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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 강의 6
[본문]
舍利弗. 如來能. 種種分別. 巧說諸法. 言辭柔軟. 悅可衆心. 舍利佛.
샤 리 호쓰 뇨 라이 노 슈 주 훈 베쓰 교 셋 쇼 호 곤 지 뉴 난 엣 카 슈 신 샤 리 호쓰
사리불. 여래능. 종종분별. 교설제법. 언사유연. 열가중심. 사리불
取要言之. 無量無邊. 未曾有法. 佛悉成就.
슈 요 곤 시 무 료 무 헨 다이 이치 케 우 난 게 시 호
취요언지. 무량무변. 미증유법. 불실성취.
사리불이여, 여래는 능히 종종으로 분별하여 절묘하게
제법(諸法)을 설하고,
언사는 유연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가(悅可)케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요(要)를 취해서 이것을 말하면 무량무변
미증유의 법을 부처는 모두 성취하셨느니라.
[통해]
사리불이여, 여래는 많은 법을 여러가지로 잘
구별하여 절묘하게 설하신다.
말은 부드러워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사리불이여, 요점을 말하면, 헤아릴 수도 없고 끝이
없는 일찍이 없던 법을 부처는 모두 성취하셨다.
[어역]
분별(分別) : 여러가지 사상(事象)을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
연사유연(言辭柔軟) : 부처는 부드럽고 온화한 말씨,
목소리, 마음을 말한다.
[강의]
부처의 광대한 지혜를 찬탄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곳은 여래가 사람들의
이해(理解)와 경애에 응해서 가르침을 절묘하게 설했던 점,
부처의 말은 부드러워서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점을 돌이켜 보는 부분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여래가 '헤아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일찍이 없는 법'을
수지했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방편품에서 석존은, 첫머리부터 이곳까지 '미증유의
법'에 대해 세번 언급했다.
세번 모두, 부처가 모든 중생의 고뇌에
응해 설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불(諸佛)의 지혜(智慧)'가 풍부하고 깊기
때문이며, 부처가 득(得)한
'일찍이 없는 법'은 그만큼 광대하다고 했다.
이 방편품에서, 석존이 사리불에게 똑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체의 성문, 벽지불에게 '제불의 지혜'는 알 수 없는
'심심무량한 법'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지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처는
어떻게든지 사리불 등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부처는 '일찍이 없는
대법(大法)'이 존재한다고 되풀이하여 설했다.
사리불 등이 자신의 '작은 지혜'에 만족한다면,
부처의 '광대한 지혜'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는, 부처의 지혜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간절하고 정중하게 몇번이고 설명했다.
'한번 설명했으니 이제 충분하다' - 이것은 무자비다.
상대방의 생명이 바뀔 때까지
계속 말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다.
단지 자기만족에 그친다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틀림없이 석존도 한마디 한마디를
말하면서 사리불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 있었을 것이다. 제불의 지혜를
거듭 찬탄하면서, 사리불의
흉중에 위대한 구도심이 생기기를 기다렸다.
사리불 쪽에서 보면, 그때까지도 석존의 위대함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불지혜의 거대한 스케일에
틀림없이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켜졌을 것이다. 드디어 사리불도 구도심이 불타올랐다.
그 '일찍이 없는 법'을 듣고 싶다는, '일찍이 없었던
구도심'이 불타오름을 느꼈다.
상대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며
"언사유연(言辭柔軟)'이란, 듣는 사람에게 말이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온화함 속에도 늠름하고 확신 있는 울림을 담은 말.
이것이 '언사유언'이다.
그러한 말로 사람들을 환희하게 하여,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타의(髓他意)의 가르침에 대해 말한 부분이지만,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유연'이란 단지 부드럽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상대방에게 알랑거리는,
단지 듣기만 좋은 말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상대방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한 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실한 행복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행복을 끝까지 바라는 말'이야말로 설령
강한 어조라 해도 '언사유연'이 된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령 강언(强言)일지라도 남을 구하면 실어(實語), 연어(軟語)이니라.
설령 연어일지라도 남을 손상함은 망어(妄語), 강언이니라. 당세(當世)의
학장(學匠) 등의 법문(法門)은 연어, 실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지만
모두 강언, 망어이니라. 부처의 본의(本意)인 법화경에
배반하기 때문이로다." (어서 890쪽)
-'설령 강한 말일지라도 남을 구하면 진실한 말, 부드러운 말이 된다.
