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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불법은 사람들 ‘마음’을 근본부터 개혁

by 행복철학자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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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사람들 ‘마음’을 근본부터 개혁


진실한 사회의 안온은 미증유의 대법으로 
    

<서상어서>를 배독하며

 

<서상어서>에서 서상(瑞相)이란 일반적으로 ‘전조, 신호, 길조’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법화경에서는 성불(成佛)의 요법이 설해질 전조로 사용한다. 유명한 것은 법화경

<서품> 제1에서 볼 수 있는 ‘육서상’으로, 설법의 회좌에서 대지가 진동하고

꽃이 비오듯 내리며 빛이 동방 일만 팔천의 국토에 비춰진다는 것이다.

 

본초에서는 그러한 <서품>의 서상의 특징을 “제경(諸經)보다도 서(瑞)가 크고

오래이므로”(어서 1140쪽, 이하 인용은 취의)라고 하여 “설해진 법리가 심원”

(‘법화현의’ 어서 1141쪽)하기에 이전 권교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 서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법화경의 서상은 서품에 그치지 않는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의 보탑출현에서 시작되는 삼세시방 제불의 내집,

허공회의 개시 등은 서품의 육서(六瑞)를 훨씬 뛰어넘는 스케일로 전개된다.

나아가 6만 항하사의 무수한 보살이 대지를 가르고 용출하는 모습은

어떤 경전에도 설해지지 않은 장엄한 모습이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본초에서 보탑의 용현과 지용의 용출은 “이전제경의

서상과 적문의 서상과의 차이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큰 대서상”

(어서 1141쪽)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할 필요도 없이 본문의 서상이 크다는 것은 본문에서 설해 밝힌 구원실성의 법

(석존이 구원의 옛날에 증득한 법)이 이전 제경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초를 읽다 보면 더욱 놀랄만한 일을 만나게 된다.

그 이상의 서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래신력품> 제21의 서상이다.

<신력품>에서는 방광(放光)은 시방세계에 미치고 시방제불의

세계의 대지가 모두 진동한다.

 

“앞의 적문의 서상, 본문의 대서상이라는 두 가지 서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어서 1141쪽)의 대서상이다.

이 서상의 의의를 대성인은 “이 신력품의 대서상은 석존 멸후,

정상 이천 년이 지나 말법 시대에 들어와서 법화경의 간요가 넓혀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서상이다”(어서 1141쪽)라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법화경의 진가는 말법의 묘법(妙法)홍통을 선양하기 위해 설해졌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니치렌 대성인의 홍통을 증명하는

경전이 법화경이라는 것이 제경의 서상, 적문의 서상, 본문의 서상,

 멸후 부촉의 서상과, 이들 각각을 비교함으로써 선명해지는 것이다.

 

악심이 성하므로 자연환경도 이변

 

그러면 현실에서 대성인 재세시에 일어난 서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가의

대지진과 문영의 대혜성이라는 ‘땅의 이변, 하늘의 이변’이다.

소위 길서가 아닌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의문에

그것은 말법 중생의 악심이 일으킨 이변이라고 대성인은 명쾌하게 답하신다.

본초의 기조에 일관해서 흐르는 법리는 ‘의정불이(依正不二)’다. 사람의

‘육근’이 움직이는 것에 의해 서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말법의 서상이 일어나는 것은 니치렌 대성인의 묘법홍통에 대해

사람들 악심이 성해지기 때문이라고 밝히신다.

본초에서는 정의의 한 사람이 일어섰을 때 악세 말법이기에 제바달다를

백십만억배 뛰어넘는 대만심이 국중에 만연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멸후홍통의 어려움은 중생의 생명 속에 있는 원품의 무명의 작용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통찰하신다.

 

바꿔 말하면, 이전 제경의

가르침에서는 일체중생의 번뇌를 파할 수 없다. 법화경만이 일체중생의

원품의 무명에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악심이 충만한 것이다.

 

‘선’을 홍통하는 사람이 부처

 

무슨 이유로 이전경에서는 번뇌를 파할 수 없는가. 그것은 이전경이 지닌

인간관, 생명관의 얕음과 관계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전경에서는 염리단구(厭離斷九), 즉 구계의 번뇌의

생명을 싫어하여 단멸할 것을 설한다. 번뇌를 끊고 진력한 끝에 깨달음의

열반의 세계가 있다고 설한다.

 

일견 이것은 악에서 선으로 향하는 진실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 끝에

정말로 만인이 도달할 수 있는 결승점이 있는 것일까.

선(善)만을 갖추고 악(惡)을 갖추지 않은 부처는 반대로 악세말법의

사바세계에는 출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보다 본원적인 생명관을 설한 것이 법화경이며

니치렌 대성인 불법(佛法)이다.

 

여기서는 부처도 중생도 모두 원품의 무명과 원품의 법성의

생명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설한다.

이 생명관은 제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무명의 생명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무명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과 법성이란 일심의 이명이다”(어서 564쪽), “악연을 만나면

미혹에 빠지고 선연을 만나면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은 즉 법성이며

미혹은 즉 무명이다”(어서 510쪽)라는 지남처럼 선에 연을 맺으면 ‘법성’,

악에 연을 맺으면 ‘무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의 생명이 있음으로 끊임없는 생명변혁을 계속해

항상 악과 싸우고 선연을 넓히는 생명경애를 확립하는 도전이 필요하다.

그 부단한 실천 속에서 선한 법성이 현현하고 무명이 명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투쟁하는 사람이 부처’라는 정의가 성립되는 이유가 있다.

또 악과 싸우는 선의 투쟁이 불가피해진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투쟁에 의해서만 사회의 안온은 근본적 차원에서 확립될 수 있다.

 

원품의 무명 타파하는 정신투쟁

 

이 무명법성 일체의 원리에서 새롭게 본초를 배독할 때, 앞서 이전 제경에서는

번뇌를 뒤흔드는 진정한 선인의 대투쟁이 개시되지 않으면 만인의 원품의

무명을 타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대성인은 “상일인으로부터 하만민에 이르기까지 대악심의

중생이 충만”(어서 1142쪽)하다고 하신 악세말법에 ‘홀로’ 일어서 만인의

원품의 무명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명을 타파함으로써 광선유포를 실현하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악심의 근원은 니치렌에 대해 일으킨 악심이다”(어서 1142쪽)라고까지

말씀하시며, 일체의 악과 끝까지 투쟁하는 심경을 피력하신다.

실로 무명과의 투쟁이야말로 “기쁘구나, 즐겁구나”(어서 286쪽)라는 숭고한

대경애를 자신의 모습 속에 나타내신 것이다.

 

이 각오로 일어섰을 때 비로소 진정한 니치렌 문하라고 할 수 있으며

것이 창가학회(創價學會) 정신이며 실천이다.

 

<이케다 SGI회장 스피치에서>

 

수필 ‘인간 세기의 빛’에서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서상어서>의 일절을

배독하면서 다음과 같이 스피치했다.

“광선유포란 근원의 악인 무명의 어둠을 깨고 만인의 흉중에 불계(佛界)라는

존극의 생명을 밝히는 투쟁이다.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며 인권투쟁이다.

사람들 생명을 근저부터 뒤흔드는 것이다!”라고.

 

참으로 우리들에게 있어 ‘서상’이란 옛 경전에 있는 석존 재세의 길조는 아니다.

멸후 말법에서 제바달다처럼 만심이 충만한 사회에서 사람들 원품의

무명을 타파하는 불굴의 정신투쟁 속에 대법흥륭의 서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철저하게 정의의 금자탑을 세우는 과감한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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