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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가 중(空假中)의 삼제(三諦)
세 가지 각도에서 참된 모습을 관찰
예리하고 유연한 올바른 견해를 명시
사물의 참된 모습, 전체의 모습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근시안적(近視眼的)이다"든지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고 말하는 적이 있습니다.
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등의 속담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불법에서는 어떠한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특히 '삼제론(三諦論)'을 들어
해설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삼제'의 '삼(三)'은 공(空), 가(假), 중(中)의 세 가지의
입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諦)'는 자세하다, 분명하다, 분명히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삼제론'이란 공 가 중이라는 세 가지 입장에서
예리하고도 유연하게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파악해 가려는, 불법의 사물을 보는 견해, 진리관을 밝힌 것입니다.
자칫하면 사람은 자기의 비뚤어진 선입관이나 좁은 경험, 지식 등을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점이 있는
동시에 좋은 점도 있는데, 결점만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든가,
외면의 모습이나 형태에만 사로잡혀 내용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는
사례가 흔히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나 얕은 견해
등에 공통되고 있는 것은
자기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상대(相對) 대경(對境)을
보는 것이므로 이쪽의 입장으로서만 보고 있으면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상대이며 대경인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쪽의
입장은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악해 간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불법은 사물을 인식하는데 '여실지견(如實知見:
사실과 여〈如〉히 지견한다)'이라고 하듯이, 그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로 지견하려는 태도를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에서 필연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
이 '삼제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 입장에서의 견해란 어떠한 것일까. 이 세 가지
입장에서의 견해가 바로 공제(空諦), 가제(假諦), 중제(中諦)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다음에 가 공 중의 순서로 각각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가제입니다만, '가(假)'란 '임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가제란
일체의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要素)가 여러 가지
인(因:원인)과 연(緣:조건)에 의해 임시로 화합하여 형성(形成)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사물의 표면에 나타난 모습, 다시 말하면 현상(現象)의 면에
눈을 돌렸을 때의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체의 현상은
여러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로 화합(和合)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꾸로 말하면 일체 모든 것은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그 형태도 무너져 없어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생긴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고 하는 냉엄한 법칙으로 되겠지요.
즉 가제란 일체의 현상은 덧없는 것(무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상관(無常觀)에서 사물을 보아가는 입장으로
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현상계를 꿰뚫고 있는 냉엄한
무상(無常)의 법칙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응시해 가는 태도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공제입니다만, 앞의 가제가 사물의 형태적인 측면에 눈을
돌리는 데 비해, 이 공제는 사물의 성질의 면을 포착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제에서 분명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임시로 화합한' 것이므로
그 형상을 보는 한에서는 불변(不變)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임시로 형성되고 있는 것은 형태는 있어도 몸체는
없는 것으로 되어, 그 '사물'은 '공이다'는 견해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사물의 성질을 명백히 한 것이 바로
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중제입니다.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앞의 가제에서 명백히 되고 있는
'화합하고 있는 형태가 있는 것'과 또한 공제에서 명백히 되고 있는
'본체가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의 두 가지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임시의 현상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공의 성질을 나타내고 실재(實在)하는 불변한 것
그것을 구명해 가는 것이 중제의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이케다 SGI회장은 '생명적인 나(生命的我)'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적인 나'를 밝히는 중제
A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10세 때의 A와 50세 때의 A는
표면적으로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이 변화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한 사람의 A라는 인간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A라는 실재(實在)를 근원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불변(不變)의 것 그것이 '생명적인 나'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명백하게 해 가는 입장이 중제입니다.
이상 대강으로 삼제론을 설명했습니다만, 원래 이 삼제는 결코
따로따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실재를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바르게 있는
그대로 포착하기 위한 세 가지 견해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의 사물은 '가'이며 즉 '공'이며
즉 '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융삼제(圓融三諦)'이라고도 합니다.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실상(實像)은 비뚫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실재의 전체상(全體像)을 이 원융삼제의
관점에서 여실(如實)하게 지견(知見)하고
완벽하게 파악해 가는 데 이 삼제론의 참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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