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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묘법 오자(五字)에 일체의 공덕이

by 행복철학자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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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 오자(五字)에 일체의 공덕이  

 

용기와 희망의 원천-창제의 공력(功力)
   - 묘법 오자(五字)에 일체의 공덕이

<법화경 제목초(法華經題目抄)>에는 법화경의 제목은 팔만성교(聖敎)의 간심(肝心,

일체제불의 안목(眼目) (어서 940쪽)이라고 있다.

그리고 일체 제불의 안목인 묘법의 공덕의 혜택을 받으려면 순수한 신(信)이

있으면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러면 우리들이 봉창하는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법

 

남묘호렌게쿄를 설명하려고 해도, 도대체 묘법이 불법의 깊은 진리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인 것이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간단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도단이란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대지도론(大智度論)》이나, 중국의 천태대사의

《마하지관(摩訶止觀)》 등에 있는 말로, 궁극의 진리는 언어(言語)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불가사의란, 묘(妙)는 불가사의를 이름짓는다(법화사기연기 法華私記緣起)라고

있는 것처럼, 묘호렌게쿄의 묘(妙)자를 해석하려고 해도, 언어나 사려(思慮)로

계량할 수가 없는 미묘한 법문인 것을 내보이고 있다.

사의(思議)하고, 적확(的確)히 표현하기가 곤란하지만 구태여 표현하면,

남묘호렌게쿄란 표제(表題)이고 타이틀이라고 하겠다. 어떤 표제이며 타이틀인가.

그것은 부처라고 하는 생명의 이름이다. 아니 단순한 이름은 아니다.

불계(佛界)의 생명 그것인 것이다.

그러면 부처란 무엇인가.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하나하나의

내면(內面)에 내재(內在)해 있는 것으로, 모든 존재를 행복과 조화

그리고 전진(前進)으로 향하게 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는 것이 법(달마)이다. 즉 모든 존재를 행복 조화 전진으로

향하게 하는 에너지의 법칙성(法則性)이라는 것이다. 그의 특징이 묘(妙)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묘법(妙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특질인 인과의 이법(理法)이 연화(蓮華)라고 표시되고, 그것들이

가르침으로 설해져 있기 때문에 경(經 스토라)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봉창하는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목은 팔만법장(八万法藏)을 초과(超過)하는 요(要)중의 요(要)

이 제목을 여러 각도로부터 해설한 것이 법화경 28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적(端的)으로 일곱글자로 표현한 것이 나무묘호렌게쿄이다.

묘법(妙法)이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이법(理法)과, 일체화(一體化)하기 위해

나무(南無)=귀명(歸命)하는 것이 창제(唱題)이다.

우리들 범부는 묘호렌게쿄라고 하는 이(理)에 나무(南無)하는 것으로 흉중에

비장(秘藏)돼 있는 불계(佛界)의 생명을 현현(顯現)할 수가 있다.

그 덕(德)에 대해서 대성인께서는 제목만을 부르는 복을 헤아릴 수 없다

(어서 942쪽)고 하셨다.

왜냐하면 제목은 법화경 28품뿐 아니라, 일체경(一切經)의 공덕이 가득

채워넣어져 있는 요(要)중의 요(要)이기 때문이다. 일부(一部) 팔권(八券)

28품(二十品)을 수지(受持) 독송(讀誦)하고, 수희(隨喜) 호지(護持) 등 함은

광(廣)이니라. 방편품, 수량품 등을 수지하고 내지 호지(護持)함은 약(略)이니라.

다만 일사구게(一四句偈)내지 제목만을 부르고 부르는 자를 호지함은 요(要)이니라

. 광(廣) 약(略) 요(要) 중에는 제목은 요(要)의 내(內)이니라.(어서 942쪽)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에는 일체 중생의 공덕이 수장(收藏)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經)의 일자(一字)는 일대(一代)중에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묘법연화(妙法蓮華)의 사자(四字)도 또한 팔만법장을 초과(超過)하느니라

(어서 943쪽)인 것이다. 학회의 회합에서는 여기저기서 큰병(病)이나

난치병(難治病)을 극복한 체험을 듣는다.

