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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19-1 나, 지용보살이니라!

by 행복철학자 202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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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나, 지용보살이니라!

법화경(法華經) 본문(本門)은 부처의 멸후(滅後),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넓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때, 석존(釋尊)이 적화(迹化)의

보살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멸후에 홍교를

의탁하려고 불러낸 참된 제자가

바로 지용보살입니다.

 

SGI 회장은 《법화경의 지혜》에서 말법의

광선유포를 짊어질 지용보살의

출현에 관해 자유자재로 말합니다.

(법화경에서 지용보살의 등장을 둘러싸고)

참으로 드라마틱한 등장입니다. 대지가 갈라지고

무수한 보살이 동시에 출현합니다.

 

더욱이 한사람 한사람이 황금빛을 발합니다.

일체경(一切經)에 나오는 보살 중 지용보살만큼

현란한 보살도 없겠지요. 모든 불국토에서 모여든

적화, 타방(他方)의 보살조차 경탄합니다.

 

대성인은 적화, 타방의 보살과 지용보살을

견주어, 지용보살의 모습을 마치 ‘원숭이 무리 속에

제석천(帝釋天)이 출현한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경문에도 지용보살의

모습이 얼마나 존귀한지 씌어 있습니다.

보살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처입니다. 지용보살은

‘어디서’ 왔는가. 천태는 “법성(法性)의

연저(淵底), 현종(玄宗)의 극지(極地)”(

《법화문구》)에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 오저의 진리이자 근본의

일법(一法)인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連華經)를 말합니다.

지용보살은 묘법(妙法)을 근본으로 ‘영원히

행동하는 사람’이고 ‘영원히 전진하는 생명’입니다.

 

그 발랄한 에너지를 자기 생명에 솟아오르게 하는

일은, 개인으로 보면 ‘지용의 출현’입니다.

지금까지의 작은 자기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경애혁명입니다. 개인의 경애혁명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넓힘으로써

(이것이 바로 지용의 용출) 사회 전체의 경애를

바꾸는 투쟁입니다. 인류 전체의 경애를 높입니다.

 

이 변혁이 ‘대지를 부수고’에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차이를 뚫고 나가 인간이 간직한 근원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지용의 힘입니다.

 

‘맨몸’ 그대로의 범부, ‘인간 그 자체’인 용자가

지용의 긍지입니다. 이른바 지용의 출현은

‘생명의 저력은 이렇게도 위대하다!’는 장대한

울림입니다. 대지의 울림입니다.

차별은 절대 악(惡)입니다. ‘전도(顚倒)된 마음’은

자타(自他) 모든 사람의

생명에 상처를 입힙니다. 인종이나 민족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도,

그 뿌리는 허구(虛構)입니다. 사막에

떠오른 신기루와 같습니다.

 

인류 공통의 ‘생명의 고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타자와 차이를 더 두드러지게 하여

대립과 항쟁의 원흉이 되고 맙니다. 지금

추구해야 할 것은 ‘인간관의 변혁’입니다.

이것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인간이여, 국가나 민족이라는 멍에에

사로잡히지 마라. 또 자신을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라. 물질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유전자의 노예라고도

생각하지 마라. 자신은 본디 더없이 무한하고 커다란

가능성을 간직한 존재다.’ 하고 말입니다.

 

‘본디 인간은 우주와 하나인 위대한 존재다!

개인의 힘은 이렇게까지 위대하다!’

이것이 법화경의 메시지입니다.

(‘니치렌과 동의라면 지용보살’)

석존의 말을 듣고 마지못해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웃음). ‘자, 우리 차례다’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춤추며 나오는 보살이

지용보살입니다. ‘춤추며 나아가는’

자발적인 신심이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신심의 목적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금세(今世)는

꿈과 같습니다. 그 꿈에서 깨어나

이 일생에서 ‘영원한 행복’을 굳히기 위한

신심입니다. 그것을 일생성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세에 분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니치렌 대성인은

“니치렌과 동의(同意)란다면

지용의 보살이 아니겠느뇨.”(어서 1360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과 똑같은 마음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지용보살입니다.

광선유포는 ‘공전(公轉)’입니다. 인간혁명은

‘자전(自轉)’입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니치렌과 동의’라면 어떤 것도 두려울 리 없습니다.

 

마키구치(牧口) 선생님과 도다(戶田) 선생님은

전쟁 때 군부의 탄압에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대성인의 정신인

사자왕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원점인 도다 선생님의

오달이 ‘옥중’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법화경 때문에 투옥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나, 지용보살이니라!”

하고 활연히 깨달으셨습니다. 그야말로 대난의

한복판이었기에 인간혁명하신 것입니다.

난즉오달(難卽悟達)입니다.

