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편품 제2 강의

방편품 강의 8

by 행복철학자 2024. 6. 20.
728x90
반응형
SMALL

방편품 강의 8

 

[본문]      

   唯佛與佛        乃能究盡     諸法實相       所謂諸法

유이 부쓰 요  부쓰   나이 노 쿠 진    쇼 호 짓 소         쇼 이 쇼 호

   유불여불               내능구진         제법실상             소위제법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뇨 제 소   뇨 제 쇼   뇨 제 타이  뇨 제 리키   뇨 제 사    뇨 제 인     뇨 제 엔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等

 

뇨 제 카       뇨 제 호       뇨 제 혼 맛 쿠 쿄 토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등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능히 제법의 실상을 구진(究盡)하셨느니라. 

소위 제법의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등이니라".

 

 [통해]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능히 제법의 실상을 철저히 구명(究明)하셨다. 

 그것은 이른바 모든 법의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등이다."

 

 [어역]

 제법실상(諸法實相): 삼라만상이 모조리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라는 것.'제법'이란 '모든 법'을 말하며 모든 존재, 현상을 말한다.

'실상'이란 '실제 모습'이라는뜻이고 진실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여시(如是): '이와 같이'라는 뜻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 '본말은

구경하여 같다'는 뜻. 상(相)을 본(本)으로 하고보(報)를 말(末)로 하여, 

구여시(九如是)는 마침내 (구경하여) 하나로 귀착 한다는 것.

  

[강의]   

 드디어 방편품의 가장 중요한 ‘제법실상 • 십여시’로 들어간다.

석존이 방편품의첫머리에서 "심심(甚深)하다" "난해(難解)하다"라고

찬탄한 부처의 지혜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설하려고 하고 있다.  

 부처와 부처만이 철저히 구명한 제불(諸佛)의 지혜는 ‘제법의 실상’이고,

실상이란구체적으로는 상(相) • 성(性) • 체(體) • 역(力) • 작(作) • 인(因) •

연(緣) • 과(果) •보(報) • 본말구경등 (本末究竟等)의 ‘십여시’라고 밝혔다.

 제법실상의 ‘제법’은 십계의 정보(正報: 주체)와 의보(依報: 환경),

다시 말해 모든 중생과 그 환경세계이다.  삼라만상, 모든 사물과 현상을

말한다.   또 ‘실상’은 문자 그대로, 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제법실상’이란, ‘온갖 현상의 진실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상'의 내용을 밝힌 것이 다음에 이어지는 십여시이다.

그러므로이 경문을 "십여실상(十如實相)"의 경문이라고 한다.

 

 십여시란 무엇인가

 먼저 십여시 각각의 의미를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여시상 = 외견상의 모습

 여시성 = 내적인 성질

 여시체 = 상 • 성을 합친 전체

 여시력 = 잠재적인 힘

 여시작 = 힘이 외부로 작용하는 작용

 여시인 = 사물(事物)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원인

 여시연 = 인(因)을 돕는 간접적인 원인과 조건

 여시과 = 인(因)과 연(緣)으로 생기는 결과

 여시보 = 결과가 사실이 되어 외부로 나타나는 것

 여시본말구경등 = 첫째의 상(相)에서 아홉째의

보(報)까지 서로 관계하여

일관하고 있는 것 이 가운데 상 • 성 • 체의 삼여시는 제법의

‘본체’이다. 역 • 작 • 인

• 연 • 과 • 보의 육여시(六如是)는 제법의 ‘작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상'에서 '보'까지

구여시(九如是)의 일관성을 본말구경등이 나타낸다.

 

물론 각각에 ‘여시(如是: 이와 같은)'

라는 말이 붙어 있듯이, 본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처의 지견(知見)을,

 ‘굳이 말로 나타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를 들어 말하면, 당신 자신이라는

존재는 ‘제법(諸法)’의 하나이다.

당신의 얼굴과 몸매 등은 제법인 당신의 ‘여시상’이다.

