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편품 제2 강의

방편품 강의 1

by 행복철학자 2024. 6. 20.
728x90
반응형
SMALL

방편품 강의 1

 

[방편품 강의] 

 방편품에 대해  

 
 '만인을 부처의 경애로'가 부처의 소원
 법화경은 흉중(胸中)에 태양을 떠오르게 한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면 언제 어떠한 환경에도, 마음에는 쾌청한

하늘이 펼쳐진다.

 

5월의 푸르디 푸른 하늘처럼. 그리고 마음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면

국토도 또 상적광토(常寂光土)로 찬란하게 빛난다.
 누구나 흉중에 태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참으로 적다.

 '불계(佛界)'라는 자기 흉중의 빛을 가르친 경전이 법화경이다.
 '나 자신이 부처이다' '내 흉중의 태양을 보라' -

이것이 법화경의 진수이며 방편품의 메시지이다.


 석존은 모든 사람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부처'를 보았다.

자신이 깨달은 길을 누구나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인간은

모두 존귀하다'

'인간 이상의 인간은 없다'는 엄연한 도리 위에서

석존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법을 계속 설했다.


 석존은 방편품 후반에서, "부처가 출현한 목적은 중생 속에 있는

부처의 지혜 (불지견<佛知見>) '열고' '보이고' '깨닫게 하고'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했다.
 그리고 "모두 나와 똑같은 부처의 경애가 될 수 있다. 이 법화경을

설함으로써, 내가 옛날부터 세운 서원(誓願)을 만족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편품의 정신은 깊은 의미에서 '인간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법은 한 사람의 인간의 무한(無限)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불계라는 최고의 보배가 자신의 흉중에

있음을 자각시키고, 불계를 끌어내는 방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법은 끝없는 향상을 위한 길
 
자신의 내적인 보배를 깨달은 사람은 이번에는 타인의 보배를

깨닫고, 타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리고 타인을 촉발시키고,

타인에게 공헌하기 위한 '행동'으로 일어선다.


 
바로 그 속에서 자신의 보배가 연마된다. 자신의 가능성, 존엄성에

대한 확신이 깊어진다.

- 이러한 인간의 '끝없는 향상'을 위한 길이 불법이다.
 
사리불(舍利弗) 등의 성문(聲聞)도 이 방편품으로 깨달았다.

인간 속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서원하고 '민중에게 봉사하는 성문'

되었다. 참된 '불제자'가 탄생한 것이다.


 
사리불 등은 스승의 깊은 자비를 틀림없이 느꼈을 것이다.

자기 중심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의 마음에 지혜의 대광(大光)

쏟아져 들어와, 그 마음이 크게 열리고 넓혔다.
 
그리고 이 광대무변한 부처의 경애로 이끄는 일이 부처의 본의

(本意)임을 알았다.

 

이승(二乘: 성문승 * 연각승)이나 삼승(三乘: 이승과 보살승)

목표로 하는 것은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부처의 경애로 이끄는 이 가르침을 "개삼현일(開三顯一: 삼승을

열어 일불승(一佛乘, 성불의 교법)을 나타낸다.)' 이라고 한다.

<2>  개삼현일(開三顯一)이야말로 법화경의 전반, 적문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중에서도 개삼현일의 골격을 나타낸 방편품은 적문 전체의

기둥이 된다.
 '
방편'이란 불법상에서 부처가 중생을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절묘한 수단과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는 품이 방편품이다.

그리고 '방편'의 깊은 의의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강의하고자 한다.
 
우리가 독송하는 경문은 이 방편품의 첫머리 중 일부인데, 이 일품

(一品)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 경문의 내용을 간결하게

소개하자면, 석존은 먼저 제불이 깨달은 지혜가 심심무량(甚深無量)하다고

밝히면서 '사리불 등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라고 설한다.

 

그리고 석존 자신이 그 지혜를 비유 등을 이용해 중생에게 절묘하게

설했다고 말한다.
 
마지막에 제불의 지혜란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밝히고,

우리가 독송하는 범위가 끝난다.
 
이 제법실상이야말로 '일체중생 모두, 부처이다'라는 사고를 나타낸

법리(法理)이다.

여기에서 만인성불을 위한 길이 이론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독송하는 범위는 방편품 중에서도 진수(眞髓)

되는 부분이다.

