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품 강의 23
【본 문】
衆見我滅度 廣供養舍利 咸皆懷戀慕 而生渴仰心 衆生旣信伏
중견아멸도 광공양사리 함개회연모 이생갈앙심 중생기신복
슈 켄 가 메쓰 도 고 쿠 요 샤 리 겐 카이 에 렌 보 니 쇼 카쓰 고 신 슈 조 키 신 부쿠
質直意柔軟 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 時我及衆僧 俱出靈鷲山
질직의유연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 시아급중승 구출영취산
시치 지키이 뉴 난 잇 신 욧 켄 부쓰 후 지 샤쿠 신 묘 지 가 규 슈 소 구 슈쓰 료 주 센
중생이 나의 멸도를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하며 모두 연모를 품고 갈앙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중생은 이미 신복하여 질직하며 마음이 유연해서 일심으
로 부처를 뵈려고 원하여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 그 때 나와 중승이
다함께 영추산에 나간다.
【강 의】
아침저녁으로
방편품과
수량품
宇宙의 曲에
맞춰 즐기라
강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이 한수를 읊었다.
조석 근행은 소우주인 우리들의 생명과 대우주의 합창의 가락이다.
묘법(妙法)의 음성, 제목의 소리는 우주의 곡이다.
우리들은 아침 저녁으로 대우주에 울려 퍼지는 묘법의 교향곡에 쌓여 살고 있다.
삼세시방의 불.보살과 제천선신이 여러분을 찬탄하고 지키며 감싸준다. 이 점을
확신하고 금세(今世)의 인생을 즐겁고 유쾌하게 끝까지 살아 나아가기 바란다.
이것이 나의 심정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포를 위해 사는 여러분은 언제나 부처와 함께하고 있다. 고독
지옥(苦獨地獄)과 같은 현대에서, 이만한 안온(安穩)의 길 상락(常樂)의 길이 어디
있을까. 더구나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나 지용(地涌)의 벗이 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동
지가 있다. 이렇게 존귀(尊貴)하고 훌륭한 인생은 없다.
이 무상(無上)의 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거룩한 부처님과
만날 수 있다. 이번 경문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자 한다.
부처를 갈앙했을때, 師第의 영원한 緣을 실감
부처가 보면 涅槃은 方便이다. 사실은 언제나 중생곁에 있다. 중생(衆生)은 좀처럼
그 진실한 모습을 모른다. 그러나 부처가 입멸하면 부처를 구하는 마음과 연모하
고 갈앙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모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부처는 방편현열
반(方便現涅槃)이라는 자신의 입멸의 의의를 밝힌 후, 모두에게 자애의 말을 들려
준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유골에 공양하며 나를 갈앙할 것이다. 그와 같이 오로지 부처
를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또 나와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영추산(靈鷲山)
에 많은 제자와 출현할 것이다라고. 멸후의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마음이 절실하
게 전해져 온다.
부처와 제자의 관계는 금세(今世)만이 아니다. 본래 사제(師弟)는 삼세 영원하다.
나도 도다(戶田)선생님과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지금까지 투쟁해 온 나는 알 수
있다.
단지 막연하게 앉아 있어서는 부처와의 유대를 느낄 수 없다. 이 경문에서는 부처
를 구하는 마음이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선 널리 사리를 공양하고라고 있다. 이것은 사리(유골)공양 자체를 장려하는 것
이 아니다.
민중이 부처에게 직결해 가는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부처에 대한 최고의 공양은 부처를 연모(戀慕)하게 하는 물체에 대한 예배가 아니다.
부처의 유지(遺志)를 계승하는 것이다. 즉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라는 사상을 내걸
고 민중구제에 일어선 부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해서 조금이라도 실현하기 위
해 싸우는데 있다.
석존의 마음은 법화경이다. 대성인의 마음은 삼대비법이며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광선유포의 대사업이다.
우리들로서는 어본존에게 창제하고 광포의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 지금에 있어서의
광공양사리(廣供養舍利 널리 사리를 공양하고)가 되는 것이다.
어본존을 공양하고 어본존에 대한 연모의 정, 갈앙심을 일으킨다. 이것이 신심의
極意이다.
니치렌(日蓮)대성인은 묘이치니(妙一尼)라는 여성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신심이
라는 것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부인이 남편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듯이 남편
이 부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듯이 또,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듯이, 자녀가 어머니
로부터 떠나지 않듯이 이렇게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것을 신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서 1255쪽, 취의) 라고 쓰셨다.