 

 또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성미가 급하다'든지

'성미가 느긋하다.’든지 ‘상냥하다.'든지 '얌전하다.’든지의

여러 성격과 성분은 당신의 ‘여시성’이다. 이 여시상과 여시성으로

이루어진 심신(心身)의 전체, 말하자면

당신 자신이 ‘여시체’이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은 갖가지

힘(여시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밖으로 향해서 갖가지 작용(여시작)을 일으킨다.

 

 또 그러한 당신 자신의 생명이 원인(여시인)이 되고,

내외(內外)의 조연(助緣: 여시연)이

더해져, 당신 자신의 생명에 변화가 일어나고(여시과),

그것이 이윽고 현실의 과보

(여시보)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아홉개가 일관해서 빠짐없이

당신이라고 하는 생명,

당신이라는 경우(境遇: 경애)를 만들고 있다(여시본말구경등).

 이것이 당신의 '십여실상(十如實相)'이다.

 

 '나'라고 하는 인간도, 또 여러분 자신도 이 십여시라는

본연의 상태로 사록 있다.

여러분 중에 '내게는 여시상(如是相)이 없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투명인간(透明人間)'이다. 마찬가지로

'성격이 없다'는 사람도 없으며,

 '아무런 힘도 없다' '작용도 없다'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시상은  나 자신이지만 여시성은 A씨고

여시체는 B씨고…'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일관해서(본말구경등), 당신 자신의

둘도 없는 생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십계(十界) 각각이 경애에 상응한 십여(十如)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지옥계(地獄界)의 사람은 어둡고 침울한 고뇌에 빠진

여시상을 하고 있다.

 그 여시성은 괴로움과 분노로 가득하기 때문에 여시력과

여시작도 주위를 어둡고

침울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천계(天界)의 사람의 여시상은, 싱글벙글 웃는 밝은 표정이다.

여시성은 그야말로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고, 무엇을 보아도 즐거울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까지도 왠지 신나게 하는 여시력 *

여시작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십계의 경애에 상응한 상 * 성 * 체  * 역 * 작 * 인 *

연 * 과 * 보가 있으며

모든 것이 본말구경해서 똑같다는 것이 실상(實相)이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여기에 가령 도둑이 있다고 하자. 그 도둑은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 모든 것이

도둑인 것이다. 그것이 본말구경등, 일관되어 있는 셈이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지혜

 제법의 있는 그대로 '실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명의 넓이, 깊이를 남김없이 철저하게

들어다본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길가에 피는 한송이 꽃에도

아름다운 상이 있고,

 성질이 있고, 그 체가 있다. 또 역 * 작 * 인 * 연 * 과 * 보 *

어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

그리고 전체로서 꽃이라는 생명을 구성하면서 일관하고 있다.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작은 돌멩이도, 대공(大空)도,

달도, 별도, 태양도,

조수(潮水)의 향기를 옮겨주는 바다도, 우뚝 치솟는

산들도, 떠들썩한 거리를

내려다보는 도시의 빌딩숲도, 집과 자동차도, 도구 하나하나도 …. 

 모든 존재가 십여시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부처가 규명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지혜이다.

 다시 말해서 '제법'을 보면 부처는 그 '실상'을 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경애를 알고, 본래부터 부처라는 사실을 안다. 자연을 보면

그 존귀한 빛남을 느낄 수 있다.

또 사회현상을 보면 그 의미를 예리하게 꿰뚫어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다.

 불법(佛法)은, 인간의 경애에 따라 오안(五眼: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있다고 설한다.<주10> 보살과

불계의 눈인 법안 * 불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이다.

 

물론 '본다'는 것은 하나의 예이며,

'듣는다'는 것도 '냄새를 맡는다'는 것도, '맛본다'는

것도 '만진다' '느낀다'는 것도 모두 '

진실 그대로'가 아니면 안 된다. 

 프랑스의 시인 로트레아몽은 이렇게 썼다.