 

[본문]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方便品 第二(방편품 제이)

묘 호 렌 게 쿄   호 벤 폰 다이니


爾時世尊       從三昧        安詳而起      告舍利弗         諸佛智慧      甚深無量

니 지 세 손   주 산 마이   안 조 니 키   고 샤 리 호쓰    쇼 붓 치 에   진 진 무 료

이시세존       종삼매       안상이기       고사리불          제불지혜       심심무량 

其智慧門       難解難入             一切聲問辟支佛              所不能知

고 치 에 몬   난 게 난 뉴    잇 사이 쇼 몬   햐쿠 시 부쓰   쇼 후 노 치   

 기지혜문      난해난입        일체성문        벽지불            소불능지
 
 그 때에 세존(世尊)께서 삼매(三昧)로부터 안상(安詳)히 일어서서 사리불

(舍利弗)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불(諸佛)의 지혜는 심심무량(甚深無量)

하니라.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難解難入)이니라. 일체(一切)

성문(聲聞)과 벽지불이 쉽게 알지 못하는 바이니라.
 
[통해]
 그 때에 꿈쩍도 하지 않고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어 있던 석존은

서서히 엄숙한 태도로 일어서서, (지혜 제일이라고 일컫는) 사리불에게

이렇게 설하셨다.
  "모든 부처의 지혜는 매우 깊어서 헤아릴 수 없다.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일체의 성문이나 벽지불(연각)

지혜가 있다 해도 (이 부처의 지혜를) 헤아릴 수 없다.
 
 [어역]
 세존(世尊) : 산스크리트어인 '바가바트(bhagavat)를 변역한 말.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 부처를 가리킨다.
 삼매(三昧) : 산스크리크어인 '사마디(samadhi)'를 음역(音譯)한 말.

선정(禪定) 등으로 번역한다. 마음을 한곳에 정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리불(舍利佛) : 산스크리트어인 '샤리프트라'를 음역한 말.

신자(身子)라고도 번역한다. 석존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 한 사람.

지혜제일이라고 일컫는다. 석존의 교단이 발전하는 데 핵이 되었다.

개삼현일의 법을 듣고 영해(領解)했다.
 성문(聲聞) :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불제자(佛弟子)를 말한다.
 벽지불(辟支佛) : 산스크리트어인 '프라티에카 붓다(pratyeka-buddha)

'를 음역한 말. 독각(獨覺), 연각(緣覺), 인연각(因緣覺)이라고도

번역한다. '스스로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자연현상 등의 연()

만나 불법의 법리의 일분(一分)을 혼자 스스로 깨닫는 자를 말한다.

 

 [강의]
 드디어 법화경의 설법이 시작된다.
 이 첫머리 부분에서는, 무량의처삼매에서 힘차게 일어난 석존이

사리불에게 "제불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대들은

알지 못한다."고 정확히 잘라 말한다. 처음부터 몹시 긴박한 장면이다.
 먼저 "그때"란 어떠한 때인가.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강의 하셨다.
 "'그때'라는 때는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2, 3, 몇시, 봄철 등과

같은 시간과는 다른, 불법상에서 사용하는 때이다.
 다시 말해 '그때'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습니다'라는 것과는 다르다. '중생이 부처를 느끼고 부처의 설법을

듣고 싶다고 느꼈을 때, 부처가 그에 응해 출현하여 설법한 때라고 뜻이다"
 부처의 설법에는 시() * () *() * ()이라고 네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다. 불법에서 말하는 "(<>)"

가르침을 구하는 중생의 '()' '()'하여 부처가 출현하고

'()을 설하는 '', 결국 부처와 중생이 만나는 ''이다.
 석존이 서품(序品)에서 삼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사리불 등

이승을 비롯하여 제자들의 구도심이 최고조에 달했음에 틀림없다. '

세존은 어떠한 가르침을 설하실 것인가'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어야지' '나의 마음에 깊이 새기자.' - 불타오르는 정열을

억누르면서 모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제(師弟) '인간구제의 드라마'가 개막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다. 석존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일체중생을

성불시키는 구극의 가르침 '법화경'을 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방편품의 "그때"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전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일어선 ""이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끝까지 구도하겠다고 일념을 정한 ""이다.

