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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레수량품 제16 강의

수량품 강의 11

by 행복철학자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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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품 강의 11

 

[본문]

여시. 아성불이래. 심대구원. 수명무량. 아승기겁. 상주불멸.

如是. 我成佛已來. 甚大久遠 壽命無量. 阿僧祇劫. 常住不滅.

제선남자. 아본행보살도. 소성수명. 금유미진. 부배상수.

諸善男子. 我本行普薩道. 所成壽命. 今猶未盡. 復倍上數.


이와 같이 나는 성불한 이래 심대하게 구원이니라. 수명은 무량아승기겁이고
상주이며 멸하지 않는다.
모든 선남자여.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바의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
하지 않았으며 上數에 倍하느니라.

 

【강의】

여기서부터는 미래에 대한 메시지이다.
수량품은 오백진점겁의 구원이라는 과거의 일을 설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진의는 미래에 있다.

수량품은 미래를 여는 메시지

대성인은 수량품이 설해진 것은 "석존 멸후의 중생을 위해서"이고 특히 "말
법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어서 334쪽).
또 수량품의 구원성도에 대해 "과거의 일을 설하고 있는 듯하나, 멸후를 가
지고 본의(本意)로 한다. 과거의 일은 선례로서 설해져 있는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어서 335쪽)
천태도 이부분에 대해 "미래에 걸쳐 부처의 위대한 공덕력이 상주하여 중생
을 이익케 해간다고 밝혀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미래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데에 수량품의 본의가 있는 것다. 이것을
경문에 입각해서 확인해 보자.
먼저 "이와같이 나는 성불한 이래 심대하게 구원이니라. 수명은 무량아승기
겁이고"라고 있다.
이것은 수량품 서두부터 지금에 이르는 설법의 취지를 요약하고 있다. 즉 석
존이 부처가 되고 나서 오백진점겁이라는 때가 경과 했다. 그 위에서 구원의 부
처에 대해 "상주이고 멸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상주불멸' -- 이것이야말로 미래를 지향한 말이다. 三世(삼세)에 걸처 상주하는
부처이기 때문에 구도심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 어디에라도 부처는 출현
한다.
중생구제의 활동은 구원의 과거로부터 석존 在世(재세)의 현재 그리고 석존 멸
후의 미래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三世(삼세) 영원이다.
末法(말법)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삼세에 걸쳐 상주하는 진실한 부처를 밝
힌 것이 수량품이다.
無佛(무불)의 세상, 法滅(법멸)의 세상이라고 여겨진 末法(말법)에도 진실한
부처는 상주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아도 불법에서 말법을 설하는 것은 이른바 '종말론'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부채질하는 종말론
이 불법에 있을 리가 없다. 불법은 인간에게 생명의 근저로부터 안심을 주기 위
한 가르침이다.
계속해서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바의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
았으며 다시 上數(상수)에 倍(배)하느니라"라고 설해져 있다. 이 글에서는 수량
품이 미래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 더욱 명료해진다.

나의 보살의 수명은 영원하다고 밝힘

즉 석존이 구원에 보살도를 실천하여 성취한 수명은 오백진점겁부터 존속해 왔을
뿐만이 아니라, 다시 지금부터 미래를 향해 오백진점겁이라는 수에 배가하여 계
속 된다고 설해져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부처의 구제활동은 오백진점겁의 배가되는 장원한 시간에
걸쳐 다시 계속되어 간다. 미래 중생의 구제야말로 수량품이 본의라는 것은 여
기에서 분명하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이 경문에는 "本因妙(본인묘), 本果妙(본과묘)"라는 중요한
법문이 밝혀져 있다.
본인.본과란 구원의 성불의 인과를 말한다. 성불의 因(인)으로 된 것은 구원의
보살도이며 이것이 本因(본인)이다. 그 결과 成佛(성불)한 것이 本果(본과)이다.
본인이란 성불의 근본 원인이다. 행복의 본원이다. 구원에 석존이 실천한 수행
에 그것이 있다. 그것이 妙(묘)이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本因妙(본인묘)"라고
한다.
이 본인묘는 文上(문상)에서는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바의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다시 上數(상수)에 倍(배)하느니라"는 글에 나타나
있다.