 "현상은 지나간다. 나는 법칙을 찾는다"  

 바뀌는 현상에 즉(卽)해서 진상을 깊고 예리하게 보는 눈.

이것을 규명하는 사람이 부처이다.

 범부라는 존재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에서도, 오해나 착각,

편견이나 억측 등으로 실패하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하물며 인생이나 사회의 근본문제가 되면, '진실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똑같은

'제법'을 보고 있어도 부처는 거기에서 '실상'을 보지만,

범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지만, 대과학자 뉴튼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한다. 떨어지는

사과(제법)를 보고 지구상의

모든 것에 인력(引力)이 작용한다는 진리(실상)를

발견했다. 이런 사실들은

제법실상이라는 지혜의 일부분에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봐도, 거기에

아무런 통찰도 없다면

'실상'은 볼 수 없다.

뉴튼의 발견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커다란 이익이 되었다. 하물며

제법실상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지혜가 인생의 행복과

인류의 향상에 얼마나 중요한지 헤아릴 수 없다.

 

 제법에 입각해서 실상이

 그러나 현상의 '깊은 곳에서' 실상을 발견한다고 하면,

현상과 동떨어진 법칙이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

 

제법과 실상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 양자는 어디까지나 하나이다.

제법에 즉(卽)해서 실상을 보고, 실상은 제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적확(的確)하게

보는 것이 부처의 눈이다. 결코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시시각각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법'은 '

파도'이고, '실상'이란 '바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파도는 바다에서 생기고, 파도는

모두 바닷물이다. 또 파도로서

나타나지 않는 바다는 없다. 양자는 하나다. 또 실상을

'거울'에, 제법을 '상(像)'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울은 모든 것을 상으로

비추어낸다. 빛이 있는

한, 상이 비치지 않는 거울은 없다. 또 비치고 있는

상도 거울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또 이것을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이란 낱낱의 생명이고,

실상이란 부처가 각지한 우주대의 생명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낱낱의 아무리 작은 생명 속에서도 우주생명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중생(衆生)은 부처가 깨달은

묘법의 당체(當體)이며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의 제법실상의

지혜이다. 제법에 즉해서 실상을

보는 부처의 눈이란,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성불시키겠다는 자비의 눈이기도 하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一切)의 재보(財寶) 중에

제일의 재보이며, 편만삼천계(遍滿三千界)

무유치신명(無有直身命)이라고 설해져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재보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느니라" (어서 1596쪽)

 

 한사람의 목숨, 하나의 생명은 전우주의 재보보다도 존귀하다. -

이것은 제법에서 실상을 보는 '불법의 굉장한

생명관'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그 생명의 진실한 

모습을 철저히 구명한 것이

부처의 지혜이다. 얼마나 광대하고 심원한 영지(英智)인가.

 이 부처의 눈으로 보면 이 세계, 이 우주는 '생명이

빛나는 세계'이다. '만물이

노래하는 세계'이다.

모든 것이 더없이 소중한 개성을 갖진, 가치를 가진

세계임을 실감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감동' '사는 기쁨'으로 가득 찬 경애 -

그것이 불지견(佛知見)이다.

 

 그리고 나중에 말하겠지만, 문저의 입장에서 말하면

제법실상이란 어본존을 말한다.

어본존을 수지하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을 '불법의 눈'

'신심의 눈'으로 보아가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가 된다.

 

 우주 전체가 묘호렌게쿄의 모습

 십여시의경문에 즉(卽)해서 "사물(事物)의

실상을 구명한 부처의 지혜"에

대해 말했지만, 니치렌 대성인은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서

이 십여실상

(十如實相)에 대해, 근본의 의의를 정확히 가르쳐주셨다.

 '제법실상초'는 문하인 사이렌보(最蓮房)가 방편품(方便品)의

"제법실상내지 본말구경등'의 경문에 대해 질문하자 이에

답하신 편지이다. 사이렌보는

천태종의 학승으로, 교학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처음부터 단적으로 말씀하셨다.