사제의 마음과 마음이 깊이 교류하는 순간이다. 인간구제를 위해 살아

가는 '사제의 드라마'가 개막하는 순간이다.
 부처는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를 안다.
 ''를 기다리고, ''를 간파하며 ''를 만든다. 그리고 ''에 맞는

법을 설한다. 이것이 부처의 지혜이며 자비다.
 '민중이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 가. 민중을 행복하게

하려면 언제 어떠한 가르침을 설해야 하는가. 그것을 항상 사색하고

때에 따라 자유자재로 법을 설한다.' - 그것이 부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때를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것이기도 하다. 부처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달한 지도자이다.

'()의 교사'이며, '인간학(人間學)의 달인'이다.
 부처의 위치에서 말하면, '그때'란 바야흐로 중생을 성불시킬

투쟁을 개시의''이다. 그리고 제자들로서는 그 부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굳게 자각한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때' '스스로 정하여 일어서는 때'
 대성인은 ''의 중요성에 대해서 "불법을 배워는 데는 먼저 때를

배워야 한다." (어서 256, 통해)고 지적했다. 또 불법의 때를

기축(基軸)으로 해서 설해지고, 때에 맞는 법이 유포(流布)된다고

밝히셨다. 그리고 말법이야말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대백법(大白法)이 넓혀지는 ""라고 선언하시고 정법홍통(正法弘通),

민중구제의 투쟁을 일으키셨다.
 다시 말해 문저불법의 관점에서 말하면 "그때"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전 인류를 구제하는 대투쟁을 개시하신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성인 문하가 스승에게 서로 호응하여 스스로 광선유포에

일어서는 때가 "그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실천에서

보면 어본존에게 기원하고, 자신이 '결의'하여 '자각'한 때 이외에

"그때"는 없다고 강조하고자 한다.
 자신이 정하고 기원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환경은 조금도 변화지

않는다.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그때"가 되지 않는다.
 ''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념이다.
 '그때' '우리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때'이다. 강한 신심으로 장대한 광포의 무대에

나서는 때가 '그때'이다.
 문호 괴테가 이렇게 썼다.
 "순간이 인간의 생애와 그 운명 전체를 결정하다"
 '! 지금부터 투쟁하자!' -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정한

순간이 '그때'이다. 이 순간부터 '운명'이 바뀐다. '인생'이 열린다.

'역사'가 시작된다.
 이것이 본인묘(本因妙)의 정신이다. 일념삼천의 원리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의한 ''

바로 '그때' - 사명의 ''이다.

 

 근행 * 창제가 현대의 '삼매'
 방편품 첫머리에서, 석존이 삼매에서 조용히 일어나 법화경을

설하기 시작한다. '삼매'란 선정(禪定)을 말하며, 일념을 정하고

명경(明鏡)처럼 아주 맑은 부동(不動)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석존은 서품 첫머리에서, 이 삼매에 들어가 서품이 끝나는 동안 선정을

계속한다. 말법에서는 삼매나 선정이라고 해도 산림(山林)에 틀어박혀

좌선이나 명상 등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대성인은 이것을 때에 맞는

실천이 아니라고 부정하셨다. 대성인은 민중을 구제하고자 현실

사회 속에서 투쟁하셨다.
 말할 나위도 없이 현대의 참된 '삼매' '선정'이란 근행 * 창제의

실천이다. 우리들은 '산림에 틀어박힌 선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근행 * 창제를 근간으로 매일매일 생명을 연마하고, 무량한 지혜와

용기를 용솟음치게 하여 사회로 뛰어들어간다.

그것이 우리가 행하는 수행이다.
 명상을 위한 명상, 선정을 위한 선정이라면 본말전도이다.
 유마경(維摩經)에도 설해져 있지만, 나무 밑에서 명상하는

것보다 현실사회에서 진리를 간직하고 활약하는 것이 참된 선정이다.
 마하트마 간디에 어떤 사람이 명상생활을 권했을 때, 간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굳이 동굴에 은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동굴을

등에 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민중 속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며 끝까지 살았던 간디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말해주는 에피소드이다.
 불교는 사람들의 괴로움에 눈을 닫아버린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을 자각시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불도(佛道)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불도수행은 사회의 모순에서 눈을 돌리고  '무념무상(無念無想)'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속 지혜를 발휘하여 자타의 행복을 위해,

좋은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일념을 다해 투쟁하는 모습 속에

참된 선정의 정신이 있다.