本源(본원)의 생명을 여는 本因妙(본인묘)의 불법


이 글에서 "이룬 바의 수명은 아직까지 다하지 않았으며"라고 있는 것은 석존이
구원의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여 열었던 지혜의 수명이 무량이며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보살도, 즉 利他(이타)의 실천이야말로 지혜를 연마하고 복운을 여는 길이다.
'타인을 위해서'라는 풍부한 마음이야말로 끝없는 지혜가 열린다.
수행하는 석존을 九界(구계)와 佛界(불계)로 분류하면 석존은 구계의 중생이다.
그 구계의 생명에 원래 무량한 지혜의 수명이 갖추어져 있다.
그것이 구계의 생명의 구극의 모습이고 '묘'라고 하는 까닭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원의 묘한 생명을 여는 것이 불법의 목적이다.
또 本果(본과)란 구원의 부처가 본인의 수행으로 얻은 진실한 부처의 경애를
말하는데 그것이 헤아리기 어렵고 '묘'하기 때문에 本果妙(본과묘)라고 한다.
천태는 이것을 常樂我淨(상락아정)의 경지를 깊이 추구하는 것이라 말했다.
활짝 개인 넓은 하늘처럼 넓고 맑으며 게다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행복경애이다.
문상으로는 "나는 성불한 이래 심대하고 구원이니라. 수명은 무랭아승기겁이
고 상주이며 멸하지 않는다"는 글이 본과묘를 밝히고 있다. 구원에 본과를 성취
한 부처가 상주불멸이라고 여기에 설해져 있다.
요컨데 수량품의 본인.본과의 법문이란 구원의 부처에게는 본과인 불계의 생명
뿐만이 아니라 본인인 구계의 생명도 상주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구계의 생명이 상주이기 때문에 성불한 이후에도 구계의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행이 계속 된다.
구원의 진실한 成佛(성불)이라는 본과를 얻으면 본과의 보살행이 멈추는 것이
아니며 구계의 생명을 단절하고 어딘가 다른 부처의 세계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구계도 불계도 상주한다. -- 이 구원의 부처의 一身(일신)에 나타난 생명의 진
실한 모습에, 미래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남겨야 할 성불의 근본원리, 즉 십계
호구 一念三千(일념삼천)의 법리가 밝혀져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점이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본인 본과의 법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九界(구계)도 無始(무시)의 佛界(불계)에 갖추고 불계도 無始(무시)의 구계에
갖추어져서 참된 十界互具(십계호구) 百界千如(백계천여) 一念三千(일념삼천)이
니라"(어서 197쪽).
이 '무시의 구계' '무시의 불계'란 각각의 본인 본과를 말하며 그것이 구원의 부
처의 일신에 호구하고 있다. 그 십계호구 일념삼천의 생명이 상주불멸이다.
다만 문상에서는 깨달음을 열어 나타낸 부처(본과)의 생명에 본과만이 아니라 본
인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문상은 어디까지나 본과가 표면이다.
여기에 대해서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본인을 표면에 세우고 있다. 구계의 범부가
중심이다.
구제해야 할 말법의 중생이란 범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인묘를 나타내는
我本行普薩道(아본행보살도)의 文(문)을 주목하지 않으면 않된다. 즉 구원의
범부인 석존이 보살도를 실천하여 무량의 지혜의 수명을 성취한 그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것이야말로 바로 南無妙法蓮華經이다.
南無妙法蓮華經는 아본행보살도의 문저에 비침되어 있다.
대성인이 개목초에서 " 일념삼천의 법문은 단 법화경의 본문. 수량품의 문저에
잠겨져있느니라"(어서 189)고 하신 수량품의 文低(문저)란 바로 아본행보살도의
문저를 말한다.