 "답하여 가로되 하지옥(下地獄)으로부터 상불계(上佛界)까지의

십계(十界)의 의정

(依正)의 당체가 모두 일법(一法)도 남김없이 묘호렌게쿄의

상(相)이라고 하는

경문이니라"(어서 1358쪽) - '답하여 말하면 (제법실상의 문은)

아래는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불계까지의 십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당체가 모두 일법(一法)도

남김없이 묘호렌게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경문이다.'

 십여시상의 경문이 나타내는 것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모든 생명(제법)이

모두 남묘호렌게쿄의

모습(실상)이라는 점이다.

 전 우주가 묘법 그 자체이다. 삼라만상이 묘법의 노래이고,

춤이고, 극(劇)이고,

시(詩)이고, 빛이고, 생사(生死)이고, 고락(苦樂)이고

유전(流轉)이고, 전진이고,

본래 환희 중의 대환희이다.

그 제법의 실상을 현실에서 자각하고, 실현하기 위한

신심이다. 자유자재의

대경애를 열 수 있다.

 십여시에 '본말구경등'이라고 있는 것은,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의 구여시가

지옥계면 지옥계로서 똑같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묘호렌게쿄의 모습'으로서

똑같다는, 더욱 근본적인 의미가 있음을

대성인은 밝히셨다. 일체를 '묘호렌게쿄의

모습'으로서 포착하는 것이

 '제법실상'이며 부처의 지혜이다.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도 "이 십여시라 함은

묘호렌게쿄이니라"

(어서 415쪽)라고 명쾌히 말씀하셨다.

 

 남묘호렌게쿄는 십계의 생명(제법)에 즉해서

현현(顯現)하는 우주 근원의 법(실상)이다.

이 근원의 묘법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이며,

대성인은 그 부처의 생명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다. 그러므로 십여시는

궁극적으로 어본존을 나타낸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강의하셨다.

 "이 십여시는 어본존의 모습을 약(略)해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편품이 중요하다.

겉으로 말하면

십여시뿐이다. 이것은 교상(敎相)의 면이다. 니치렌

대성인의 내증(內證), 관심(觀心)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훌륭한 어본존이다."

 

 다시말해 문저로 읽으면 '제법실상'이란 바로 '어본존'이다.

 

 제법실상의 부처 - 그 몸, 그 자리에서 '부처'로 빛난다

 그리고 굳이 제법과 실상으로 나눈다면, 어본존 중앙에

씌어 있는 '남묘호렌게쿄

니치렌'이 실상에 해당하고, 좌우에 있는 십계의 중생이

제법을 대표하고 있다.

일념삼천(一念三千)으로 말하면 일념은 실상이고 삼천은 제법이다.

 이 '사(事)의 일념삼천의 어본존'을 배견함으로써,

우리 구계(九界)의 중생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빛에 비친 제법실상의

생명활동이 된다. 대성인은

"십계의 중생은 남김없이 제법실상의 부처'(어서 830쪽)

라고 말씀하셨다.

지옥계라면 지옥계, 인계라면 인계, 그 몸 그대로의

모습으로 실상 다시 말해

묘호렌게쿄의 당체로서 빛날 수 있다.

 어딘가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특별한 자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괴로워하면 괴로워하는 데로, 기뻐하면 기뻐하는

그 모습대로 솔직하게 어본존을

배견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행동하면 반드시 

'제법실상의 부처'가 된다.

자신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일념삼천의

자유자재의 역용을 생활에,

인생에 사실로 표현할 수 있는 자신이 된다.

 니치칸상인은 '관심본존초 문단(觀心本尊抄文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우리 몸 전체가 곧 이는 본존(本尊)이니라"

 묘법을 자행화타에 걸쳐 수행함으로써

우리들의 생명 전체가 본존이 된다.

