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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弘敎)는 영예로운 제자의 실천
부촉(付囑)의 부(付)란, 무엇을 준다는 것이고, 촉(囑)은 무엇을
의탁(依託)한다는 것이다.
스승인 부처(佛)가 제자에게 법(法)을 전수(傳授)해서 영법구주
<令法久住 = 불법(佛法)을 만년(萬年)까지도 넓히는 것>를
의탁(依託)하는 것을 말한다.<여래신력품(如來信力品)>에서
부처는 지용(地涌)의 보살에 대해 부촉하시고, 이번에는
늘어서 있는 일체의 보살에게 부촉을 한다.
이것이 <촉루품(囑累品)>이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이렇게 설해져 있다.
나(我)는 무량 백천만억 아승기겁(阿僧祇劫)에서, 이(是) 얻기(得)
어려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법(法)을 수습(修習)했노라.
이제(今) 너희들(汝等)에게 부촉하노라. (법화경 585쪽)
무량 백천만억 아승기겁이라고 하는, 아찔해질 듯한 길고도
긴 수행에 의해서 얻게 된 보물을,
모두 제자에게 준다고 하는 것이니까,
이보다 좋은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세간의 일반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간단하게 양도해 준다는 것은 아
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보다 놀라운 것은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고 하는 기나긴
세월에 걸친 수행(修行)끝에 얻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렇게 얻기 어려운 법을 그리 간단하게
가르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로부터 제자에게의 부촉은 다르다.
아무 것도 아끼는 것 없이 일체를 제자에 맡기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스승인 부처는 제자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 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제자 이 얼마나 숭고한 인간의 끈인가.
본존님 이외의 비전 따위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얻기 어려운 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문저의 입장에서 볼 때,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도현하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본존님과 다른 것이 아니다.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을 모르는
자에게는 부처가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오자내(五字內)에 이 주(珠)를 싸서 말대(末代)
유치(幼稚)한 자(者)의 목에 걸게 하심이라
(어서 254쪽)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가 주시려고 하는 묘법(妙法)의 존극함을 모르고 있는,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비방(誹謗)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말법의 유치한
중생에 대해서도 일체를 수여(授與)해 주시는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시고, 부처의 마음인 것이다.
석존(釋尊)은 초기의 경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외(內外)의 구별 없이 남김없이 법을 설했다. 완벽한
사람의 가르침에는 무엇인가를 제자에게 숨기는 것 같은
교사(敎師)의 빈주먹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카무라 저
《원시불교》 NHK북스)라고.
부처는 아무 것도 감추는 것 없이 깨달은 일체의 것을
제자에게 개시(開示)하신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대성인이 본존님 이외에 남긴 부촉도
비전도, 그런 것들은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닛켄(日顯)은 법주(法主)라는 권위를 내세워,
신도와 본존님의 사이에 끼어 들어, 신도와는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자체가 완전히 석존이나 대성인의 마음에
위배되는 폭거인 것이다. 법을 가르치고 사람을 구한다
자, 그러면 그 얻기 어려운 법을 부처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소중하게 관리한다던가, 보관하는 따위의 일은 물론 아니다.
앞에서 본 법화경의 바로 뒤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나온다.
석존은 그대들(汝等), 응당(應當), 일심(一心)으로 이(此) 법(法)을
유포(流布)해서, 널리 증익(增益)케 할 지니라 (법화경 585쪽)라고.
제자에게 부촉한 후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이 묘법을 홍교해 가십시요라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즉, 부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가 뭔가 특별한 것을 준다 제자가
그것을 받는다라고 하는 일차원(一次元)의 것은 아니고, 제자가
부처의 멸후에 넓혀간다고 하는 연속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인 우리들이 이타행(利他行)이라고 하는 실천 즉, 절복(折伏)
홍교에 과감히 도전해 간다는 것에서부터, 우리들의 흉중에, 얻기
어려운 법(法)을 맡기신 부촉의 의의(意義)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법화경의 지혜》 속에서, 부
촉이 없으면 불법은 스승의 일대(一代)만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래가지고는 아무리 위대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법을 가르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라고 지도하시고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맡기셨다. 이번에는 그 스승의 마음을 따르는데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실천한다. 이렇게 하는 길 밖에는
불법의 성취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부처로 한다 한 사람을 소중히 한다라고 하는 행동
단순한 것 같지만 이곳에야말로 법화경의 부촉의 본의(本義)가
있는 것이다. 자식의 성장을 비는 강한 일념 오른쪽 손(右手)으로써,
무량(無量)의 보살 마하살의 정(頂)을 쓰다듬어서(법화경 585쪽)
<촉루품(囑累品)>의 의식(儀式)의 첫머리, 석존은 제자들의 머리를
세 차례 쓰다듬고 부촉하는 일이 설(說)해져 있다.
이 일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의 표현인 것이고, 자애 넘친 모습인 것이다.
부촉이라고 하는 것에 한해서 말한다면, 앞의 〈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에서, 말법에서의 홍교를 지용의
보살에게 맡겼던 일로 끝냈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존은 촉루품에서 새로이 지용의
보살도 포함해서, 허공회(虛空會)의 의식(儀式)에 연이어,
서있는 보살들 전원에게 총부촉의 의식을 행했다.
여기에는, 광선유포(廣宣流布)에 관계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니,누구나 다 광포(廣布)에 필요한
인재(人材)인 것이다라고 하는 인간 석존의 따뜻한
마음이 맥박치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의 부촉에 있어서의 석존의 마음이야말로,
신심(信心)의 계승의 열쇠일 것이다.
모두가 다 광포의 소중한 인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을 어디까지나 소중히 하는 마음인 것이며,
친구에 대해서도, 조직에 있어서도, 특별히 가장 몸
가까이에 있는 후계의 사람인 내 자식에 대해서도
공통되는 시점(視點)인 것이다.
내 자식에게 신심을 계승시켜주고 싶다. 내 자식이
창가(創價)의 왕도(王道)를 끝까지 걸어가 주면 좋겠다
이렇게 원하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의 사춘기 이후가
특히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자립의 시기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성장해 가는 이 시기.
창가(創價) 후계의 사명을 자기가 자각해서 일어
날 수 있도록, 부모가 특히
강하고 강한 일념(一念)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해야 하겠다.
인생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제일 근간(根幹)이 되는
그 같은 소원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 설사 어느 때, 신심으로부터 떠나버린 것 같이
보여지는 일이 있더라도, 창가 후계의 사명에 이어지는
자기라는 것을 반드시 자각하고 일어서는 때가 온다고
믿고서 기원을 보내며 만나 갔으면 한다.
중도에서 체념해 버린다는 것은 부촉의 의식을 한
석존의 마음, 부처의 마음에 배반하는 일이며 누구에게나
차별하지 않고 자비의 빛을 내려 쏟는다는 것이
부촉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케다 SGI회장은 《법화경의 지혜》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너무 잔소리하지 않고서
학회(學會)를 존경하고, 좋아하게 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신심은 평생의 일이니까, 해가면서 알아가면 됩니다.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좋아서 못견디겠다고 하는 자신으로
성장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으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훌륭하게 되어 갑니다라고. 아무튼, 부촉의 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師弟)의 길, 제자(弟子)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 밑에서 우선 제자이며 부모인 우리들이,
부촉의 의의를 되새기면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어서 1143쪽)라는 성훈대로
철저한 창제를 근본으로 사제의 길,
광포의 길로 매진해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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