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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생사(生死)의 본질

by 행복철학자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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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生死)의 본질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생사라는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부처의 구극의 깨달음이라는 법화경의 제호의 맨

첫 번째가 생사입니다.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 묘(妙)는 사(死)이고,

법(法)은 생(生)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생겨난 배경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망이었습니다. 이 수요에 응하여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철학과 사상이 생겨났지만, 완벽하게 생사문제를 해결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만이 유일하게 생사의 본질을 완전히 밝히고

사람들의 고뇌의 근본 원인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보통 범부의 눈으로 보면 어떤 생명이 생겼다가 죽으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이 죽으면 이 세상에 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는, 생과 사라는 것이 하나의 사이클로 끝나는

일회성(一回性)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한강물을 서울에서만 보면 미사리에서 시작하여 행주산성

부근에서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늘에서 보면 태백산 상류에서

시작하여 서해 바다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상류의 시작도

그 근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고 또 그 빗물은 결국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끊임없이 이어져 계속 모습과 위치를 바꾸며

존재한다는 것이 생사의 본질이라고 부처는 보았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그것도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죽음은 끝이라는 기존의 사(死)에 대한 사상과 180도 다른

혁명적 사고방식이었고, 기성 철학이나 종교계에 일대 파문을

던지는 굉장한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종교나 철학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승하여 죽음 자체를 부

정적으로 묘사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 했지요. 그것 자체가 생사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증명입니다.

 

생사라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그 본질을 간파한 부처의 깨달음에서 보면 이제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처는 법화경 수량품에서 ‘약퇴약출(若退若出)’이라고 설하면서

생명이란 혹은 나왔다가 혹은 물러나기도 하는 것, 즉 생(生)은 생명의

현재화이고 사(死)는 생명의 잠재화라고 명쾌하게 구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TV의 전파는 영상과 소리를 담고 있지만 잠재화되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신기에 주파수를 맞추면 그 소리와

영상이 현재화되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보이는

상태를 색(色)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상태를 공(空)이라고 합니다.

 

색이라는 것은 겉으로 표출되어 존재가 인식되는 상태 즉 생(生)이고,

공이라는 것은 명복(冥伏)되어 인식하기 어려운 잠재화된 상태

즉 사(死)입니다. 그러면 공이라는 것도 결국 무(無)가 아니고

유(有)가 됩니다. 단지 표출되지 않고 잠재화되어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색과 공은 똑같은 실체가 단지 그 존재 형태만 달리해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석존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반야경에서 설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이요, 생사불이(生死不二)라는 말입니다.

물리학에서도 물질과 에너지는 똑같은 실체이지만, 어떤 조건 하에서는

물질로 존재하는가 하면 에너지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자탄도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된 형태이지요.

 

잠재화된 생명은 연(緣)에 닿아 모습으로 나타나서 역동적인 삶을 꾸미고

 색채 풍부한 개성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생’은

물러가고 ‘사’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잠재화된 에너지는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새로운

다음의 ‘생’을 기다립니다.

 

부처는 ‘생’이란 임시로 가화합(假和合)된 상태라고 설하기도 했습니다.

즉 여러 물질들이 연(緣)에 의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일정한

개성을 발휘하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 등에서 자동차, 비행기, 건물 등 모든 것이 임시로 모여서

‘생’을 영위하다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사이클에 따라

‘사’로 향한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정한 목적으로 모인

조합이나 법인도 ‘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조합이나 법인이

해산되면 ‘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가 나빠지는 것도 생사의 법칙에 따라 설명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생사의 법칙이 맥동하고 있습니다.

물가가 요동치고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것도 생사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에도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일생이라는 더욱 큰 생사를

형성하고 있으며, 작은 생명의 생사가 큰 생명의 생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을 보더라도 태어날 때 받은 몸을 최후까지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세포가 태어나서 죽고 죽은 자리에 다시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는 것을 되풀이합니다. 그 생사가 신진대사(新陳代謝)하여

신체에 활력을 주고 전체로서 그 생명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개별적 무통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중층적

통일적으로 존재하며, 작은 생명이 보다 큰 생명을 이루고, 작은 생사의

지류가 보다 큰 생사의 흐름에 들어가서 결국 우주생명이라는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경향성이나 성격은 다음 생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음에 업(業)에 대해 공부할 때 배우도록 합시다.

- 그런데 생사의 본질을 알았다고 해도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보장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인간의 목적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괴로운 생사가 되풀이된다면 오히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니치렌 대성인은 ‘본유(本有)의

생사(生死)’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계(佛界)의 생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상대하는 말로 구계(九界)의 생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구계의 생사는 울퉁불퉁한 길을 난행고행(難行苦行)하며

힘들게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반면 불계의 생사는 고속도로를 최고의 자동차로 유유하게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때때로 주위 풍경도 즐기면서 사람들을 구하려고

대생명력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생(生)도 사(死)도 불계의 대지(大地) 위를 간다!

“살아 계셨을 때는 생의 부처, 지금은 사의 부처, 생사(生死)

다 같이 부처이니라.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하는 중요한

법문(法門)은 이것이로다”(어서 1504쪽)라고.

 

결국 내 행동 속에 부처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구계의 생사를 하는가 불계의 생사를 하는가가 결정됩니다.

 

“석존이 출생한 근본 목적은 사람의 행동에 있었노라”

(어서 1174쪽, 통해)는 어문 그대로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의 진수인 창제(唱題)와 광선유포( 廣宣流布) 를 지속 실천하다

보면, 뿌듯한 생명의 충실감과 환희를 느낄 수가 있고,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부처의 생명(佛界)이 내 생명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생(生)도

환희(歡喜), 사(死)도 환희(歡喜)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신심을 하면서 민중구제를 위한 광선유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처의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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