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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레수량품 제16 강의

수량품 강의 2

by 행복철학자 2024.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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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품 강의 2

 

 

 [본문]

 

 一切世間    天人及      阿修羅   皆謂今釋迎牟尼佛     出釋氏宮    去伽耶城

 일체세간    천인급       아수라  개위금석가모니불     출석씨궁    거가아성

  

 不遠坐於    道場得     阿耨多羅 三藐三菩提   然善男子    我實成佛已來

 불원좌어    도량득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연선남자    아실성불이래

 

無量無邊     百千萬億     那由佗劫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

 

 일체세간의 천인(天人) 및 아수라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석씨(釋氏)의

궁(宮)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도량에 좌(坐)하여 아뉵다라

삼먁삼보리를 득(得)하셨다고 생각하였느니라.그런데 선남자여.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

 

 [통해]

 일체세간의 천계(天界), 인계(人界) 및 수라계(修羅界)의 중생은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석가족의 왕궁을 나와서 가야의 시가(市街)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량에 앉아, 삼매(三昧)의 수행에 면려하여 아뉵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다.'생각한다. 그러나 선남자여, 나(석존)는 실로 성불한 지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 지났다.

 

[어역]

* 일체세간(一切世間)  천인급(天人及) 아수라(阿修羅) :

모든 세간의 사람이라는 뜻.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는 제천과 인간 그리고 아수라가 이 세계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 이승(二乘)과 보살 그리고 부처는 각각의 깨달음으로 세간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 도량(道場) : 수행의 도(道)를 실천하는 장소. 여기에서는 석존이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장소로, 가야성 교외에 있는 보리수 아래를 가리킨다.

* 아뇩다라 삼막삼보리(阿耨多羅 三藐三菩提) : 이 이상은 없는 최고의 깨달음.

부처의 깨달음을 말한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漢譯)한다. 

*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佗劫) : 무량 무변 

백 천  만  억  나유타의 겁(劫). 극히 장원한 시간을 나타낸다. 오백진점겁과 같다.

 

[강의]

 시성정각을 깨뜨리고 구원실성을 밝히다

 수량품의 골격인 구원실성(久遠實成)이 나타난 부분이다. 석존은 허공회(虛空會)

 참석한 무수한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간 사람들은 모두 이 석가모니불이 열아홉살에 궁전생활을 버리고 출가하여,

서른살에 가야성 근처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석존은 금세(今世)에 처음으로 성불했다.- 

 이 '시성정각(始成正覺)'이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석존의 성불상(成佛像)이다.

세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전(爾前)의 제경(諸經)과 법화경의

적문에서 석존 자신이 일관하여 금세에 처음으로 성불했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량품에서는, 석존이 스스로 설한 시성정각을 타파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

 다시 말해 '나는 실로 무량무변 백천만억냐유타겁이라는

구원의 옛날에 성불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구원실성'이다. 석존은 시성정각이라고 하는 적(述)의 모습을 열어서

구원실성의 본지(本地)를 밝혔다.- 발적현본(發迹顯本)'<주13>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천치가 뒤집히는 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시성정각과

구원실성은 물과 불처럼 다르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성정각을) 한마디로써 대허망(大虛妄)이라고 깨뜨리는 글월이니라."

(어서 213쪽)

 허망이란 거짓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설한 시성정각이라는 성불한 모습이

거짓이라면, 함께 설한 성불의 원인도 거짓이 된다. 성불의 원인과 결과가 함께

허망이 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된다.

 대성인은 '개목초(開目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문(本門)에 이르러 시성정각을 깨니, 사교(四敎)의 과(果)도 깨지고 사교의 과가

깨지니 사교의 인(因)도 깨졌느니라. 이전적문(爾前迹門)의 십계(十界)의 인과를

 타파하교 본문의 십계의 인과를 설해 나타냈으니"(어서 197쪽) - '본문에  이르러

시성정각의 가르침을 깼으므로 사교(四敎: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가 설한 불과(佛果)가 깨졌다. 불과가 깨짐으로써 사교에서 설해진

성불의 인(因)도 깨졌다. 이전 및 적문의 십계의 인과를 타파하고, 본문의 십계의

인과를 설한 것이다.'

