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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창가의 대도에 무상의 인생이

by 행복철학자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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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대도에 무상의 인생이  

 
<실천교학> 창가의 대도에 무상의 인생이

   - 광포야말로 명근(命根)보다도 아끼는 것이라고

목숨걸고 어떤 일에 덤벼든다 목숨걸고 이루어 낸다 사람이 어떤 일에

진지하게 덤벼들 때 흔히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귀중한 목숨을 깎아 가며 어떤 일에 덤벼드는 것이니까 그 대상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것의 가치기준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서 하나하나의 인생의 가치에는

큰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불법의 근본은 현명한 삶의 방법에 추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계속 정치가로

머무는데 목숨을 걸었다고 하자. 이러한 사람에 있어서는 정치가라는 입장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 안 되는 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오직

재산을 쌓는 일에만 혈안이 돼있다. 재산을 무상의 것으로 하여

목숨보다도 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세간에서의 명리명문은 결코 무상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유상의 가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지위로부터 전락한다던가, 재산을 날려

버리던가 하면 행복감이나 충실감을 잃고 실의 속에서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인간은 종종 이러한 상대적 세간적인 가치에

자기를 잃어 버릴 만큼 묶여 버린다. 이런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까. - 이것이야말로 일체의 사상, 철학,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존이 설하고자 한 것도, 인간으로서

이 이상은 없다고 하는 무상의 삶의 방법의 추구였으며, 그것을 제시한 것이 불교다.

목숨을 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지는 않지만 실은 우리는 매일 매일을

목숨을 건다시피 무슨 일이건 해가고 있다.

잠을 자고 있어도 식사를 하고 있을 때도 시간은 쉬지 않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보다

충실된, 보다 행복을 실감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현명한

인생의 제1보라고 할 것이다. 멸후의 묘법유포를 맹서한 무수한 보살

어떤 것에 목숨을 걸고 삶을 살 것인가 - 법화경 권지품 제13에는 아불애신명,

단석무상도(법화경 443쪽)라는 일절이 있다. 이것은 무수한 보살이 석존의 권에

응해서 대답한 말이다.

석존은, 견보탑품 제11에서 내가 죽은 후, 이 사바세계에서 누가 법화경을

설할 자는 없느냐 내가 죽은 후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계속 수지해 나간다면 모든 부처가 찬탄할 것이다라고

회좌에 모인 보살에게 말했다.

그런 석존의 권고에 응해서, 권지품에 80만억 나유타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보살이, 삼류의 강적에 의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인욕의 갑옷을 입고

제난을 참고 견디어 석존 멸후 말법시대에서 법화경을 홍통시킬 것을 서약한 것이다.

다시 더 나아가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여러 곳에서 온 시방의 부처에게

그 같은 서약의 말을 했습니다. 부처는 저희들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우리들은 부처께 말씀드린 서원의 인생을 관철합니다. 서원의 행동을 관철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맹서했던 것이다.

아불애신명 단석무상도란 어디까지나 묘법을 근본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나의 것으로 해서 결단코 묘법유포를 해 나가겠다는 서원의 말인 것이다.

일신의 안온보다도 자타 함께 행복경애로

니치렌대성인은, 이 일절에 대해서 어의구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상도란 남묘호렌게쿄 이것이니라.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를

아끼는 일은 명근보다도 더 아끼는 것이니라(어서 749쪽) 남묘호렌게쿄야말로

무상도이고, 광선유포의 인생이야말로 또한 무상도이다.

나의 인생의 가치와 행동원리를 남묘호렌게쿄로 정하고 자행화타에 걸쳐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며 광선유포를 명근보다도 아끼는 것으로 정하고

서원의 행동을 관철한다 - 이것이야말로 무상의 삶이라 하겠다.

앞서의 권지품에서 보살의 서원과 같이 위대한 법을 신수하고 그 법을 근본으로

어디까지나 스승과의 맹서를 이루어내는 사제불이의 실천을 관철한다.

나 홀로의 행복이나 안온의 추구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하고 자타 함께 하는 행복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무상도의

일생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일은 초창기 여러 선배들이 몸으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생의

고뇌에 지배되어 있던 인생이, 타인을 위해 진력하고, 그의 성장을 나의 기쁨으로 한다.

그 결과 어느새 나의 생활은 아무런 부자유 없는 생활로 변해, 행복을 만끽하는

인생의 봄을 구가하고 있다고. 이러한 여러 선배의 체험을 들을 때마다 창가학회는

지도대로 전진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라는 투철한 신심과 행동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데서 언제나 감동을 금치 못한다.

바로 대성인의 어유명인 광선유포에 몸바쳐 가정방문이나 개인지도로, 동지를

받쳐주고, 격려한다. 또 정의의 마음으로 불법대화를 전개해서 친구들에게

희망을 끊임없이 보낸다. 대성인의 행동에게서 배운 이와 같은 삶의 방법을

실천했기에 만족의 인생이 구축된 것이다.

행복즉성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흉중에

그러면 왜 광선유포로의 행동에 관철된 인생이 무상도이고, 무상의 행복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성인의 불법은 어딘가라든가 무엇이 있고 없고로 행복의

기준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행복 즉 성불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흉중에 있다.

불법은 엄한 인과이법이기 때문에 외적인 무엇에 의해, 흉중의 행복경애가

좌우되지는 않는다.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

(어서 1598쪽)라고 말씀하시는 대로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어디까지나 어느 때라도 묘법을 근본으로, 이것을 유일무이라고 믿고

광선유포를 위해 행동하는 생명의 약동이 있어서 비로소 무상의 인생이 열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광선유포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타 함께 하는 행복을 구축하는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본존이라고 하는 명경을 향해 근행창제로 게으름 없이 자신을 닦고,

그 환희와 생명력으로 지역 사회를 화락의 낙토로 변화시켜 간다는 것이다.

그 행동에 일관된 인생, 바로 창가학회 삶의 방식을 근본으로 그 지도대로

사제불이의 행동을 관철해 가는 속에, 무상도의 인생이 열려져 상상조차

못했던 경애가 구축돼 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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