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레수량품 제16 강의

수량품 강의 10

by 행복철학자 2024. 6. 21.
728x90
반응형
SMALL

수량품 강의 10

 

[본문]
 이제중생(以諸衆生) 유종종성(有種種性) 종종욕(種種欲) 종종행(種種行) 종종억상(種種憶想) 분별고(分別故) 욕령생제선근(欲令生諸善根) 이약간인연(以若干因緣) 비유언사(譬喩言辭) 종종설법(種種說法) 소작불사(所作佛事) 미증잠폐(未曾暫廢)
 
 모든 중생은 종종(種種)의 성(性), 종종의 욕(欲), 종종의 행(行), 종종의 억상분별(憶想分別)이 있는 고로, 모든 선근을 생기게 하고자 원하여, 약간의 인연(因緣) * 비유(譬喩) * 언사(言辭)를 갖고 종종으로 법을 설하느니라.
 소작(所作)의 불사(佛事) 아직 일찍이 잠시도 폐(廢)하지 않았느니라. 

 

 [통해]
  중생에게는 여러가지 성질, 여러가지 욕구, 여러가지 행동, 다양한 관념과 판단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 갖가지 선근(善根)을 일으키게 하고자 원해서, 많은 인연을 설명하고, 많은 비유와 말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가르침을 설한다.
 그 부처의 교화는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다.
 
 [어역]
 * 억상분별(憶想分別): 마음에 생기는 관념(억상)이나 판단(분별)을 말함.
 * 선근(善根): 선(善)을 낳는 능력, 선(善)한 인(因)을 말함. 공덕의 열매와 꽃을 낳게 하므로 '뿌리'로 비유했다.
 * 약간(若干): 현대의 '약간'과는 다르며, '꽤 많은'이라는 뜻.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는 '갖가지'라는 의미가 있다.
 * 인연(因緣): 원인, 유래.
 * 불사(佛事): 부처가 해야 할 행동. 중생을 이끄는 일.

 

 [강의]
 부처의 '이타의 지혜'를 설한 부분이다.
 "'한사람'도 빠뜨리지 않겠다.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부처의 자비에서 나오는 서원이다. 삼계(三界)의 실상(實相)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부처의 지혜는, 그대로 천차만별한 중생을 한사람 한사람 따뜻하게 지켜보는 '자애의 눈'이다.
 
 만인의 행복을 위해 부처는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또 한사람 한사람의 개성을 소중히 하는 '민주(民主)의 눈'이기도 하다. 구원의 부처는 '한 사람'과 대화하며, 마음을 통하게 하는 부처이다. 영원한 생명이므로 언제라도, 누가 있는 곳이든 출현한다.
 그러므로 만인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부처의 투쟁은 멈추는 일이 없다. 부처는 쉬지 않고 사람들의 고뇌를 없애고자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속 행동한다. 그 부처의 자비로운 행동이 구원 이래, 현재까지 계속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밝히는 것이 이 경문이다.


 구제해야 할 중생은 무수(無數)이다. 또 개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철저히 구제하는 부처는 수명이 길다. 지혜도 깊다. 공덕도 무량하다. '사람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이 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위대한 생명력이 용현하다.


 경문에 "모든 중생은 종종의 성(性), 종종의 욕(欲), 종종의 행(行), 종종의 억상분별이 있는 고로"라고 있다. 석존은 어느 경전에서, 중생의 기근이 천차만별하다는 것을 아름다운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연화(蓮花)에는 푸른 것도, 붉은 것도, 흰 것도 있다. 수중(水中)에서 무성한 것도, 수면에 닿아 있는 것도, 물위로 나와 있는 것도 있다."(성구경<聖求經>)
 기근(機根)이나 기질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이 자연이다. 실상(實相)이다. 다르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두 똑같다면 로봇이다.
 부처는 이 '차이'와 '다름'을 존중한다.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기쁨'이 있다. '1000명'이 있으면 '1000명의 고뇌'가 있다. '일체중생의 다른 고뇌'와 '동고(同苦)'하는 것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한사람 한사람의 서로 다른 성질이나 욕구의 차이를 적확하게 인식하고, 다채로운 비유와 말을 구사하여 가르침을 설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사람들의 기근을 일불승(一佛乘)의 법을 들을 수 있도록 높인다.