그 제각기의 의약(醫藥)의 적절한 처치가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만인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흉중에 숨겨져 있는 불계(佛界)의 생명력이

 개현(開顯)되어, 병을 극복했다는 드라마가 이야기되어 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흉중에 이 부처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기에, 또 어본존께

인연(因緣)되고, 묘법에 나무(南無)하는 데서 불계의 생명이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창제(唱題)에 면려(勉勵)할 때,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극복해 가는

힘찬 불계(佛界)의 생명이 열려서, 인생을 소생(蘇生)시켜 갈 수 있는 것이다.

발랄한 모습에 신앙의 반짝임이 문제해결 경애혁명의 열쇠는 내 흉중에

그러나 아무리 창제를 거듭해도 내 생명을 보아내지 않으면 본원적(本源的)인

해결은 없다. 애매한 일념(一念)은 공전(空轉)으로 될 수 있다.

대성인께서는 단(但)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수지한다 해도 만약 기심(己心)의

밖에 법(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니라

(어서 383쪽)고 훈계하시고 계신다.

또 마음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웃의 재산을 계산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어본존께 기원드리는 것을 이루어 내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自身)이다. 해결의 근원의 힘은 자신 속에 있다.

불행이나 곤란의 원인을 타자(他者)나 환경의 탓으로 하는 것은 수학불교(雖學佛敎)

환동외견(還同外見)-불교를 배우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리(正理)를 얻을 수가 없고

불교의 본의(本意)를 일탈(逸脫)하고 외도(外道)의 식견(識見)과 같은 차원에

빠져버리는 것과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불법이 해가는 방식이 아니며, 기원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법은 어디까지나 법(法)을 근본으로 하고, 결코 상상상(想像上)의 신(神)에

의존하는 사상(思想)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의 생명에 모든 원인이 있다고 확신하고,

자신의 안에서 문제해결의 열쇠를 발견함으로써 경애(敬愛)를 열 수도 있는 것이다.

묘(妙)란 원만의 뜻(義)을 확신하고

우리들은 창제로 자신의 숙업을 타개할 수 있다. 여기에 창제의 제호미(醍 味)가

있는 것이다. 묘(妙)란 천축(天竺)에서는 살(薩)이라 하고, 한토(漢土)에서는

묘라고 하며, 묘란 구(具)의 의(義)이고, 구(具)란 원만(圓滿)의 의(義)이니라

(어서 944쪽)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자신(自身)의 생명에 불계(佛界)가 함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고(苦)의 인(因)도

낙(樂)의 인(因)도, 모든 것은 자신(自身)의 생명에 달렸다고 자각하는 데서

상상(想像)조차 하지 못한 힘과 작용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내 생명의

탁함도 정화(淨化)되어 간다.

우리들의 생명은 대해(大海)로 모든 하천(河川)이 흘러드는 것처럼, 또 대지(大地)가

일체의 유정(有情) 비정(非情)을 갖는 것처럼, 일체의 구계(九界)작용과

불계의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니치렌대성인께서는 남묘호렌게쿄는 환희(歡喜)중의 대환희이니라

(어서 788쪽)고 말씀하신다. 또 본래의 부처라고 아는 것을 즉 대환희라고

이름한다(어서 788쪽)이라고 보여주시고 있다.

어떠한 난국(難局)에 있건 창제근본(唱題根本)으로 발랄하게 전진하는

사람은 결코 지지 않는다. 불계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 언제나 창제에 면려하고 환희에 불타며 사는데에

엄연한 묘법(妙法)의 실증(實證)이 반짝이는 것이다.

어떠한 국면(局面)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사는 힘(力),

이것이야말로 창제(唱題)의 공력(功力)이라고 확신하며 전진해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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