 사교란 요컨대 이전 * 적문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이전경에서는 성불의 인(因)인

구계(九界)의 생명을 끊고 '부처로 된다'고 설한다. 이것이 이전경의 성불의 인과이다.

 

 법화경 적문에서도 구계의 중생의 생명에 불계가 내재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 이전(爾前)의 성불관(成佛觀)을 탈각(脫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부처 자신이 시성정각의  관점, 요컨대 '구계(九界)를 끊고 부처가 된다'는

관점에 있기 때문이다.

 

 타파된 이전 * 적문의 성불의 인과

 그런데 본문의 수량품은 구원실성을 설하여, 이전 * 적문의 성불의 인과를 타파했다.

 경전에는 예를 들면, 석존이 과거세에 설산동자(雪山童子)나 시비왕(尸毘王)이나

사슴왕으로서 수행했다고 나온다. 과거세라고 해도 구원실성의 때보다도 훨

씬 나중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구원에 이미 석존이 성불했다는 것은,

과거세나 금세에 석존이 인간이나 축생(畜生) 등의 구계의 중생으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 실은 본지는 부처이면서 일부러 구계의 모습을 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구원실성의 불계의 생명에 엄연히 구계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고,

자유자재로 구계를 유희(遊戱)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구계로 나타난 생명에도 불계가 상주(常住)하고, 부처의 생명에도 구계가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실성은 십계호구(十界互具)의 생명관을 나타낸다.

이것이 '개목초'에서  말씀하신 '본문 십계의 인과'이다.

 

 시성정각을 깨고 구원실성을 밝혀지 못하면, 찬된 성불의 인과를 밝힐 수 없다.

이전 * 적문이 성불을  설했다해도, 시성정각이면 '뿌리 없는 풀'이나 마찬가지다.

 

 문저로는 십계 모든 사람이 구원의 부처의 당체

 요컨대 구원실성의 부처는, 십계를 구족(具足)하고 상주하는 생명을 나타낸다.

이것을 공간적으로 말하면 '우주대(宇宙大)의 생명'이고, 시간적으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은 우리 생명의 구극의 모습이다.

이 무량무변하고 우주대인 영원한 생명을 우리 생명상에 여는 것이 구원실성이다.

 문상으로는 십계구족(十界具足)의 상주의 생명은 '아실성불(我實成佛)'의 '아(我)'

다시 말해 석존 한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대성인은 이 '아(我)'를 문저에서 "법계(法界)의 중생"(어서 753쪽)이고

"십계각각"(어서 753쪽)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석존뿐 아니라 십계의

모든 사람이 실은 구원의 부처의 당체라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의 구원의

생명은 실은 우리들 자신의 기심( 己心)에도 갖추어져 있다.

 이 대성인의 문저의 관점으로 비로소 일체중생의 성불이 확실하게 보증되었다.

대성인 불법은 이른바 '민중석(民衆釋)' '인간석(人間釋)'에 따라 수량품 경문을

전 민중에게 활짝 열렀다. 우리 생명이 십계구족의 상주의 생명이며 불계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올바른 연(緣)을 만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불계를 개현(開顯)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역겁수행(歷劫修行) 등은 필요 없다. 몇번이고 태어나

수행하지 않고도 이 일생동안에 성불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무거운 숙업이 쌓여

있어도 내적(內的)인 힘으로 개혁해 갈 수 있다. 이것은 성불관의 근본적 전환이다.

 성불의 인과법칙의 대전환이다.

 

 구원원초란 '생명 근원의 때'

 그리고 대성인은, 자신의 생명에 갖추어져 있는 이 성불의 근본법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 자신을 남묘호렌게쿄여래라고 명확히 설하셨다.

그리고 그 대생명을 어본존으로서 나타내어 말법의 모든 사람에게 수여 해주셨다.