설령 부드러운 말일지라도 남을 손상시키면 거짓말, 강언이다. 사람들은
지금 시대의 학자들이 말하는 법문을 두드러운 말.
진실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두 강한 말, 거짓된 말이다. 부처의 본의(本意)인
법화경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공손한 말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사악(邪惡)한 말이 있다.
반대로 강한 말일지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고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이다.
달콤한 말에는
위험이 있는 법이다.
부드럽게 또 강하게, 예의와 성의와 확신으로 말하라
정말로 유연한 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표면상으로
강한지 부드러운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담긴
내용에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자애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지금의 사회는 '실어(實語)'가 적은 사회이다.
이해타산를 따지는 말,
남에게 상처 입히는 말, 향락적인 농담뿐일지도 모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상대방의 마음 오저에까지 스며드는 '진실한 말'이 없다.
'진실한 말'이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말이다.
자신의 신념에서 하는 말,
자신의 인생을 건 말이야말로 '진실한 말'이다.
또 '살아 있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은 '생기 있는 마음'에서 나온다.
닛코 상인은 '유희잡담(遊戱雜談)'을 훈계하셨다.
도다 선생님도 "신(信) 없는
언론은 연기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결론으로 말하면
'언사유연'이란 성의를
달리 표현 한 말이다. 성실하고 진지하며 예절이 있다.
게다가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전하는 '말'이야말로 "언사유언"이다.
"몹시 거친 말은 그 근거가 약하다는 증거"라고
말한 시인도 있다. 자신감이
있으면 정중한 말이 나온다.
안으로 넘치는 확신을 간직하면서 여유롭고 침착하게
그리고 유머를 잊지 않는
당당한 대화야말로 불법자(佛法者)의 '무기'이다.
말이 문란해지는 것은 사회가 혼란해지는 징조다.
'실어(實語)'가 없는 시대에서,
'대화'를 기조로 한 우리의 운동은 사회의
커다란 희망이 되고 있다.
신심의 힘은 모든 것을 기쁘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이다. 남을
격려하고 힘을 주는 사람이
자도자의 사명이다. 절대로 사람을 질타하면 안 된다.
"중생의 마음을 열가(悅可)케 하느니라."는
석존이 '언사유언'의 설법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마음으로 이해하게 했다
(열가시켜다)는 뜻이다.
리더는 확고한 신념을 토대로 한 진심 어린
'유연한' 말로 모두를 치하하고,
모두의 피로를 풀어주고, 모두를 안심시키고,
모두의 의문을 풀어주어
모두에게 희망을 솟게 해야 한다. 그것이 투쟁이다.
만약에 사람을 압박하거나,
몰아세운다면 지도자로서 실격이다.
경문을 위배하는 일이 된다.
방편품의 이 경문은 일단은 이전경의 설법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
석존은 갖가지 기근과 갖가지 고뇌를 가진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각자를
기쁘게 하고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갖가지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남의 평가에 사로잡혀 자신감을 상실하는
사람에게는 "무소의 뿔처럼
오로지 홀로 가라."라고 가르치고, 한편 자기 혼자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벗과 사귀어라. 좋은 벗과 친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쳤다.
또 사람들이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번뇌를 극복하라."라고
가르친 석존은, 향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금욕적인 수행을 나타냈다.
한편, 단식 등 극단적인 금욕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행을 그만두고
중도(中道)를 걸어가라고 타일렀다.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대방에 응해 '
이렇게 하면 더욱 좋아진다'고
가르치고, '열가'시키면서 향상시킨다는 석존의
마음은 똑같다. 이렇게
설한 수많은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 이전경(爾前經)이다.
그런 다음에, 지금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상대방이
즉시 아느냐 모르느냐는
별도로 하고, 근본적으로 행복해지는 법 - 묘법을 설했다.
부처가 수자의(隨自意)로 법을 설했으므로, 법을 들어도
처음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경문에는, 사리불 자신도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된다는 방편품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는 너무나 믿기
어려워 "마(魔)가 부처가 되어
내 마음을 뇌란시키는 것이 아닌지 하고 생각했다"
(법화경 153쪽, 취의)고
나중에 술회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다.
우리도 사리불의 이 말을 웃어넘길 수는 없다.
남묘호렌게쿄를 듣고 즉시
훌륭함을 알아챈 사람이나, '열가중심(悅可衆心:
중생의 마음을 열가케 함)이다.