신심의 일념의 妙로 빛나는 미래를 실현

구원의 범부 석존은 南無妙法蓮華經를 수행하여 성불했다. "因果具時(인과구시).
불가사의의 一法(일법)(어서 513쪽)이라고 말씀 하셨듯이 본인. 본과는 南無妙
法蓮華經의 일법에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因果一念이라고 말씀하셨듯이 南無妙
法蓮華經의 일법을 믿는 일념에 본인 본과가 같추어진다.
이 일념의 묘가 대성인의 本因妙(본인묘)의 불법의 極意(극의)이다.
또 일념삼천의 구극이다. 범부의 일념에도 本因(본인). 本果(본과)가 함께 갖
추어진다. 일념이 변하면 일체가 근저로부터 변한다.
본인, 본과를 일념의 생명으로 보는 문저 불법의 생명관은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삶을 가르친다. 즉 언제나 생명본원의 출발점에 서서 미래를 향한 새
로운 전진을 개시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들은 순간순간 행, 불행, 苦,樂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 현재 일순의
생명은 과거의 원인에 따라 나타난 결과이다. 이것은 비교적 쉽게 알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일순의 생명은 미래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일은 도리상으로는 지
극히 당연한 것 같으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깨닫기 어렵다.
어떠한 미래를 실현하는 가는 지금의 일념에 의한다.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순간에 일어난 생활의 진실을 끊임없이 미래의 원인으로 한다. 혹은 원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하는 것이 본인묘의 불법이다"
"어본존을 열심히 믿은 생활은 일상의 사건을 깨끗한 구원의 因(인)으로 하여
활동하는 것이며, 또 어본존의 공덕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생명력이 솟아오르므
로 그것이 결과로 될 때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생긴다"
본인.본과는 우리들의 일념에 갖추어져 있다. 인과구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활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가령 그것이 불행한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신심의
일념으로 구원의 本因(본인), -- 행복의 근원으로 해갈 수 있다. 깨끗한 생명
의 본원에서 출발해 갈 수 있다.
생명전체가 흔들리지 않는 행복경애로 향해 간다. 이것이 본인묘의 삶이다.
이 본인묘의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자.

末法(말법)의 본존은 본인묘의 석존(대성인)

본인묘의 마음은 인간의 존엄을 여는 실천에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이 수향품의 我本行菩薩道(아본행보살도)의 글이다. 我(아)란 앞에서 말했듯이 구
원에 보살도를 실천한 범부인 석존이다.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다. 결코 인간을 초월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구원이란
생명의 本源(본원)이고 생명의 본원에 되돌아간 구원의 범부가 본인묘의 석존이다.
이 본인묘의 석존을 본존으로 하는 것이 日蓮大聖人(니치렌대성인)의 佛法(불법)
이다.
구원에 있어서 본인묘의 석존은 즉 말법의 御本佛(어본불) 日蓮大聖人(니치렌대
성인)이시다. 久遠卽末法(구원즉말법)이다.
이것을 대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분명하다.
"지금 니치렌의 수행은 久遠名字(구원명자)의 행위에 芥子(개자) 만큼도 어긋나
지 않느니라"(어서 863쪽)
"구원의 석존의 수행과 지금 니치렌의 수행과는 개자만큼도 틀리지 않는 勝劣
(승렬)이니라"(어서 864쪽)
즉 "지금 말법에 있어서 니치렌대성인의 수행은 구원에 명자범부의 석존의 수행
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名字(명자)란 명자즉이란 말로서 묘법을 신수하는 범부의 位(위)를 말한다.
日寬상인도 본인묘의 석존즉대성인, 구원즉말법이라고 배견하는 이유에 대해
行位全同(행위전동) - 행과 위가 완전히 같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行(행)은 수행이고 묘법수지의 실천이다. 또 위란 명자범부의 위(位)이다.
다시 말해 행위전동이란 인간으로서 묘법을 끝까지 수지하는 실천이 구원과
말법에서는 완전히 같다고 하는 것이다.
묘법을 수지하는 인간으로서의 실천이 妙이고 불가사의하다고 할수 있다.
거기에 성불의 本因, 本果,즉 행복의 근본원리가 같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
이 본인묘이다.
그러므로 말법에는 본인묘의 석존, 즉 日蓮大聖人(니치렌대성인)을 본존이라고
배견해야 한다.