 대성인은 '어의구전(御義口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원이란 남묘호렌게쿄이며 실성무작(實成無作)이라고 열렸느니라."(어서 759쪽)

 "성(成)이란 연다는 의의이고 법계(法界)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부처라고

연 것이니라"(어서 753쪽)

 '구원(久遠)'이란 십계구족의 상주의 생명이고, 십계상주의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이다.

 실성(實成)이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어본존이 나타나

그 공덕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저의 구원실성이다. 그리고 이것을 문상의 구원실성과 명확히 구별하여

 '구원원초(久遠元初)'라고도 한다.

 '구원원초'는 단순히 문상의 오백진점겁의 구원보다도 더욱 이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그 본의에서 말하면, 구원원초는

이른바 '생명의 근원의 때'이다. 

 

 이 생명의 본원(本源)에 눈뜨면, 삼세에 걸쳐 언제라도 '구원원초'가 된다.

 

 '구원을 생각해내면 사바세계도 상쾌하게 빛난다'

 이 생명의 근원의 때에 돌아가 '지금부터', '이제부터'라는 신선한 일념으로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원초의 삶이 대성인 불법의 진수이다.

 어본존을 신수하고 근행 * 창제를 실천하는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구원원초'

'순간순간이 구원원초'이다.

 문호 로망 롤랑이 이렇게 썼다.

 "하루하루를 사랑해야 한다. 하루하루를 존경해야 한다."

 삼세영원을 응축한 일순간 - 그 '지금'을 살아가는 감동을 가르쳐 주신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다. 도다 선생님은 '구원원초의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오백진점검 이전(구원원초)의 우리를 관(觀)하면, 그 때는 상쾌한 세계에서

자유자재로 아무런 아무런 부자유도 없이 맑고 즐겁게 노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아름다운 동심(同心)의 사람들이었다.

그 상쾌한 세계에 살던 우리가 지금 또 사바세계에 일제히 용출(湧出)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때의 맑고 즐거운 세계는 어제 일 같다. 어떻게 그때의

상쾌한 세계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함께 자유자재로 노닐던 벗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또 함께 법화회좌(法華會座)에서 서원한 맹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 사바세계도 즐겁고 맑고 상쾌하게 모두 사이좋은 벗만의 사는 세계인데

탐(貪), 진(瞋), 질투의 독(毒)을 권교(權敎), 소승교(小乘敎), 외도(外道)의

패거리가 억지로 마시게 하여 미치광이가 된 나머지 서로 구원을 잊어 버린

것이야말로 지극히 슬프고 애석한 일이 아닌가"

 구원원초를 어제의 일처럼 생각해낸다. 이것이 도다 선생님의 장대한 경애이다.

 구원원초를 알면, 이 사바세계도 본디 즐겁고 청정하며 상쾌한 세계다.

또 사이좋은 벗들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과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원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민중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위해

광선유포의 실천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펼치는 활동은 인류를 근원부터 행복하게 하고, 세계를 근본으로

평화롭게 하기 위한, 생명의 위대한 개척운동이다.

 

 지금이야말로 '본문의 시대' '발적현본의 때'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그 본질에 미혹하는 것 - 그것이 '생명의 존엄'이다.

 이 '생명의 존엄'이 인류의 확고한 지혜가 된다면, 전쟁과 비참을 되풀이하는

인류의 숙명도 크게 전환해갈 수 있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한다.

 '전쟁의 세기'에서 '생명의 세기'로의 대전환 - 바야흐로 그 결정적인 때이다.

 '본문(本門)의 시대' '발적현본(發迹顯本)의 때'이다.

 때를 느끼고 일어서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이다. 그 위대한 '한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 세 사람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광선유포의 방정식이다.

 법화경은 '생명의 존엄'을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자각시켜고, 존엄한 삶의 자세를

확립시켜기 위한 가르침이다.

 '만인이 부처의 지혜를 열어라.' - 이것이 적문(迹門)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본문수량품은 이렇게 가르친다.

 "석존은 금세에 처음으로 부처의 지혜를 연 것은 아니다. 생명의 영원한 활동에

본래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고, 석존은 그 영원한 생명의 당체이다."