부부의 애정, 부모자식간의 애정.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의 발로이며, 인간
의 순수한 마음이다.
특히 지금의 시대는 이러한 애정마저 희박해진 면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명
예나 재산이 있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잃는다면 불행하다. 이 이상의 고뇌는
없다.
반대로 이 글을 받은 묘이치니(妙一尼)는 이 마음을 가장 소중히 한 여성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마음은 누구보다도 풍요로웠다. 더구나 묘이치니에게
이 대성인님의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다쓰노구치 법란(龍口法難). 사도유죄(佐渡流罪)의 와중에도 묘이치니는 부부 함께
신앙을 관철했다. 법화경을 신앙한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 당하는 등의 난도 겪
었다.
또한 남편은 대성인의 유죄 사면의 소식을 듣기 전에 죽고 만다. 남아 있는 어린
아이들 중에는 병든 아들도 있고 딸도 있었다. 묘이치니 자신도 병으로 몸이 쇠약
했다.그러나 묘이치니는 꿋꿋하게 견뎌냈다. 죽은 남편의 몫까지 신심을 분기 시켜갔
다. 생활이 고통스러웠으나 대성인이 사도에 계실 때나 미노부에 계실 때도 하인을
보내시중을 들게 했다. 대성인에게 받은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 " (어서
1253족)는 희망의 메시지를 마음의 지주로 해서 참고 노력했다.
대성인도 격려의 말씀을 거듭하셨습니다.
"법화경에 생명을 바친 당신의 남편은 부처가 되어 하루종일 당신을 지켜봐 주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불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어서 1254쪽, 취의). 이 격려에 묘이치니가 얼마나 용기 백배했을까.
신심의 극의는 항상 어본존을 구도하는 것
가장 불행한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것이 불법이다. 대성인의 마음
이다. 묘이치니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7년정도 고투를 계속하고 있을 즈음에
대성인은 편지를 보내셨다. 그것이 앞서 말한 "대저 신심(信心)이라고 함은 별다
른 것이 아니니라 " (어서 1255쪽)로 시작되는 일절이다.
즉 묘이치니가 죽은 남편 몫까지 싸우며,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남편과 자녀들에 대한 마음 그대로 본존님께 부딪쳐 창제해 가시오. 그것이 신심
입니다라고 격려 하셨다.
신심(信心)의 극의는 어렵다면 어렵고 싶다면 쉽다. 요컨대 어떤 고경에서도 어본
존을 잊지 않고 구도(求道)하는 것이다. 자녀들이 어머니 하고 찾듯이 어머니가 자
녀들을 포근하게 안아주듯이. 순수하고 순진하게 부처를 구도하면 가슴 속에 무너지
지 않는 행복의 성이 용현한다.
반대로 의심이 깊고 생명에 연막을 치는 것같은 삶의 자세이면, 그 신앙은 부처의
대생명과의 감응을 잃고 만다.
자아게(自我偈)의 경문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심이란 연모 갈앙심이고 질직
의 유연, 어디까지나 부처에 대해서 또 어본존에 대해서 순수하고 유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는 경직된 자세여서는 안된다.
경문에는 또한 신심의 자세로서,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일심으로 부처를 뵈려고
원하여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않고)이라고 교시하고 있다.
마음 속으로부터 부처를 뵈려고 염원하여,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한
순수하고 솔직한 신심, 구도의 마음, 불석의 실천이 있을 때, 부처는 많은 제자들
과 함께 영추산에 출현한다. 즉 언제든지 부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명에 부처의 생명이 솟아 나타난다.
도다(戶田)선생님은 이렇게 강의 하셨다.
"우리들이 생명속에 엄연하게 부처가 나타나신다면 우리들의 불행은 이제 없어질 것
입니다. 즉 우리들이 본존님께 기원할 때 우리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들의 생명
속에 본존님이 틀림없이 나타나 계십니다.
우리들의 몸이 영추산(靈鷲山)이 됩니다. 그래서 대성인님 즉 대어본존의 힘이 우
리들의 몸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라고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의 사람은 반드시 시아급중승. 구출영추산의 경애로 될 수
있다. 경문에서는 이 두 어구(語句)는 그 때의 자(字)로 이어져 있다. 즉 자신의
마음이 정해지면 그 때, 반드시 부처의 대자비로 감싸인다고 밝혀져 있다.