 에를 들면 석존시대에 수리반특(須利槃特)이라는 불제자(佛弟子)가 있었다. 수리반특은 기억력이 나빠서, 동료가 하는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친형도 "너는 아무리 수행해도 소용없구나. 자,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쫓겨난 수리반특은 풀이 죽어 혼자 떠나려고 했다. 그때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석존이었다.
 부처는 상냥하게 수리반특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그리고 석존은 발 닦는 수건을 건네주었다. 수리반특은 먼지투성이었다. 석존은 수리반특에게 "먼지투성이인 이 수건을 깨끗한 수건이라고 상상하라."라고 말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청결'이라든지 '불결'이라든지 하는 외면적인 차별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이 있다. 참된 '깨끗함'은 바로 마음속에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수리반특은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사냥함이 담겨 있는 수건을 보고는, '그때의 감동'을 잊지 않고 '발닦는 수건은 깨끗하다.'고 계속 생각했다. 수행이 즐거워지고, 마침내 깨끗한 천안(天眼)을 가진 일류의 수행자가 되었다.

 

 

 묘법을 말하는 행위는 최고의 불사
 부처는 그 어떤 사람도 결코 버리지 않는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살핌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처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여 그 사람을 구제한다.
 "약간의 인연 * 비유 * 언사를 갖고 종종으로 법을 설하느니라." - 부처는 대화의 명수이다. 좌담의 달인이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석존을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듯이, 부처는 자유자재로 법을 설하고, 확신 있는 소리로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
 그 대화의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에 선근(善根)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행복을 얻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인(因)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밖에 없다. 묘법은 최고의 선근이다. 그러므로 이 묘법을 벗에게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최고의 부처의 행동이고 '불사(佛事)'가 된다.
 경문에는 그 부처의 행동은 '미증잠폐(未曾暫廢)' 다시 말해 잠시도 해이한 적이 없다고 씌어 있다. 부처에게는 휴식이 없다. 지상의 비참을 근절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석존은 이렇게 말했다.


 "낮이나 밤이나 내게는 후회가 없다. 자고 있을 때도 내 마음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부처는 그곳에 땅 끝이라고 해도 거기에 구제해야 할 '사람'이 있는 한 계속 걸어간다.
 석존은 홍교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사위국(舍衛國)에는 무려 900번 이상이나 설법하러 찾아갔다고 한다. 또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에는 120번 이상, 발기국의 수도 비사리(毘舍離)에는 49번, 고향인 가비라성(迦毘羅城)에는 31번, 교상미국에는 19번 설법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각각 몇백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물론 교통수단은 걷는 것 이외에는 없다. 입멸 직전에 홍교하러 걸은 거리도 250킬로미터나 된다. 부처의 이러한 '미증잠폐'의 모습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살아 있다는 위대함' '생명의 숭고함'을 확신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명상하는 부처' '앉아 있는 부처'라는 정적(靜的)인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의 석존은 다르다. '걷는 석존' '행동하는 석존'의 역동적인 모습이야말로 진실한 석존이다. 부처란 끊임없는 투쟁하는 사람의 이명(異名)이다. 부처는 계속 행동한다. 민중의 행복을 구축하기 위해, 온갖 권위로부터 민중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 모습이야말로 '미증잠폐'이다.

 

 미증잠폐 - '니치렌은 한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
 니치렌 대성인도 석존 이상으로 '미증잠폐'의 인난홍통(忍難弘通)으로 일관한 생애었다.
 1253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일염부제를 향해 드높이 선언하시고부터, 전 민중의 행복과 평화를 바라는 투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1260년에 당시의 권력자에게 간효(諫曉)의 서(書)인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신 이래로 권력의 탄압이 극에 달했다.