 

참으로 “니치렌과 동의란다면 자용보살이

아니겠느뇨.”라는 금언을 몸으로 증명하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

난이 없으면 참된

‘니치렌과 동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옥중오달’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원점입니다.

법화경을 현대에 소생시킨 순간이자

‘인간혁명’이라는 태양이 현대에

떠오른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어둠은 깊고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새벽은

도다 선생님의 흉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 지용보살이니라!”

도다 선생님의 이 확신에서 광선유포의

장대한 흐름이 세차게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란 무엇인가’를 끝까지 추구해 ‘부처는

다름 아닌 자신이고, 우주의 위대한 생명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다.’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발밑을 파라, 그곳에 샘이 있다.’는 말이 유명한데

자신의 근원을 파 내려가니 거기에서

만인에게 공통된 생명의 기반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우주 생명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야말로 자신의 근원을

깨달음과 동시에 ‘실은 모든 사람이 본디

지용보살’이라는 인류 공통의 기반을

깨달으셨습니다.

그 ‘생명의 고향’을 안 분들이 학회원입니다.

 

선생님은 흉중의 그 깊은 확신을 어떻게든

학회원과 나누고자 고심하셨습니다.

어느 때는 “지용보살 여러분, 해내지 않겠는가.”

하고 외치신 적도 있습니다.

‘자기 본원의 생명에 끝까지 산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가. 얼마나 강한가.’

도다 선생님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또 자신의 일생으로 실증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힘’은 위대합니다. 진짜

지용보살이라면 힘이 나오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 확신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근원에 청정한 우주대의 생명이 펼쳐집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증명하는 일이 ‘인간혁명’입니다.

(세간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부처 ‘한 사람’이 ‘모든 민중’을 위해 정법(正法)

광선유포를 책임지는 것은 어떠한 국토라

할지라도 늘 ‘지용보살’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용보살’이란 내증(內證)의 경애가 ‘부처’와

똑 같으면서 어디까지나 ‘보살’로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살불(菩薩佛)입니다.

 

경애가 ‘부처’와 사제불이가 아니면 정법을

올바르게 홍통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현실의 탁세(濁世)에서는 세간(世間)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가지 않으면 광선유포를 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조건을 다 갖춘 것이 ‘지용보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신력품 마지막에 “

이 사람이 세간에서 행하여”(법화경 575쪽) 하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세간에서’입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지용보살은 ‘태양’입니다. 또 “여연화재수

(如蓮華在水, 연꽃이 물에 있는 것과 같나이다)

 

”(법화경 471쪽)와 같이 세간에 있으면서 세간의

악에 물들지 않는 ‘연화’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태양’이 되면 인생에 어둠은 없습니다.

자신의 하루하루는 물론 다른 사람까지도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연화’가 되면

‘번뇌’의 수렁도 곧바로 행복의 ‘보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종지용출품에 ‘여연화재수’라고 있습니다.

우리 지용보살은 세간의 수렁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결코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절대로 세간에 물들어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지용보살에 관해 “오직 유일대사

(唯一大事)의 남묘호렌게쿄를 홍통하는

것을 본(本)으로 했느니라.”(어서 83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선유포입니다. 절복정신입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신심이 지용보살의 혼(魂)입니다.

 

지용보살은 아주 먼 옛날부터 한결같이

묘법을 수행했습니다. 묘법근본, 신심근본의 자세로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대성인은 지용보살에 관해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을 단념하셨으리라.”

(어서 1186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바세계에서 대난도 이겨내고

홍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불계에

주(住)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화의 보살이나 타방의 보살은 어디까지나

‘성불을 목표로 하는 보살’입니다.

그렇기에 사바세계에서 홍교하는 힘든

수행을 견딜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묘법을 배우고 숙달한 본화지용보살

(本化地涌菩薩)이기 때문에

그 임무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먼지도 쌓이면 산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먼지가 쌓여 생긴 산은 없다.

기껏해야 흙무더기 정도다. 실제로 산은 큰

지각 변동이 있어야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소선(小善)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대선(大善)이

되지 않는다.”(《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전집》

제10권, 취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선을 계속 쌓아서 성불하려는 것이

‘적화의 보살’이 취하는 삶이라면, 법성(法性)의

연저(淵底), 생명의 오저에서 마치 화산폭발과

같은 기세로 불계의 대생명력을

분출하는 것이 ‘본화의 보살’입니다.

 

지용보살은 늘 묘법을 수행하고, 순간순간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는 보살입니다.

수행하는 모습은 보살일지라도 내면의

경애는 부처입니다.

그러나 부처라고 하면 아무래도 초월적인

존재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지용보살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수행하는

인간’으로서의 보살입니다. 인간입니다.

여기에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을 위한 신앙을

복권(復權)하는 일이 바로 21세기의

종교’를 위한 열쇠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세계는 위대한 ‘인간의 종교.’

‘생명의 종교’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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