그 때란 머지 않아라든가 미래에라는 뜻이 아니다.
수지즉관심(受持卽觀心)의 성불이다. 어본존에 대한 강성한 신심에 선 사람은 그
때, 그 순간에 나의 생명에 부처의 생명이 용현한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이 부처가
계시는 영추산 - 불국토가 된다.
니치칸(日寬)상인도 "우리들이 이 본존을 신수(信受)하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면 나 자신이 즉 一念三千의 본존, 蓮祖聖人이니라"(관심의 본존초문단)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가슴속에 즉 어본존의 생명, 대성인의 생명이 용현한다. 이보다 더한 공덕
이 어디 있을까. 마음에 佛界(불계)라는 최고의 비보(秘寶)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이 평등성에 법화경의 본의가 있다.
그리고 말법의 인류 누구나가 그 보배의 상자를 열 수 있도록 한 것이 대성인의
마음이다.
그 상자의 문을 여는 열쇠가 일심욕견불의 신(信)과 부자석신명의 행(行)에 해당
한다. 진지한 구도(求道)의 실천만이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단 부자석신명이라 해도 생명을 경시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법화경의
본의에 위배된다. 이 경문의 참뜻은 소아(小我)에 집착하는 자기를 아끼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여 대아(大我) - 참으로 존엄한 자기에 사는 데 있는 것이다.
진정한 부자석신명이란 묘법을 근간으로 현실사회 속에서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최대로 자기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구도하는 사람의 생명은 충실해 지고 빛난다.
묘법의 신앙(信仰)을 수지한 사람이 얼마나 경애를 넓힐 수 있는가. 인생을 풍요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최대로 충실하게 하고 빛내기 위한
묘법이다. 고뇌에 빠져 정체하지 않기 위한 불법이다.
어본존은 공덕취(功德聚)이다. 즉 모든 공덕의 집합체이다. 나의 마음, 나의 신심,
나의 실천으로 전우주의 공덕이 모여든다. 관심의 본존이란 신심의 본존이다. 신심
이상으로 위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신심 강한 구도의 사람은 빛난다. 그 생명 자체가 주옥(珠玉)이 된다.
그것이 대성인의 불법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아게는 위대한 자기자신의 찬가이다.
자신의 내적(內的)인 본존을 여는 것도 자신이고 자신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당당한 자기자신을 구축할 수 있다. 폭풍우에도 움직이지
않는 태산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락(苦樂) 함께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 이
어찌 자수법락이 아니겠느뇨" (어서 1143쪽) 이다.
고통스러울 때도, 즐거울 때도,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진실한 수지(受持)이고 신심이다.
은사의 법화경 강의 개시로부터 50주년
2월 11일,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탄신일이다.
해마다 이날이 돌아오면 가슴이 뛴다. 지금은 전일본, 전세계에서 은사의 탄신일을 축
복해 준다. 이렇게 기쁜일은 없다.
특히 올해는 제2차대전 후 도다선생님이 법화경 강의를 시작하신지 50년. 나의 가슴속
에는 언제나 도다선생님의 강의가 있었다. 선생님의 심원하고 명쾌하며 인간애가 넘쳐
흐르는 강의를 후세에 남길 마음으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임해 왔다.
강의를 통해서 도다선생님의 지혜와 확신에 찬 지도를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더욱 깊이
읽고 있다.
감동과 결의가 확대되고 있다. 탄신일에 최고의 축하가 됐다. 靈山에서 즐겁게 웃으실
도다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듯하다.
영산이라고 하면 앞에서 공부한 수량품의 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 時我及衆僧 俱出靈鷲山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 시아급중승 구출영추산)의 글이 생각난다. 이것은 말법의 범부
가 성불하기 위한 要諦(요체)를 나타내고 있다.
제2차대전 후 창가학회 발전의 원점이었던 도다선생님의 獄中 悟達도 이 自我偈의 글
월에 통하는 의의가 있다.
이 단에서는 이경문의 뜻을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상에서 더욱 깊이 들어가서 설명해 보
려고 한다.
말법중생의 성불의 열쇠를 가리키다.
