에 의한 중생구제의 영원한 활동이야말로 진실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끊임없는 중생구제의 활동에 진정한 안정이 있다. 자비와 지혜에 끝까지
살아가는 부처의 경애에 절대로 안온이 있고 진정한 정적(靜寂)이 있다.
예를 들면 정지(靜止)한 팽이는 넘어지지만, 빠르게 회전하는 팽이는 안정된 것과
같다.
진실한 열반이란 심신(心身)의 단멸(斷滅)이 아니다. 지혜의 완성이다. 지혜의 완성
(完成)이란 자비와 일체가 되어 작용하는 무한한 지혜이며 구체적으로는 영원한 중
생구제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경문에 신통력이라고 있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영원한 부처의 생명에 갖추어지는 자
비즉지혜의 작용이다.
그리고 문저(文底)로 말하면, 이것이 우리들의 생명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무
작본유의 삼신여래이다. 그 본래의 자기를 잊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된 중생이라고
한다.
부처는 일체중생을 내 자식이라 보고 인도한다.
전도된(거꾸로 된) 중생 - 부처가 본다면 아직 분별없는 아이와 같다.
예를들면 장난꾸러기 아이가 언제나 지켜보아 주는 어버이를 지겹게 생각한다거나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일단 어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 어디로 갔느냐고 소리쳐 울면서 찾기 시작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도된 중생은 부처가 입멸해야 비로소 부처의 고마움을 알게 된
다. 부처에게 일체 중생은 모두 내 자식이다. 부처는 실로 어버이처럼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여러가지 손을 쓴다.
모든 방편(方便)을 사용한다. 그 최대 방편이 부처의 입멸이다.
사실 부처는 항상 사람들 곁에 있으면서 지켜본다. 상주차설법(항상 여기에 주하여
법을 설한다)이다. 그러나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합니다. 이것을 수근이불견
(가까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한다)이라고 한다.
왜 부처는 일부러 그와 같이 하는 것일까. 그것은 중생에게 본래의 자기를 자각시키
고 자립시켜 가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아이들을 예로말하면 아기에게 없다 없다 까꿍하며 달래는 것과 같다.
또 아이는 숨바꼭질을 좋아한다. 이런 일들은 아이의 심리 발달상에서 생각하면 실
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한다.
눈 앞에는 없어도 어딘가에 있다. 반드시 또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심과 신뢰
를 키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심정이 키워진다면 자립(自立)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음 속
에 어버이가 살고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확고하게 신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원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저 사람만은 알아준
다. 저 사람만은 자신을 신뢰해 준다. 이 절대적인 안심, 이 확고한 신뢰가 커다란
격려가 되고 무엇보다도 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
늘 부처와 함께하는 인생은 강하다.
금세(今世)만이 아니다. 삼세(三世)에 걸쳐 중생을 지켜보아 주는 어버이가 수량
품(壽量品)에 밝혀진 영원한 부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엄연히 갖추어진 부처도 전도된 중생(衆生)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찌렌(日蓮)대성인이 자신의 부처의 생명을, 어본존으로서
도현해 주셨다.
이 어본존을 거울로 하여 자기 마음의 어본존을 볼 수 있다.
대성인은 아부쓰보어서(阿佛房御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부쓰보, 당신은 그대로 (어본존으로 도현된 법화경에 설해지는 다보여래의) 보
탑입니다. 보탑은 그대로 아부쓰보, 당신입니다" "자신이 또한 삼신즉일신(三身卽一
身)의 본각(本覺)의 여래입니다.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곳이 바로 보탑의 주처입니다." (어서 1304쪽,취의)라
고.
어본존께 기원하는 자신은 그대로 어본존과 똑같이 된다. 어본존이라는 거울에 비
추면 자신의 불계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어본존은 대성인의 혼을 그대로 쓰신 부처의생명 그 자체입니다. 부처는 어본존으
로서 엄연히 상주한다. 그렇지만 신(信)이 없으면 종이나 나무로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존귀한 부처의 생명이다.
어의구전에는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의 상주에 대해 법화경 행자가 있는 곳이라
고 기술하시고 차(此:이곳)란 이 고난으로 가득찬 사바세계라고 말씀하셨다.(어서
756쪽 취의).
신심 근본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인생을 걸으며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부처는 상주한다.
또한 상주차설법의 설법에 대해 "말법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
소리가 자수용신(自受用身)의 부처의 소리이며 설법(說法)이다" (同쪽,취의)라고
교시하셨다.
어본존께 제목을 봉창하는 우리들 자신에게 자수용신의 부처(묘법의 공덕을 스스
로 받아 쓰는 자비 즉 지혜의 부처)의 생명이 용현한다.
즉 신심 근본의 사람에게는 부처의 지혜가 작용하여 부처의 공덕이 저절로 구비 된
다는 말씀이시다.
어떻한 고뇌도 어본존과 함께라면 극복 할 수 있습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이 있으
면 무한한 희망의 빛이 내리쬐고 무한한 힘이 솟아오른다. 이만큼 강한 인생은 없다.
묘법의 동지는 來世에도 광포의 진열에
도다선생님은 이 방편현열반이 생명은 영원하다고 설하면서 왜 죽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신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생사불이(生死不二)라고 하는 영원한 경애에서
보면 사(死)는 방편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도다 선생님은 사(死)를 곧잘 잠에 비유하셨다. 오랫동안 일어나 있어 피곤해지면
잠을 잔다. 푹 자고 일어나면 기운을 되찾는다. 오래 살아 노쇠하면 죽는다. 그리고
건강해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사(死)는 다음 생(生)을 위한 충전 기간
이다.
묘법에 산 사람은 곧바로 태어나 내세도 광선유포의 진열에 되돌아온다. 최고로
충실한 소원대로의 사명있는 인생으로 활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며 체념하여 태도를 바꿀 필요도 없다. 이 진실
을 똑 바로 응시하며 당당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살고 살아 끝까지 사는 것이 불법자
의 삶의 자세이다.
금세도 끝까지 살고 삼세를 끝까지 사는 것이다.
단 도다선생님도 강조 하셨지만, 영원한 생명이라 하더라도 바뀌어 태어나는것은
아니다.
과거세에서 금세로, 또한 금세에서 내세로 생명 자체는 연속된다. 인과이법(因果
二法)은 삼세 영원하다. 생명에 새겨진 선악의 인(因)은 그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도다선생님은 우리들의 생명은 사후에 우주로 명복한다. 융화된다고 가르치셨다.
- 융화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과 혼합되는 것이 아니다. 각기 독립해 있으면서 생
전의 행동에 따라 여러가지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꿈 속에서 운다든가 웃는다든가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떤 것을 계기로
꿈 에서 깨어나듯이 연(緣)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고.
따라서 내세가 있으니까 금세는 되는데로 살자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금세의, 한번
뿐인 인생이니까 마음 내키는대로 멋대로 하자고 할 수도 없다.
숙명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는 것이 대성인의 불법이다.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관에 입각하면 먼저 금세가 바뀐다.
어본존께 기원 할 때 생명 깊은 곳에서부터 변혁이 일어난다. 강하고 청정한 생명
력이 끝없이 솟아난다. 숙명의 쇠사슬을 끊고, 생명 본래의 상쾌하고 왕성한 불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항상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간다. - 그것이 우리들의 인간혁명의 생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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