 

 생명의 원점에서 나날이 발랄하게 출발
 그런데 석존이 들어간 삼매는 "무량의처삼매"라는 이름의 삼매이다.

무량의처는 모든 가르침의 기초라는 뜻이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는

"무량의는 일법(一法)에서 생긴다." (법화경 25)라고 씌어 있다.
 석존은 그 위대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일어나 법화경을 설했다.
  '일법'을 명확하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밝히신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시다. 우주 근원의 일법을 만인에게 열고,

만인이 실천할 수 있도록 나타내셨다. 세계를 향해, 인류를 향해….
 대성인이 전 민중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를

설하시기 위해 힘차게 일어서신 모습이야말로 "삼매에서 안상하게

일어서서"의 문저의 의미이다. 또 우리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말하면 '일법'에서 '무량의'가 생긴다는 것은 바로 이 묘법을

신수하면 부처의 무량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근행 * 창제로 우리는 최고의 지혜를 빛내고, 현실에서 인생승리를

향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나날이 생명의 원점에서

발랄하게 출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 오늘도 투쟁하자' '내일도 열심히 노력하자'

결의를 담아 기원하고 일어서는 학회원은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 "삼매에서 안상히 일어서서"의 경문을 행하고

있음을 확신하기 바란다.

 

 법화경은 '무문자설'의 설법
 삼매에서 일어선 석존은 누군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법을

설하기 시작했다. 질문이 없는데 부처가 자신의 의지로 법을

설하는 것을 '무문자설(無問自說)'<3>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질문할 수도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법문을 석존은 스스로 유연하게 설하기 시작했다. '설하지

않고서는 잠자코 있을 수 없다.' - 여기에 지혜와 자비의 용솟음이 있다.
 법화경이 '무문자설'의 형태로 설해진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제경(諸經)은 부처의 진의(眞意)를 다 밝히지 않고 중생의

기근(機根)에 맞춰 설한 '수타의(髓他意)'의 경이다. 이에 비해

법화경은 부처 자신이 깨달은 그대로 진실한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수자의(隨自意)'의 경이라고 일컫는다.
 
 대성인의 입종선언(立宗宣言) 또한 '무문자설'이셨다. 입종에

즈음해서 "말하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나리라고 알았노라." (어서 200)라고 말씀하셨다.

묘법을 넓히면 반드시 박해를 당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남묘호렌게쿄를

설하셨다. 대성인은 생애에 걸쳐 '수자의'의 실천으로 투쟁하셨다.
 우리들의 실천으로 말하면, '수자의'란 위대한 묘법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찬탄의 마음'이다.

묘법을 찬탄하는 일이야말로 법화경 독송의 근본이다.
  '일문일구(一文一句)라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수력홍통(隨力弘通)'의 자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이야기한다든지,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좋게 생각할 것이라든지 하는 사고방식은 '수타의'이다.
 넓게 말하면 '무문자설' '수자의' '주체성'이고 '자발능동'이다.

소박해도 좋다. 말솜씨가 없어도 좋다. 상대방을 구제하겠다라는

일념으로 열심히 기원하고, 불법의 위대함을 자신의 말로 확신을

갖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법화경의 정신이다.  '학회정신'이다.

 

 입을 열자마자 광대한 불지를 찬탄
 석존은 입을 열자마자 사리불에게 "제불의 지혜는 심심무량하다.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그대들 성문이나

벽지불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설한다. 부처의 위대한

지혜를 찬탄하는 말씀이다.
 '제불의 지혜'란 부처의 내면에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이다.

그 제불의 지혜가 '심심무량(甚深無量)'하다고 찬탄했다.
 '심심(甚深)'이라고 찬탄하는 이유는 부처의 지혜가 생명 근저의

진리까지 깊이 도달했기 때문이다.  '무량(無量)'이란, 지혜의

빛이 널리 일체(一切)를 비추기 때문이다.
 부처의 지혜는 종()으로 높고 깊으며, ()으로 널리 생명의

모든 것을 비추어 나타낸다. 그러므로 부처의 경애는 광대심

원하다고 설한다. 천태는 이것을 "뿌리가 깊으면 가지는 무성하다"

"수원(水源)이 멀면 강의 흐름도 길다"고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부처만이

위대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부처와 똑같이 위대한 지혜를 생명에 빛나게

해서 행복해지기 바란다.' - 이렇게 권하는 것이다.