기쁘다.' 하고 느낀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반드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환희 중의 대환희'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묘법의 설법이야말로
진정한 '열가중심'이다. 문저에서 말하면,
우리 생명은 어본존의 공덕으로
기쁨에 가득 차게 된다.
괴로움을 대환희의 인생으로
신심을 해도 현실의 인생에서 괴로운 일, 슬픈 일,
언짢은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로 반드시 '
열가중심'의 경애를 맛볼 수
있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이다. 신심으로
나아가면 '괴로운 인생'을
'대환희의 인생'으로 반드시 바꿀 수 있다.
도다 선생님은 '열가중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10년 동안 신심을 착실히 하면, 그 사람의 생명은
실로 청정한 생명이 된다.
피부, 눈의 모양새,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유화하고 청정하게, 그러면서
위엄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것이 어본존의 공덕이다. 그렇게 되면
열가중심,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그렇게 된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상쾌하기 때문에 기쁠 수밖에 없다.
기뻐서 언제나 웃음이 있고, 언제나 명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장사를 하면
번창하게 된다. 물건을 살 때 같은 물건이라면 그 가게에 가서 사게 된다.
그것이 열가중심이다."
제목으로 닦인 생명에서 차분히 우러나오는 청정한 기쁨. 말하자면
'괴로움마저도 벗으로 삼고' 능숙하게 사귀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기뻐하는 달인(達人)의 경애이다.
대성인은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 (어서 1143쪽)라고 말씀하셨다. '고락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에 깊은 의미가 있다.
노고가 없으면 인생의 맛도 없다. 사람은 노고에서 배우고 노고에서
양분을 얻고, 기쁨의 꽃을 피운다. 괴로움과 기쁨은 표리일체이다.
이 진리에 눈뜨는 곳에 참된 인간의 강함, 인생의 깊이가 있다.
문호 톨스토이도 고뇌와 맞서 계속 투쟁했다. 교회의 권위에 '파문'당했을 때도
유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불타오르는 투쟁의 일념이 있었다. 그런 톨스토이의 결론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기뻐하라'라는 신조이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이다. 하늘을 향해서
태양을 향해서, 별을 향해서, 풀을 향해서, 수목(樹木)을 향해서, 동물을 향해서,
인간을 향해서 기뻐하는 편이 좋다."
우리는 '모든 것은 기쁨으로 바꾸는' 경애가 되기 위해 신앙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
강한 사람은 장해마저도 활용한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난(大難)이 오면 강성한 신심은 더욱 더 기뻐하느니라" (어서 1448쪽)
"현자(賢者)는 기뻐하고 우자(愚者)는 물러남" (어서 1091쪽)
괴로움이 있으면 있을수록 '경애를 여는 기회'라고 정하고, 더욱더 기뻐하며
용감하게 전진한다. 벗에게는 안심을 주면서 자신은 일체를 참고 빙그레
웃으며 투쟁한다. 이 사람이 불법자이다. 그런 사람이 '열가중심'의 인생이 된다.
강하게 끝까지 살아가자.
"대리석 덩어리는 약자가 걸을 때는 방해가 되지만, 강자에게는 인도(人道)의
디딤돌이 된다"(칼라일)는 말이 있다. 강한 사람은 장해마저도 유리하게 활용한다.
강하면 강할수록 인생은 즐겁다. 생명력이다. 정신력이다. 그 근본은
신력(信力) * 행력(行力)이다.
대성인은 '의리주(衣裏珠)의 비유'를 들어, 가난한 남자가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을 문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나의 마음이 본래의 부처라고 아는 것을 즉 대환희(大歡喜) 라고 이름한다.
소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 중의 대환희이니라" (어서 788쪽) -
'처음으로 자기자신의 생명이 본디 부처라고 깨닫는 것을 대환희라고 한다.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일이야말로 환희 중의 대환희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적(內的)인 행복'이다. 외면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경애'를 확립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찰나의 기쁨을 구하고, 외적인 면을 풍요롭게 장식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이므로 더욱 우리는 '내적인 행복'의
위대함을 '환희 중의 대환희'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기쁨은 전파된다. '열가중심'의 사람은 주위 사람들도 '열가중심'의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 또 사람을 '열가중심'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도 '열가'한다.
창가학회에는 참된 '열가중심'이 있다. 생명의 환희와 약동이 있고,
근본적으로 즐겁기 때문에 사람이 모인다. '즐겁다'는 것은 불법이
생생하게 맥동하고 있다는 위대한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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