不輕菩薩(불경보살)이 걸어온 인간존엄을 여는 길

구원의 보살도란 무엇인가. -- 그 일단을 나타내는 것이 불경보살의 실천이다.
불경보살은 석존이 過去世(과거세)에 보살의 수행을 하고 있던 때의 이름이고
威音王佛(위음왕불)의 멸후 惡世(악세)에 출현했다고 법화경에는 설해져 있다.
이 불경보살에 대해 대성인은 "我(아)란 본인묘의 時(시)를 가르키느니라,
本行菩薩道(본행보살도)의 문은 불경보살이며"(어서 768쪽)이라고 말씀 하셨다.
불경보살의 실천은 본인묘의 석존의 보살도에 해당한다.
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깊이 그대들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며 禮
拜(예배)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共感(공감)에 입각한 실천이다.
'사람을 존경하다'고 하는 '인간의 존엄'을 여는 무상도의 실천이 구원의 보살
도에 통한다. 불경보살은 이 신념의 실천을 관철했다.
그러나 세상은 濁世(탁세)이다. 이 불경의 실천의 위대함을 알수 있을 리가 없
다. 아니 위대한 것에는 冷笑(냉소)를 보내고 자기의 약아빠짐을 부끄러워하지
도 않고 과시하며 위대한 체하는 인간이 많은 것이 濁世(탁세)이다. 그러한 愚者
들이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정의의 사람을 박해하며 보복한다.
불경은 몽둥이로 맞고 돌에 맞는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의 불경의 행동이
재미있다.
즉 돌에 맞은 불경은 잠시 피한다. 그러나 도망간 것이 아니다. 지팡이나 돌이
미치지 않는곳에 오면 되돌아 서서 다시 "나는 깊이 그대들을 존경합니다"라고
예배하는 것이다.
불경보살의 행동은 유연하다. 복종도 하지 않았고 무작정 맞서지도 않았으며
비굴함도 없다. 기를 쓰는 영웅심이나 비장함도 없다.
그러나 그 유연함 속에 강함이 있다.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믿는 철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신념을 관철했고 不退(불퇴)였다.
묘법을 수지하는 것은 신념의 실천의 異名(이명)인 것이다. 그것이 성불의 因
(인)이 되어 나중에 불경보살은 석가불로 태어났던 것이다.


마키구치선생님 - 대선은 보살의 行에 있다고


경쾌하게 끈기있게 그리고 인간속으로 - 이 불경의 실천이야 말로 성불의 본인
즉 구원의 보살도에 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속에서 묘법을 말하고 찬탄하는 실천이 자신의 묘법에 대한 信을 깊게 하
여 드디어는 本果에 이른다. 실천이야말로 妙이다.
마키구치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어떠한 생활법이라도 그것을 생활해보지 않은 자는 알수 없듯이 大善생활법은
보살행을 하지 않는 中小善의 생활자는 알수 없는 법이다. 行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심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살행을 실천해야만 진정한 신심을 알수 있다. 行이 있음으로써 신심의 깊은
의의와 무량한 공덕을 체득할수 있다.
本因의 삶 - 그것은 민중속으로 작업복을 입고 뛰어 들어가는 실천자의 인생이
다. 특별히 몸치장을 할 필요는 없다.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無作의 행동으로 사
람들에게 안심을 주고, 心田에 행복의 종자를 심어 간다. 그것이 본인의 보살행
이다.
대성인은 본인묘의 부처이다. 어본불이시지만 어디까지나 범부의 입장에서 보살
도를 실천하셨다. 시종일관해서 범부로서 싸우셨다. 凡夫卽極, 이것이 대성인 불
법의 精髓(정수)이다.
다쓰노구치의 발적현본 후에도 색상장엄한 부처와 같은 특별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흉중에는 구원원초의 법이 혁혁하게 빛나고 계셨다. 말법만
년을 위해 어본불로서 행동하셨다. 인간으로서의 구극의 모습을 나타내셨다. 이
것이 대성인의 발적현본이다.
우리들의 불도수행은 본과를 높이 우러러 보는 수행이 아니다. 수지즉관심이기
때문에 잠깐사이에 불계를 용현할수 있다.
그 불계의 생명을 근저로 하면서 굳이 구계로 향하는 것이 본인의 보살도이다.
소위 불계를 기조로 현실 구계의 사회에 뛰어 들어 가는 것이다.
즉 근행 창제라고 하는 자행과 묘법유포의 화타행을 끊임없이 왕복한다. 이 연
속행동 속에 불계를 나타내는 요체가 있다.
따라서 본인묘의 불법은 끊임없는 현실생활, 시대사회를 지향한 삶, 실천 속에
만 있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신심즉생활, 불법즉사회가 법리의 중핵
으로 자리잡고 있다.

