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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한 번의 창제에 광대한 공덕

by 행복철학자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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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창제에 광대한 공덕



신심은 일생이다. 그리고 삼세이다. 광선유포도 기나긴 여로이다.


그 「행복에의 여행」을, 어떻게 완주하는가. 보배의 일생을 매일 매일

 

어떻게 가치적으로 상쾌하게 살아가는가. 거기에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누구라도 「피곤이 쌓일」때가 있다. 「컨디션이 나쁠」때도 있다.

 

 살아있는 몸이라면 당연하다.그러할 때,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창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 오늘은 여러분의 평소의 의문에 답하는 의미에서도

 

日蓮대성인의 말씀을 배견하면서 말해 두고자 한다. 어서근본의 이러한

 

「구체적인 지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총명한 판단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성인은 「경우에 따라 창제만이라도 좋고,

 

어보전(御寶前)이 아니라도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문하인 다이가쿠 사부로의 부인이 「월수(月水=월경)」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질문한 것에 대한 답서이다. 예로부터 일본에는

 

「월수」를 부정하다고 하는 관념이 뿌리깊었다. 질문한 부인도 이러한 때

 

에는 경전을 독송해도 좋은지 어떤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에 답하신 대성인은 「월수」는 전혀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며,

 

중요한 생리적 작용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당시로서는 극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셨다.

 

그리고 컨디션이 나쁜 「장병(長病)과 같은 것」(어서 1202쪽) 이라고 하시어,

 

이러한 경우의 실천방법을 교시하신 것이다.

현대에서는 「부정(不淨)」등은 전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어서에서의

 

대성인의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몸이 본래의 컨디션이 아닐 때에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과제에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고 배견 된다.

즉 근행도 여러 조건을 고려해서, 유연하게 실천해 가야 한다 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경전근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법의 경전인

 

「어서」를 근본으로 해서 나아간다. 


어서에 5좌 3좌의 규정은 없다.


5좌 3좌에 대해서도 어서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후세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게다가 본래는 승려의 수행이었다. 지금은 승려쪽이 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을 다망한 재가(在家)가 하고 있는 것이므로 대단한 일이다. 


가치적으로, 무리하는 것과 강한 신심은 다르다


특히 부인부들은 너무 성실한 나머지 밤늦게 피곤할 때나 몸의 컨디션이 나쁠 때라도

 

완벽하게 5좌 3좌를 하려고 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 신심은 너무나도 존귀하다.

 

 반드시 어본존께 통해 갈 것이다.



그러나 특히 연로한 부인들은 무리를 하면 크게 건강을 해쳐 버리는 경우가 있다.

 

컨디션에 따라 근행창제만, 혹은 제목만으로 쉬는 편이 가치적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자기자신이 판단하는 것이다.


평생의 신심이다. 가령  근행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본존을 믿고, 구도해 가는 「신심」이 있다면 복운은 소멸되지 않는다.

 

「무리」와「강신(强信)」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발랄하게 희망에 넘쳐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빨리 쉬어 피곤을 없애고 상쾌한 기분으로 근행을 하는

 

편이 좋은 경우도 있다.

근행. 창제는 범부의 생활 속에서 가장 장엄한 어본불과의 대면이다. 자기자신의

 

불계. 흉중의 어본존을 열어가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상쾌하고 기쁨에 넘친 것이기를

 

 바란다. 끝나면 목욕탕에서 나온 듯이 개운하다라는 근행이기 바란다.

형식적으로 된다거나,  시계만 신경 쓴다거나 신경 쓰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느리고 지쳐서 독경의 어디를 하고 있는지 저쪽으로 건너뛴다거나,

 

이쪽으로 되돌아온다거나  그래도 하자 라는신심은 굉장하지만

 

역시 총명한 신심즉생활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근행은 가능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대성인은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경을 읽지 마시고, 암송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도록 하시라. 예배하는 것도

 

 바로 경을 향하지 마시고 예배를 하시라」(어서 1203쪽)


(월수 때의 근행은 원칙은 어디까지나 자유이고) 경(법화경)을 읽지 말고,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창제만하시요. 예배할 때도 경을 향하지 말고(어보전에 가지 말고)

 

예배를 하시오 - 라고 독경은 하지 않고, 다만 창제만으로 좋다. 게다가 어보전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이다. 누운 채로의 경우도 생각하시고 있다고 배견된다.



이와 같이 대성인은 형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유연하셨다. 어디까지나

 

「다만 마음만이 중요」(어서1192쪽)인 것이다.


물론 「좋은 말을 들었다」 「그런 것이라면 언제나 실천하고 있다

 

라는 등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장년부. 남자부에게는

 

 “얼렁뚱땅”하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근행.창제의 기본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도 어서를 나쁘게 “이용”해서 불도수행을 게을리하면 자신이 손해일 뿐이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전부 자기자신을 위한 신심이다. 




한 번의 창제의 공덕은 부처의 지혜로도 헤아릴 수 없다.