 

 '지혜'야말로 행복의 원천
 
지혜야말로, 영지(英智)야말로 행복해지는 길이다. 괴로움의 

근본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하는 것은, 돈도 처세술도

지위도 아니다. 우리 생명에 본디 갖춘 영지(英智)를 여는 수밖에 없다.
 
민중의 마음에 최고의 영지를 열게 하고,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대도(大道)를 걷게 한다. 그것이 법화경의 목적이다.
 
대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 (어서 1173)
 
그러므로 입을 열자마자 먼저 최고의 영지인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신 것이다.
 
다음에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難解難入)이니라"라는

문구도 부처의 지혜를 찬탄한 것이다. 그러나 찬탄하는 각도가

앞에 나온 부분과 조금 다르다.
 '
지혜의 문'은 부처의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문이다.

부처가 여러가지 가르침을 설하는 것도 이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처은 법화경 이전(以前)에 사람들의 갖가지 기근에 응해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설했다. '인생은 고()이다' '일체(一切)

무상(無常)이다' '번뇌를 멸각(滅却)하면 안락(安樂)하다'

'연기(緣起)를 깨달아라' 등등.
 
이처럼 중생의 갖가지 기근에 응해서 적절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부처의 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가르침 자체는

부처의 목적이 아니었다. 부처의 목적은 지혜의 길, 성불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성문(聲聞)과 벽지불(연각)이라는 이승(二乘)의 지혜로는

그러한 부처의 목적을 알 수 없다. 가르침의 내용 자체는 일단

이해할 수 있어도, 무엇을 위해 설하셨느냐를 알 수 없다.
 
무상관(無常觀)이라든가 번뇌의 멸각 등 각각의 가르침에

만족한다면 그것을 설한 부처의 지혜의 세계로는 들어갈 수 없다.

말하자면 문 앞에서 멈춰 버리는 셈이다

그러므로 난해난입(難解難入)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신심'이 부처의 경애에 이르는 ''
 
이상이 문상(文上)의 의미이다. 도다 선생님은 이 경문(經文)

문저(文底)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읽으셨다.
  "
제불(諸佛)의 지혜는 심심무량하다"는 남묘호렌게쿄의

지혜가 심심무량하다는 말이다.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이니라"

어본존을 향한 '신심의 문'이다. ()으로써 지혜를 대신하기 때문에

'지혜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문이 난해난입이다."
 
대성인이 "지혜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어서 725)라고

말씀하셨듯이 남묘호렌게쿄에는 모든 부처의 심심무량한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남묘호렌게쿄의 지혜로 들어가는 문이란 '신심의 문'이다.

대성인은 "()이란 신심을 말함이니"(어서 7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본존을 믿고 대성인의 말씀 그대로 행학(行學)의 실천에

힘쓴다면 '이신대혜(以信代慧: 신심으로써 지혜를 대신한다)'

원리에 따라 최고의 행복경애를 열 수 있다. 이것이 '신심의

'으로 들어가 일생성불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거친 파도를 만나면, 그 신심을 관철하기

어렵다. 신심이 지혜의 문이라는 사실을 잊고 우치의 마음을

일으켜 거친 파도에 번농(飜弄)당하기도 한다. ()를 두려워하고

()에 안주하고 만다. 그런 뜻에서 '신심의 문'도 역시 난해난입다.
 
그래서 대성인은 "고는 고라고 깨닫고 낙은 낙이라고 열어서

락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계시라.

" (어서 1143)라고 말씀하셨다.
 
남묘호렌게쿄는 모든 부처의 지혜의 원천이다. 그리고 근행 *

창제는, 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 부처의 생명이라는 대해(大海)에서

지혜를 퍼내가는 '원초(元初)의 의식'이다.

 

 이승의 지혜를 초월하여
 "
일체(一切)의 성문과 벽지불은 쉽게 알지 못하느니라."는 경문은,

석존이 사리불에게 '부처의 광대한 지혜는 성문과 벽지불 다시 말해

이승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사리불은 석존의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이라 불리는 성문이다.