자신의 생명을 사실로서 묘법의 당체로 빛낼 수 있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본존을 배알하고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함으로써, 우리 생명속에

어본존이 계속 스며든다. 눈을 뜨고 대우주를 보면

거기에 어본존이 계시고,

또 눈을 감고 깊이 사색하면 어본존이 분명히 보인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어본존이 더욱 힘을 더하고, 빛을 더하게 된다."

 

 본래 전우주가 제법살상이고 어본존이다. 본래 우리

생명도 제법실상이고,

어본존이다. 그러므로 어본존을 배례할 때 우주와

내 생명이 역동적으로 교류하면서,

자기 본래의 '실상(實相)' 다시 말해 남묘호렌게쿄의

당체로서의 모습으로 빛나는 것이다.

부처 본래의 지혜가 솟아난다. 자비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솟는다. 복덕 넘치는 황금의 궤도로 들어선다.

이 얼마나 굉장한

어본존이신가. 이 얼마나 굉장한 법화경의 지혜인가.

어본존이야말로 펴내도 끝이 없는

'복(福)'  '지(智)'의 당체이고,'말법의 법화경'이라는

사실을 잘 음미하기 바란다.

 

 십계호구 * 일념삼천

 십여실상을 설함으로써 부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대략 밝혀진다. 방편품의

그 뒷부분에서는 "이 부처의 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열게 하고, 나타내고,

깨닫게 하고, 지혜의 길에 들어가게 한다"는,

부처의 유일한 가르침

(일불승<一佛乘>)이 나온다. 그리고 법화경

이전에 성문 * 연각 * 보살을

위해 설했던 세가지 가르침(삼승<三乘>)은 방편임을 밝힌다.

이것을 '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고 한다.

 십여실상의 경문에는 개삼현일의 취지가 대략 나타나있으므로 '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의

경문이라고 한다.

 또 천태(天台)는 이 '십여실상'의 경문과 '

십계호구(十界互具)'로써 '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중요한 법문(法門)을 수립했다. 다시 말해, 일체중생에게

불지견(佛知見: 부처의 지혜)을 열게 한다는

법화경의 법리는, 구계(九界)의 어떠한 중생에게도

불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태는 이 같은 법화경의 묘리(妙理)를 토대로 '십계가 제각기

또 십계를 갖추고(십계호구) 있으며,

그 백계(百界)가 제각기 십여시를 갖추고 있다(백계천여

<百界千如>).'고 하며,

불가사의한 실상을 표현했다. 그리고 법화경 본문의

수량품 제16에 들어가면,

사바세계는 부처가 상주(常住)하는 국토임을 나타내고,

국토세간이 밝혀지게 된다. 거기에서

삼세간(三世間)<주11>을 갖추어

 (삼천세간<三千世間>) '일념삼천'의 법문이 설해진다.

 이에 관련하여 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념삼천의 법문은 법화경 (8권 중) 제1권의

십여시로부터 일어났다"(

어서 412쪽, 취의)

 이처럼 십여실상의 경문은 십계의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나타낸 중요한 경문이다.

십계의 중생이 모두 상 * 성 * 체 * 역 * 작 * 인 * 연 * 과 * 보 *

본말구경등의 십여시를 갖추었다는 것은,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와

중생이 똑 같은 생명을 갖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의 성불은 틀림없는 것이다. 

 

 대성인은 "법화경은 석존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일체중생을

모두 성불시키는 근원'이라고 해도, 오직 이

제법실상의 사자(四字)

이외에는 전혀 없다.(중략) 제법실상이야말로

일구만료(一句萬了:

일구에 모든 것이 담겼다)의 일언(一言)이다"

(어서 1139쪽, 취의)라며,

이 경문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니치렌 대성인은 타락한 종교와 대투쟁을

 "문저에서 보면 이 '제법실상'이 '어본존'을 가리킨다." -

여기에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천태불법(佛法)의 목적은, 관념관법(觀念觀法)의

수행으로 기심(己心)에 '

제법실상'을 관(觀)하는 것이다. '제법에 즉(卽)해서

실상이 있다'고

깨닫는 것을 구극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천태의 후학(後學)들은

그 정신을 왜곡하고 말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대성인 재세 당시의 천태종은

"제법은 즉 실상이므로

그대로의 모습이라도 좋다.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부처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불도수행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완전히 타락한 모습이다. 조사(祖師)인 천태의

마음을 죽이고 말았다.