"一心으로 부처를 뵈려고 스스로 身命을 아끼지 않는다. 그때 나와 衆僧이 다함께
영추산에 나간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아게는 석존 멸후의 중생, 특히 말법의 凡夫에게 호소하는 詩
이며 노래이다. 그중에서도 말법의 범부가 성불할수 있는 열쇠를 가리킨 것이 이경문이
다. 그 열쇠란 一心이다.
그리고 이 일심의 비밀을 명확히 하고 三大秘法의 南無妙法蓮華經로서 말법의 일체중생
에게 열어주신 것이 대성인의 불법이다.
예를 들면 義爭房御書(기조방어서)에서 대성인은 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의 글월에 의해
서 니치렌의 己心의 佛界를 나타내고 삼대비법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셨다.(어서 892쪽)
그 때 일심의 비밀을 밝히시어 "일심으로 부처를 보는 마음을 하나로 하여 부처를 보는
일심을 보면 부처이니라"(어서 892쪽)고 말씀하셨다.
일심욕견불의 경문을 일심으로 부처를 본다에서 일심을 보면 부처이니라로 바꿔 읽고
계신다.
이것은 부처를 구하는 범부의 일심이 그대로 부처의 일심으로 되어 나타나는 것을 밝히
시고 있다. 대성인은 이 일심의 성불을 無作三身의 佛界의 성취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이 있다. 이 일심에 있어서는 범부는 즉 부처이다.
十界互具, 一念三千의 불가사의가 체현되어 있다.
대성인이 기심에 나타내신 부처의 일심, 무작삼신의 불과를 우리들 말법의 일체중생을
위해 황송하게도 도현해 주신 것이 어본존이다. 말법에 일심으로 구해야 할 부처는
어본존 외에 없다.
따라서 다음의 시아급중승, 구출영추산의 경문은 어의구전에 "어본존은 이 문을 나타
내셨느니라"(어서 757쪽)고 말씀하시듯 어본존의 출현에 대해 설하시고 있다.
법화경의 영추산 의식 자체가 석존 기심의 불계를 나타낸 생명의 의식이다. 부처의 우
주대의 생명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경문의 我란 석존 즉 불계이다. 또 及衆僧이란 보살이며 二乘이다. 俱란 십계의 모
든 중생을 가리킨다. 요컨데 영추산의 의식은 십계호구, 일념삼천의 妙를 체현한 부처
의 생명을 나타낸다.
대성인은 이영추산의 의식(허공회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기심의 불계, 무작삼신의 생
명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신 것이다.
따라서 대성인은 이 경문에 대해 "靈山一會 儼然未散(영산의 일회는 엄연히 흩어지지
않았음)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어서 757쪽) 이것은 영추산의 의식은 지금도 아직
엄숙히 거행되고 있으며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성인은 "묘법을 수행하는 장소는 어디까지나 寂光土의 都邑이 된다. 우리들 제자단
나인 사람은 한발짝도 걷지 않고도 天竺의 영추산을 볼수 있다. 본유의 적광토로 낮이든
밤이든 왕복할수 있다.(어서 1343쪽, 취의)고도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어본존을 향해서 창제하는 것은 바로 이 영산일회에 참례하는
엄숙한 의식이다.
창제를 열심히 하면 기심의 영추산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빛난다. 나의 생명 자체가 허
공회가 된다. 일상생활 그 자체가 전부 영추산에서의 행동으로 된다. 얼마나 훌륭한 일
인가.
SGI는 靈山一會 儼然未散의 모습
그리고 넓게 말하면 니치렌대성인의 문하로서 이체동심으로 공선유포를 향해 전진하는
창가학회의 모습 자체가 영산일회 엄연미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시중에 도다선생님은 옥중에서 법화경 허공회 의식에 지용의 보살로서 참례하고 있
는 체험을 하셨다.
이 옥중 오달은 영산일회 엄연미산을 몸으로 체험하신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자각하신 선생님의 지용의 사명이야말로 제2차대전 후 창가학회 발전의 원점으로 되었다.
일찍이 니치준상인은 도다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마음을 하나로 해서 전진을 맹세한 우리
들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영산일회 엄연미산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바
꾸어 말하면 진정한 영산정토, 부처의 일대모임이라고 나는 깊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SGI는 참으로 영산일회 엄연미산의 모습 그 자체의 숭고한 佛子의 모임이며, 우리들은
구원부터 三世의 동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