드디어 지금부터다라고 연속행동을

지금까지도 기회있을 때마다 말했지만 니치준상인은 본인묘의 정신에 대해 이
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化導上의 모습을 판별하는 데만 사용하고, 자기 생활양식의 범위 안
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本因下種의 가르침은 죽어 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생활에서 유리된 佛法談義는 그것 자체가 어본불의
마음을 단절하고 있다.
니치준상인은 또 "本因下種이란 언제나 이제부터다라는 마음가짐이라 해도 좋
을 것이다"라고도 하셨다.
나도 항상 말해왔다. '더욱 더'라는 마음에 대성인의 본인묘 불법의 혼이 있
다고.
지금이다 이제부터다라고 어디까지나 현재에서 미래로 도전은 계속한다. 그것
이 본인묘의 인생이다. 여러분도 이러한 삶의 자세를 터득해 주시기 바란다.
본인묘의 혁혁한 태양이 떠오르면 숙업 등 과거의 인과는 별과 같은 것으로
서 급속하게 빛을 잃어간다.
도다선생님은 몇번이나 가르쳐 주셨다. -- 묘법에 귀의해 갈때 도중의 인과가
모두 사라지고. 구원의 범부가 출현한다고.
구원의 범부란 지용의 보살의 이명이다. 지용의 보살은 고뇌 하는 중생을 위해
스스로 악세에 태어난다. 스스로 因位의 입장에 서서 원하여 숙업을 갖고 태
어 난다. 그것은 숙업전환의 드라마를 연기하여 불법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한사람 한사람의 숙업의 차이는 있어도 신심을 근본으로 광
선유포에 매진하고 있을때 모든 것이 전중경수, 숙명전환으로 되는 것이다.
"지옥의 괴로움은 금방 사라지고"(어서 1000쪽)라고 말씀하셨다.
모법을 수지한 이상, 이미 죄장도 죄장이 아니다.
어본존을 수지하면 부처의 因行도 果德도 모두 우리들의 신상에 얻을 수가 있
다. 과거의 죄장은 모두 佛界의 대경애를 열어가는 열쇠가 된다. 번뇌는 즉 보
리이며 고난은 즉 안락으로 열수 있다.

본인묘의 정신은 무한한 희망, 무한한 향상

佛界(불계)에도 九界(구계)의 고뇌가 갖추어지고 또 구계의 현실에 입각해야만
불계도 나타난다. 十界互具(십계호구)라는 생명의 실상이 나타난다. 중요한 것
은 고난이 있어도 절대로 꺽이지 않는 것이다.
한탄과 의심 등의 약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제부터라는 강한 일념이
一念三千(일념삼천)의 법리에 준하여 三千 차원으로 회전해 무너지지 않는 행복
의 대경애를 가져온다.
괴로움이 있든 기쁨이 있든 오직 一心(일심)으로 오직 일생성불을 원하여 묘법
을 봉창해 간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때마다 일보 또 일보, 강한 마음으로
광선유포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간다. 그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이야말로
순간 순간 한없는 어본불의 대자비에 생명이 감싸여 가는 사람이다. 여기에
본인묘의 불법의 굉장한 제호미가 있다.
석존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쫒지 말라. / 미래를 섣불리 원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진 것이다. / 또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현재의 일을 현실 속에서 잘 간파하라. / 흔들림 없이 또 동요하지 말고
그것을 명백하게 안 사람은 / 그 경지를 더 한층 높여라.
오직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 마음을 다해 이루어라"라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현재의 일념이다. 결의이다. 과거의 業因業果
(업인업과)의 呪縛(주박)을 자기의 내발적인 힘으로 단절하는 것이 확실한 행복
의 궤도에 타는 것이 된다.
영원한 행복경애 최고의 행복을 지향해 항상 생명의 본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본인묘"의 신심이다. 본인묘의 정신은 무한한 희망, 영원한 향상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일 항상 본원의 출발점에 되돌아가 거기에서 새롭게 전진
을 개시하는 것이다. 근행 창제는 매일 구원원초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비법이다.
매일이 구원원초에서의 출발이다. 영원히 원점에서 출발하는 신심 -- 이것이
本因妙(본인묘)의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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