 


「단지 창제만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신 전제에는

 

「南無妙法蓮華經의 대공덕」이 있으시다. 이 편지의 처음에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법화경은 일일의 소작(所作)으로 1부 8권. 28품. 혹은 1권. 혹은

 

1품. 1게. 1자. 혹은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다만 한 번 부르고」(어서 1199쪽)


법화경의 하루의 수행으로서 법화경 1부 8권 28품 전부를 읽는다. 혹은 그 중

 

1권만을 읽는다. 혹은 그 중 1품이든 1게, 1구이든 1자만을 읽는다. 혹은

 

(법화경의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단지 한번만을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 법화경의 독송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라고.


「혹은 또 일기(一期)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고, 혹은 또 일기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는 것을 듣고 수희하고, 혹은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고」(어서 1199쪽)


혹은 또 일생동안 단 한 번 (제목을) 부른다. 혹은 또 일생동안에 단 한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수희한다.혹은 또 그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까지 「수희」한다. 그러한 상쾌한 창제의 소리이기 바란다.

 

묘법을 봉창하는 소리. 또 확신의 소리에 접하여, 저 사람은 훌륭하구나, 학회의 사람은

 

 굉장하구나, 원기가 넘치는구나 라고 들은 사람도 수희한다.

또 혈색도 좋고, 좋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구나,

 

빛나고 있구나 라고 수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다. 제법실상이다.(제법=현상의 모습은 즉 실상= 생명의진실한 모습이다.


이러한 수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회우」분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희에서 수희로 - 「회우」운동의 방정식이다.


「이와 같이 오십전전(五十展轉)해서 끝이 되어 가면 신심도 엷어지고 수희하는

 

마음이 약해짐이, 이삼세의 유치한 자의 어리석음이 우마들이 전후를 가리지

 

못함과 같아지지만」(어서 1199쪽) 이와 같이 (묘법의 수희를 다른 사람에게

 

차례로 전하여) 50명에게 전전해서 끝이 되어가면 그 기분도 엷어지고 수희의

 

마음도 약한 것은 마치 2,3세의 유아가 미덥지 않은 것과 같으며 ,소나 말 등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되지만(분명히 하지 못하지만) -


「타경을 배우는 사람이 이근이고 지혜도 어질고 사리불. 목련.문수. 미륵과 같은

 

사람으로 제경을 마음 속에 다 알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뛰어남이

 

백천만억배 된다는 것이 경문 및 천태. 묘락의 60권 중에쓰였도다」(어서 1199쪽)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50전전 끝의 공덕은) 다른 경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

 

기근도 뛰어나고, 지혜가 훌륭하며 사리불이나 목련, 문수보살이나 미륵보살과

 

같이 많은 경전을 암기하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백천만억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문 및 천태. 묘락이 저술한 60권의 책 속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제목의 공덕은 훌륭한 것이다.


 

단 한 번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러도 광대한 공덕이 있다. 영원한 공덕이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심이다.이 대확신이 없으면 안 된다.

대성인은 계속해서 “부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이라고 전제하시면서,

 

 경문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만 법화경의 일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알지 못하신다고 쓰였도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逆罪)의 범부가 이 공덕을 알 수 있을소냐」(어서1199쪽)


 다만 법화경의 1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부처의 지혜를 가지고도)

 

알 수 없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의 범부가 이 (묘법의) 공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결코 헤아릴 수 없습니다) -

제목 한번이라도 그 만큼의 공덕이 있다. 활도 명인이 쏘면 하나의 화살로

 

딱 표적에 맞춘다.일념이 정해진, 강하고 깊은 기원은 「일념삼천」으로 우주의

 

일체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한편 이만큼의 공덕이 있으므로 오늘은 세편이나 올렸다

 

라고 아주 으스대도 좋은 것이다. 그 환희가 소중하다. 어서에는 몇편 올리시오

 

 라든가. 몇시간 올리시오 라든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장시간의 창제에서 유의할 점


그런 위에서 물론 제목은 많이 올릴 수 있으면 그 쪽이 좋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자각과 결의에 맡겨 둘 수 밖에 없다.

 

형식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제목을 「10시간 올렸다」「8시간 불렀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는다. 물론 부인부로 부터이다. 장년부나 남자부로부터는

 

 거의 듣지 못한다. 부인부 여러분의 신심의 한결같음, 진지함에는 정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만약 오히려 그 그늘에서 남편이나 자녀가

 

「밥은 아직 안됐나요?」 「시장에 누가 가는걸까」 등으로 염려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신심즉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장시간의 창제로 인하여 생활을 내버려둔 채로 되거나 타인에게 폐를 끼쳐 불쾌한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은 하루에 이렇게 장시간 창제했다 라고 시간의 길이를 자랑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모습은 주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를 낳기 쉽다. 이웃으로부터

 

광신(狂信)이라고 생각되기도 쉽다. 그렇게 되면 신뢰를 잃고 법은 낮추고 만다.

조직의 경우도 똑같다. “10시간 제목투쟁” 등으로 이름 붙여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

 

두 세 명의 뜻 있는사람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일률적으로

 

한다고 하면, 각자각자 생활시간대는 다르고 바쁜 것도 다르다. 몸의 상태도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몇 사람에게는 결국 무리를 시키고 말 가능성이 있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물며 강제는 안 된다. 거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창가학회 본래의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극단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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