 

 이 석존의 '발적현본'으로 만인이 영원한 생명의 당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인이 지혜를 열어라.' '만인이 경애를 높여라'라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실질화했다.

 

 대성인 '우주 근원의 묘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대경애'

 니치렌 대성인은 1271년 9월 12일 다쓰노구치법난을 계기로 발적현본하셨다.

 '개목초(開目抄)'에 이렇게 씌어 있다.

 니치렌이라고 하는 자는 거년(去年) 9월 12일 자축(子丑)의 시(時)에 목이 잘렸느니라.

 이는 혼백(魂魄)이 사도(佐土)의 땅에 와서"(어서 223쪽) - 니치렌이라고

하는 자는 지난해 (1271년) 9월 12일 자축(子丑)의 때(한밤중)에 범부의

목을 잘렸다. 이것은 혼백이 사도의 땅에 온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니치칸 상인(日寬上人)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경문의 원의(原意)는 연조(蓮祖) 대성(大聖)은 명자범부(名字凡夫)<주14>의

몸의 당체, 완전히 이는 구원원초의 자수용신(自受用身)이 되어,

내증진신(內證眞身)<주15>의 성도(成道)를 부르고, 말법하종(末法下種)의

본불(本佛)로 나타나시는 명문(明文)이니라."

 다시 말해 '범부의 몸에 구원원초 자수용신의 생명을 나타내셨다.'

- 이것이 대성인의 '발적현본'이다.

 대성인 내증(內證)의 본지(本地) - 그것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이시다.

자수용신이란 "원하는 대로 받아서 쓰는 몸"(어서759쪽)이다. 다시 말해

우주 전체를 자신(自身)이라고 열고, 우주 근원의 묘법의 역용(力用)을

자유자재로 받아 쓰는 우주대의 경애이다.

 대성인은 다쓰노구치에서 막 목이 잘리려 했을 때 "지금이외다"(어서 913쪽)라고

소리 높여 우는 시조 깅고를 "이처럼 기쁜 일이니 웃으시오."

(어서 914쪽) 하며 질타하셨다.

 대우주의 불계의 역용을 자유자재로 받아 쓰는 광대한 경애에서 보면, 대성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헤이노 사에몬노조나 고쿠라쿠사 료칸의 책모 따위는

어리석고 하찮은 움직임으로 비쳤을 것이다. "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니라"

(어서 910쪽)라며 유유히 내려다 보셨다.

 사도로 유베되어서도 "유배(流配)의 몸이지만 희열(喜悅)은 한량없도다"

(어서 1360쪽)라며 대경애를 나타내셨다. '개목초(開目抄)' '관심본존초

(觀心本尊抄)'를 저술하여, 말법만년에 걸친 인류구제의 법을 밝히셨다.

그리고 어본존을 도현(圖顯)하기 시작하셨다. 

 

 얼마나 광대무변한 경애인가. 어떠한 박해도 대성인의 마음을 부술 수는 없었다.

 

 범부의 몸에 원초의 생명을 여는 것이 발적현본 

 도다 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성인은 저만큼의 대난을 견디셨기 때문에 위대한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온갖 대난을 견디면서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대자대비의

투쟁을 전개하신 점이 더욱 위대하다."

 대성인의 발적현본이란, 결코 당신 자신을 보통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높이에 둔 것이 아니었다. 대성인이 다쓰노구치에서 나타내신 모습은,

인간으로서의 구극의 모습이다.

 한 사람이 본래 얼마나 위대한가. 장엄한 존재인가.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내셨다.

 결코 '인간(人間)' 이상의 존재가 되셨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경애를 높이기 위해,

그 자유자재의 대경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불법의 진수는 범부즉극(凡夫卽極)<주16>이다. 범부의 당체에 원초의 생명을

여는 것이다. 대성인은 '발적현본'을 통해 그것을 몸소 가르쳐주셨다.