지혜라면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가장 우수한 지성파이다.

그러나 석존은, 그 사리불의 지혜로도 부처의 지혜를 알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런데 석존이 설법을 시작하자 사리불 뿐 아니라 모든 성문이

180도 전환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부처의 지혜를 체득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석존에게서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고 인정받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이승작불(二乘作佛)이다.
 
성문들에게 이렇게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석존의 설법을 듣고,

성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  그것은 비유품 제3

"이신득입(以信得入: 신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법화경 198)이라는

한 구절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성문들은 자신의 작은 지혜로서가 아니라 '()'으로써

부처의 무상(無上)의 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불법에서 '()'이란 '맑은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이다.

의심, 불안, 후회 등 마음의 암운(暗雲)을 걷어내고, 위대한 것에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인간생명의 작용이다.
 '
', 소우주인 자신이 대우주를 느낄 수 있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힘, 다시 말해 신력(信力)으로써 성문들은 광대한 불지(佛智)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용수(龍樹)나 천태도 "불법은 바다와 같다. 다만 신()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다."고 설했다.

 

 민중 속에서 '투쟁하는 제자의 탄생'
 
석존은 성문들을 대상으로 한 법화경 전반(적문)의 석존의 설법에서,

성문들에게 각별히 깊은 신력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존은 방편품에서 사리불에게 "지금이야말로 마땅히 대신력(大信力)

일으킬지어다" (법화경 111, 통해)라고 강하게 신()을 촉구하셨다.
 
그러면 신()으로써 부처의 지혜의 세계를 들어간 성문들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성문들 자신이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말했다.
 "
우리들은 지금에야 참된 성문이 되었나이다. 불도(佛道)의 소리로써

일체(一切)의 사람들에게 듣게 하겠나이다." (법화경 235, 통해)
 
다시 말해, '가르침을 듣는 성문'에서 '가르침을 말하는 성문'으로,

'사람들 속에서 불법을 이야기하는 성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성문의 다른 의미는, 스승인 부처에게 자신의 구제

(자리<自利>)를 바라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말하면, 위의 말은 '구제받는 제자'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제자', '

스승과 함께 싸우는 제자'로의 전환했음을 말한다.
 
또한 이승(二乘)은 자신이 얻은 일분(一分)의 깨달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조그만 깨달음에

집착하는 이승'에서 '무상(無上)의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는 진정한

이승'으로 소생한 것이다.
 
성문들이 되살린 것은 요컨대 '인간에 대한 신뢰'이다. '민중에 대한

존경'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서

'빛나는 불성(佛性)'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신信)'으로써 들어간

광대한 불지(佛智)의 힘이자 공덕이다.

 

 '벗을 구제하는' 우리야말로 현대의 사리불
 
법화경에서 '지혜'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말이 아니다.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강한 마음' '넓은 마음' '깊은 마음'에서 나오는 '인간성'이고,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성인은 "현명함을 사람이라고 하며" (어서 1174)라고

말씀하셨다. 또 훼예포폄(毁譽褒貶)에 흔들리지 않고, 묘법을

근본으로 확고한 삶의 자세를 관철하는 사람이 '현인'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어서 1151, 취의)
 
캐나다의 어느 시인도 이렇게 말했다.
 "
무지(無知)한 사람일수록 남을 경멸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포용력이 있는 법이다."
 
또 문저(文底)에서 말하면, ()으로써 부처의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 투쟁하는 제자가 된 '사리불'의 모습이야말로, 부처의 지혜의

당체(當體)인 남묘호렌게쿄를 신수하고, 광선유포에 매진하는

대성인 문하의 모습이다.
 
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
지금 니차렌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모두 사리불이니라." (어서 722)
 
벗과 대화하며 벗을 구제하기 위해 진지하게 묘법을 봉창하며

온갖 지혜를 발휘하는 여러분이야말로 현대의 사리불이다.

 

 
728x90
반응형
LIST

'방편품 제2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편품 강의 2  (1) 2024.06.20
방편품 강의 3  (0) 2024.06.20
방편품 강의 4  (0) 2024.06.20
방편품 강의 5  (0) 2024.06.20
방편품 강의 6  (0)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