 반복해서 덮쳐오는 박해, 마쓰바가야쓰법난, 이즈유죄, 고마쓰바라법난, 다쓰노구치법난과 사도유죄 등등, 그 어떤 대난에도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며 유연하게 정면으로 맞서셨다.
 "니치렌은 한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어서 1224쪽)
 "지금 이르기까지의 싸움은 그치지 않느니라."(어서 502쪽)
 미노부 산중에서 보내신 만년의 생활도 은둔이란 말과는 거리가 멀다. 허술한 초가집에 살면서도 문하에게 법화경 등의 강의를 계속하셨다.


 사람들을 속이는 종교인과 오만한 권력자에게는 열화(烈火)와 같은 언론전을 전개하셨다. 그리고 고뇌에 빠진 민중에게는 봄바람 같은 따뜻한 편지를 계속 보내셨다. 그 저작과 소식문(消息文: 편지 * 서간문 등)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만다고 한다.


 참으로 대성인의 불사(佛事)는 잠시도 쉬지 않은 미증잠폐이셨다.
 "니치렌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껏 일일편시(一日片時)도 마음 편한 일은 없도다."(어서 1558쪽)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의 생애이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성인은 어본존을 도현하여, 대자비행(大慈秘行)을 영원토록 하셨다. 말법만년의 중생을 구제하는 길을 여셨다.
 "니치렌 자비가 광대하면 남묘호렌게쿄는 만년외(萬年外) * 미래까지도 유포하리라."(어서 329쪽)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상의 미증잠폐는 없다. 얼마나 고마우신 일인가.
 도다 선생님이 이 미증잠폐의 경문에 대해 유머를 섞어 이렇게 강의하셨다.
 "우리에게는 일요일이 있지만, 어본존에게는 일요일이 없다. 어본존이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사정이 나빠질 것이다. 한밤중에 복통이 일어나 어본존께 기원해도, 어본존이 주무셔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우리 같은 사람이 여러분을 위해 한두시간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부처님이 일하신 것에 비하면 몇억분의 일, 몇천억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힘이 난다."
 도다 선생님은 회합에 갈 때나 지도하러 갈 때 자주 '미증잠폐'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피로가 쌓여 몹시 허약해지셨을 때도 "부처가 '미증잠폐'이셨으므로, 사명에 끝까지 살아가는 나도 노력해야 한다."며 나가셨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 귓가에 생생하게 새겨져 떠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대성인의 문하로서, 도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잠시도 쉬지 않고 광선유포를 위해 기원하고 행동했다.
 불법은 정진행(精進行)이다. 창가학회는 바로 이 미증잠폐의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크게 발전했다. 광포지도자에게 정체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지도자는, 모두 피로가 쌓여 쉬어야 할 때 무리를 강요하면 안 된다. 가치적으로, 리듬 바르게, 즐겁게 - 그것이 미증잠폐의 비결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모두가 희망에 불타 전진할 수 있는가.'라는 일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그 일념이 부처의 '미증잠폐'에 통하는 마음이다.
 서두르지 말고 유유히 도전하자.
 우리에게는 미증잠폐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나 용기 있고 늠름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그 어떤 풍랑이나 역풍에도 '투쟁하는 마음'으로 맞서는 자세가 이 경문과 통하는 모습이다. 그 마음이 우리 생명을 건강 * 장수로 향하게 한다.
 '사람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사명을 끝까지 다해가자.' - 이렇게 정하는 것이 '여래수량'의 '미증잠폐'라는 삶의 자세이다.

 

 

 

728x90
반응형
LIST

'여레수량품 제16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량품 강의 8  (0) 2024.06.22
수량품 강의 9  (0) 2024.06.21
수량품 강의 11  (0) 2024.06.21
수량품 강의 13  (0) 2024.06.21
수량품 강의 14  (1) 2024.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