 

 누구나 광포의 사명을 나눠 가진 불자

 차원은 다르지만 우리도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신심적 측면에서, 광선유포의

실천적 측면에서 본지를 나타냈으면 한다. '현본(顯本)'이란 가장 깊은 자각에

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각을 실천적 측면에 '나타내는' 일이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상(敎相)<주17>의 측면 다시말해 외용(外用)<주18>의 모습으로는,

우리는 지용보살이다. 하지만 그 신심에서는 니치렌대성인의 권속(眷屬)

<주19>이며, 말제자(末弟子)이다.' - 이 확신이 '학회의 중심사상'이다."

 모두가 니치렌 대성인에게 직결한 불자(佛子)라는 자각에 서는 것이 창가학회의

발적현본이다.

 학회가 발적현본한 날 - 도다 선생님이 제2대 회장으로 추대된 1951년 5월 3일이

그날이다.이때 도다 선생님은 '75만 세대의 절복'을 대선언하셨다.

이 대사자후(大師子吼)에 의해, 학회전체에 '우리는 지용보살이니라.'

'우리는 어본불의 본권속이니라.'라는 '위대한 자각'이 넘쳐흘렀다. 

 도다 선생님은 이 날을 전후하여 몇번이고 말씀하셨다.

 "돌이켜 보면 마키구치(牧口) 선생님은 1943년 봄 무렵부터 '학회는

발적현본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이 발적현본의 사실을 나타내지 않으면

우리가 나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모두 어리둥절해할 뿐, 어쩔줄 몰랐다."

 도다 선생님은 그 마키구치선생님의 마음을 마침내 실현하셨다. 사제의 유대야말로

발적현본의 열쇠이다.

 우리는 모두 어본불의 불자이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다. 본지가 없는 학회원은 없다.

 도다 선생님이 쓰신 소설 <인간혁명>에는 도다선생님이 옥중오달(獄中悟達)하신

내용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주인공(간씨)은 공동주택에 사는 한 서민이다.

왜 굳이 평범한 한 서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오달하신 장면을 묘사하셨는가.

도다 선생님이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나 동등하게 광선유포의 사명을 나눠 가진 불자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본래의 자신"에게 막힘은 없다

 본지(本地)는 '진정한 자기자신'이다. 스스로 본래의 사명을 자각한 사람은

부처의 생명이 힘차게 용현하여 어떠한 인생도 유유히 승리할 수 있다.

즐겁고 의의 있는 인생행로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광선유포와 우리 인생'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막힘이 없다. 대성인의 생명도, 어본존의 힘도 광대무변하고 우주대이다.

우리 생명도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나머지는 우리의 일념이다.

 만약 막혔다고 느꼈다면, 자신의 약한 마음에 도전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대신력(大信力)을 분기시킨다.

 

 그것이 우리의 '발적현본'이라고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막힘과 맞서

싸우는 투쟁이 신심이다. 마와 부처가 맞서 싸우는 투쟁이 신심이다.

불법은 승부이다.

 

 매일 아침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매일 저녁 부처와 함께 눕는다

 우리는 매일 아침, 생명의 근원에서 하루를 출발한다. 매일 아침 흉중(胸中)에서

원초의 태양이 떠오른다.

 어서에 이렇게 씌어 있다.

 "조조(朝朝),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 시시(時時)로

성도(成道)하며 시시(時時)로 현본(顯本)하도다."(어서 737쪽)

 '시시로 현본'한다. 창제하고 광선유포로 이어지는 활동에 힘쓸 때, 우리 몸에

자수용신- 본래의 자신이 나타나고 지혜가 작용하여 용기가 솟아,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스스로의 경애를 즐긴다. 그것이 우리들의 '발적현본'이다.

 대성인은 '어의구전(御義口傳)'에서, 수량품의 '아실성불(我實成佛) 이래(已來)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구절을 문저의 관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실(我實)이라고 여신(成) 불(佛)로서 이(已)도 내(來)도 무량이며 무변이니라

"(어서 753쪽)

 신심으로 '나는 본래 부처(불<佛>)'라고 열면(성<成>), 과거 구원의 생명(이<已>)도

미래 영원의 생명(내<來>)도 함께 포함한 현재의 자신이 나타난다. 영원한 생명의

큰무대에서 자유자재로 활약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수량품은, 이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우주대의 생명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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