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제목을 부르면 3가지 변화가 생긴다.

by 행복철학자 2024. 6. 30.
728x90
반응형
SMALL


제목을 부르면 3가지 변화가 생긴다.

 

첫째, 생명력이 강해진다. 둘째, 불지혜가 솟는다. 셋째, 복운이 쌓인다.

그러므로, 제목을 철저히 부르고 실천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복운 넘치는 인생으로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원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기원하는 것이다. 법화경에 이기는 병법은 없다라고 있지 않은가.

얼굴이 변할 정도로 기원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저에서부터 진심으로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가 타파되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공전이다. 어쨌든 하루 1시간, 싸우는속에서 제목을 올려라. 제목 제일로 해 나가자.

 

회합 전에도 제목, 집에 돌아 와서도 또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을리가 없다.가장 잘 알고있을 것이다. 이것밖에 싸움은 없다. 제목을 올려서 이긴

 사람만이 확신과 환희와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제목이다. 일체가 제목이다. 백만 마디의 지도보다, 백만 권의 철학서보다도 제목이다.

 제목을 올려라. 기원해라. 전부 그대로 되어 싸움은 열려져 간다.

자신이 얼만큼 제목을 올렸는가 이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교학은

필요하게 되어간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그 일이 충실해진다. 

 

하루, 1시간의 제목을 확고하게 올려나가라. 근행은 신심의 제일

 기본이다. 지금 대충 대충의 근행을 하고 있으면 10년,20년 후에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나오기도 하고, 가정으로 나오기도 하고,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

 곳으로 파급되어 간다. 자신의 신심을 제대로 해가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얄팍한 입사귀 처럼 되어버린다.

 

그러한 사람은 신심의 갑옷을 입지않고 증상만 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속에서 증상만이 있어 실패한다. 증상만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근행 하나를 해도 긴장이 없다. 그런 사람은 요주의다.

학회의 조직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일체의 원인은

 근행 그것이다. 정말로 근행을 하고 실천한 사람은 학회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고충과

 괴로움을 자연히 알아가게 된다. 제목을 올리고 근행을 하고 학회의 고충을 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비판이 되어 버린다. 매일 1시간의 제목을 올려가자.

 

그 하루 1시간의 제목이 올라가면 생명의 회전이 시작되어 간다.

생명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1시간의 제목을 올리면 학회의 리듬이 되어간다. 항상 1시간을 올리면 그만큼 생명력이

 

풍부해져서 그 자체가 행력으로 되어간다. 제목을 올려서 마를 타파해가자.

불도수행에서 가장 쉬운 것이 제목이다. 불도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제목이다.

그러나 일체의 승리의 원인, 복운의 원천은 제목에 있다. 

 

- 池田선생님 지도 中에서- 

제목에 대하여

제목은 빛이다. 「백천만년 동안 어두운 곳도 등불을 넣으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라고.

 기원한 순간부터 생명의 암흑은 사라지는 것이다. 인과구시 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확신의 기원이

 중요하다.  신력·행력의 강도에 따라서 불력·법력이 나타난다.

 

기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투철한 기원이면 머지않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법실상이다.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신해 가는것이 신심이다.


 
신앙이란 불멸의 희망이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투쟁이다.

그 근본이 기원이다. 기원하면 희망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 확신의 일념이 삼천나열로 전개되어 희망을 성취해

 나가 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백 천만년

계속되었던 암흑도 밝아 지는 것이다.

 

반드시 태양은 떠오른다. 아니 이미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묘법만은 체념할 필요가 없는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되겠느냐고 비하 하는 것은 자신의 불계에

 대한 모독으로 통한다. 이 고뇌만은 어찌

 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정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영원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묘호니 부인답서) 강의 중에서 -
기원이라 해도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을 먹고 싶어하듯이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기원하면 된다.

 

긴장하여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있는 그대로를 어본존께 부딪쳐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며 분명하게 정하고

기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미운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전하고 기원해가면 반드시 바뀌어진다.
자신이 바뀌든가, 상대가 바뀌든가, 여하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많 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바뀌

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재산이 된다. 청춘대화 (청춘의 우정, 청춘의 인생관)
청년은 교학에 도전해 주기 바란다. 청년은 행동으로

자신을 단련해 주기 바란다. 그 기대를

  담아, 또한 평소의 감사의 생각을 담아서, 신심의 기본에 대해

몇 가지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삼좌의 근행을 행하고 어본존께 깊이 기념 드렸다. 어본존의 일을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지만, 이곳은 불법유포의 역사가 얕은 미국 땅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납득」과 「확신」을 주어 가는 것이 리더의 사명이다. 그래서

 약간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극히 간결하게 요점을 말해 두고자 한다.

본존(本尊)에는 근본존경의 의의가 있다. 인생.

생명의 근본으로서 존경하고 귀의해 가는

 대상이 본존이다.그러므로 무엇을 본존으로 하는가에 의해서 인생이 근저적(根低的)

 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래의 불교의 본존은 거의가 불상(佛像)이다. 또한

 불화(佛畵)인 경우도 있다. 초기의 불교에는 불상은 없었으나,

 

후세에 서방의 그리스문화의

 영향 아래, 서북인도(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실크로드 교류의

 한 산물이다. 이러한 불상. 불화를 통하여 「부처」의

이미지를 민중은 받아들이고, 갈앙,

 신앙의 마음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日蓮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문자의 어본존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영상의 결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영지(英智)의 세계,

어본불의 위대한 「지혜」의 최고이면서 존극의 표현이라고 배견된다. 이 점에서도

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종래의 불법의 본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불가사의하다. 문자의 힘은 위대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싸인을 한다. 그 문자에는 일단, 그 사람의 인격, 입장, 힘, 심신(心身), 역사, 인과,

 

그러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이라는 한자로는 2개의 문자 속에 그 국토,

 사람들, 동식물 기타 일체가 포함되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起)는 법성의 기.

멸(滅)은 이는 법성의 멸」 (천태) 이라고 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묘법의 나타남이다.


어본존에는 변전하는 대우주(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우주의 실상이란 우리들 소우주의 경우도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서에 말씀하신 대로이다.



또 문자로 어본존을 도현 하시는 이유의 하나에 대하여 총본산

제65세 니치준 상인은, 회상(繪像)으로는 가령 십계까지

(문상교상에 집착된 색상장엄한 佛등,

말법의 올바른 본존은 될 없다)를 표현할 수 있어도 십계호구 이상

(진정한 백계천여 또한 사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이라는 어본불의 경계)은

도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배견된다고 가르치셨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