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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에서 배운다

by 행복철학자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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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에서 배운다  

 

<실천교학>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에서 배운다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법화경의 지혜》에서 절복 홍교에 대해서 특별한

힘 등은 없어도 된다. 묘법을 부르는 환희, 묘법을 말하는 환희에 타오르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 환희의 신심에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는 포함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대화의 가을  전국에서는 주야로 뜨거운 불법대화가 전개되어 헤아릴 수 없는

소생의 드라마가 일어나고 있다. 대화만이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여 서로를 촉발하고

드높여 가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우리들의 용기 있는 대화의 규범을 의좌실의 삼궤를 통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법화경에 나타난 멸후의 홍교자세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는 약왕보살을 대표로 하는 팔만의 보살에게 석존멸후의

홍교의 자세를 가리킨 것이다. 법화경 법사품 제10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약왕이여, 만약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여래의 멸후에 사중(四衆)을 위해

이 법화경을 설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마땅히 설해야 하느뇨. 이 선남자,

선여인은 여래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의 옷(衣)을 입고 여래의 자리(座)에 앉아서,

그리하여 지금 사중(四衆)을 위해 널리 이 경을 설할 지어다.(법화경 394쪽)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법화경을 설하려면 의좌실의 삼궤에 따라 널

리 설해 나가라는 것이다.

그 삼궤란 여래의 방(室) 여래의 옷(衣) 여래의 자리(座)라는 세 가지로서

부처가 법화경을 설하는 마음과 여러 가지 난(難)에 지지 않고 한결같이

법을 넓혀 가는 방도(方途)를 나타내고 있다.

즉 멸후에 법화경을 설하고자 하는 자(者)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모든 사람에게 널리 법을 설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래의 방(室), 함께 성장하는 우정의 연대

의좌실의 삼궤에 대한 각각의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우선 여래의 방이란

일체중생 속에 있는 대자비심은 이것이니라(법화경 394쪽)라고 설해 있다.

이것은 자비의 생명공간으로 벗을 이끌어 감싸주면서 인생이나 사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벗을 방으로 이끌어들이는 것을 방(室)에 비유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法華文句)>에서 자비는 모든 것을 감싸고,

혜택을 주므로 방이라 한다고 했다.

상대를 생각하는 진지한 일념을 근본으로 한 불법대화의 장은 어떠한 장소일지라도

여래의 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이라면 어느 한 사람도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현상(現狀)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잘 살고 싶다고 원하고 있다.

그러한 벗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같은

시선(視線)으로 벗의 괴로움과 고통을 동고(同苦)하여 그 고(苦)를 제거해 준다.

공감과 상대에 대한 존경의 일념을 근본으로 한 대화이다.

용기를 불러 일으켜 자비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하여 함께 자유자재로운

인생을 열어 가자! 고난에 지지 않는 강철과 같은 자기를 확립하자!라고

부르짖으며 손에 손을 잡고 행동하고 전진하는 우정의 연대인 것이다.

? 여래의 옷(衣), 정열을 가슴에 안고
유유(悠悠)한 경애로

두 번째는 여래의 옷(衣)이다. 법화경에는 여래의 옷(衣)이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이니라(법화경 394쪽)고 설해져 있다. 유화인욕이란 세간의 비판이나

중상을 참고 받아들이면서 결코 그것들에 굴복하는 일없이 역경(逆境)을 뚫고

나가는 마음이며 행동이다.

악(惡)을 차단하고 자신의 추한 번뇌가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을

옷(衣)에 비유한 것이다. 멸후 말법에 법화경을 홍교하면 석존 재세 이상의

박해가 일어나는 것은 법화경 권지품에 상세하게 설해져 있는 그대로이다.

우인(友人)과의 불법대화 속에서도 감정적인 비판이나 편견, 억측에서 오는

중상에 직면하는 일도 있다. 많은 무지(無知)한 사람한테서 악구매리를 당하고

또는 도장(刀杖: 칼과 막대기)을 가하는 자 있더라도 우리들 모두 마땅히

참아야 하느니라(법화경 441쪽)고 설해져 있는 속중증상만(俗僧增上慢)일 뿐이다.

이 참아야 한다는 자세만이 유화인욕의 마음이 아닐까. 어떠한 일에도,

미동조차도 하지 않는 유유한 경애로 홍교에 진력한다. 끓어오르는 정열을

가슴에 안고 견디어 이겨낸다. 이것이야말로 유화인욕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여래의 자리(座)이다. 법화경에는 여래의 자리란 일체법공은

이것이니라(법화경 394쪽)고 설해져 있다.

 여래의 자리(座), 불석신명에
자유자재의 지혜가

일체법공이란 모든 사물에 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이 지혜에 의거한다면 집착이나 번뇌로 내 몸을 태울 것도 없고, 자타 함께

편안하게 하기 때문에 자리(座)라고 한다. 우리들의 실천으로는 벗의 관심이나

괴로움에 따라 자유롭게 법을 설하여 넓혀 가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불법대화는 결코 기교가 아니다. 잔재주의 농간만으로는 벗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는 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오로지 상대방을 생각하는 일념만이

무궁무진한 지혜의 원동력이다.

니치렌(日蓮)대성인은 좌(座)란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修行)이므로

공좌(空座)에 거(居)함 이니라(어서 737쪽)고 말씀하셨다. 내 몸을 아끼지 않고

벗을 위해서 필사적인 행동을 관철하는 것이 일체법공의 자리에 있는 것이 된다.

안일이나 에고이즘에 사로잡히는 일없이 자신의 비애(悲哀)를 제패(制覇)하고

싸워 나가는 것만이 공좌(空座)에 거(居)한다는 것에 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자행화타(自行化他)임을 명기하고

법화경에는 삼궤를 각각 설한 다음 이 속에 안주(安住)한 연후에

불해태(不懈怠:게으르지 않는)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보살과 사중(四衆)을

위해서 널리 이 법화경을 설해야 하느니라(법화경 394쪽)고 설해져 있다.

해태(懈怠)의 마음을 버리고 항상 정진하여 의좌실의 삼궤대로 법을 설하여

넓혀 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대성인은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 삼궤(三軌)를 일념(一念)에 성취(成就)하느니라(어서 737쪽)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남묘호렌게쿄는 자행화타에 걸치기 때문에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고 실천에

힘쓰는 사람의 강인한 일념에 의좌실의 삼궤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회를 위해 진력하는 행동 속에 삼궤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천년의 본무대가 우리들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일전에 도쿄에 주신 메시지에서 이케다 SGI회장은 용감하고 인내강한

대투쟁 속에서 강철같이 자기 자신을 훈련한 청년만이, 난세(亂世)를

승리해 갈 수 있다 다이아몬드의 신심의 실력 그리고 광선유포의 실력을

연마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끝까지 말한다. 불법대화의 실천을 관철하여

 신심과 안심의 토양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에 확고한 생명철학의

쐐기를 박아 가고 싶다.

그리고 저 벗 이 벗에게도 함께 행복의 대도를 걸어가는 방도(方途)를 알려주고

황금의 청춘기에 광선유포를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 즐거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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