 갖가지 오탁(汚濁)과 고뇌로 뒤범벅이 된 현실이

'그대로 실상이다'라고

할 뿐이라면 인생과

사회의 향상으로 이어질 리가 없다. 이처럼 안이하게

현재의 상태를 긍정하고,

변혁을 위한

행동을 소홀히 하는 경향성은 일본인의 종교관,

인생관에도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대성인은 타락한 이 천태종과 맞서 투쟁하셨다.

그들은 타락한 자기들 승려의

모습을 정당화하려고, '제법실상'의 법문을 이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대성인은 이때 제법실상이라는 부처의 지혜를 '

만인이 불도수행에 면려하고,

성불하기 위한 지표'로서 소생시켜 주셨다. 다시

말해 말법만년(末法萬年)

전세계의 민중을 위해 남묘호렌게쿄여래(南無妙法蓮華經如來 :

니치렌대성인)의

불신(佛身)인 어본존을 도현하셨던 것이다.

 

 '불법자'란 현실변혁을 향한 '도전자'

 대성인은 불법(佛法)은 '제법실상'을 기심(己心)에

관(觀)하는 것이 아닌, 이 현실을

 '제법실상'으로 빛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인생 ,

사회라는 제법을 사실상으로

묘법의 당체(실상)로 빛내는 '변혁'과 '향상'의

철리(哲理)이다.

 제법실상이라는 '지혜'의 빛으로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라는

어둠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가 빛이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를 밝게

비추는 투쟁이다.

자기가 빛이 되면 어디에 있다 해도 이 세상에 어둠은 없다. 

 대성인은 불교계의 부패와 타락을 타파하고, '종교혁명'의

대투쟁을 개시하셨다.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

대성인 직결(直結)의 우리이다.

 

 지금의 닛켄종도 당시의 천태종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닛켄종은 무참하게

종조(宗祖) 니치렌 대성인의 정신을 짓밟았다.

 

수행을 잊고 방탕에 빠져,

불법의 혼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감하게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악과 맞서 투쟁하는 것이 대성인의

문하라는 증명이 된다.

 

 세번 읽으면 공덕이 뛰어나다

 그러면 우리가 조석근행(朝夕勤行)을 할 때,

이 십여실상(十如實相)을

세번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대성인의 '일념삼천법문(一念三千法門)'

(어서 412쪽)의 어문(御文)에

근거한 것이다.<주12>

 '일념삼천법문'에 따르면, 십여시를 세번 읽는 것은 우리 몸에

 "공(空) * 가(假) * 중(中)의 삼제(三諦)"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몸이 '법(法) *

보(報) * 응(應)의

삼신(三身)'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법신(法身) * 반야(般若) *

해탈(解脫)의

삼덕(三德)'이 나타나는 것도 의미한다.

 우리의 몸이 '지혜(보신<報身> * 반야)'와

'자비(응신<應身> * 해탈)'를

갖춘 '깨달음(법신)'의 당체인 부처로 빛난다.

 대성인은 "세번 읽으면 공덕이 뛰어나도다"

(어서 412쪽)고 가르쳐주셨다.

 요컨대 "우리 몸이 존귀한 부처이다."라고 선언하고,

신심의 공덕을 더하기 위해

세번 독송(讀誦)한다.

총(總)해서 근행 * 창제 때마다 우리 생명의 불성을

찬탄하고 있다. 또 전인류의

불성을 찬탄하고 있다.

우주의 불성과 감응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의식인가.

이 얼마나 고마운 신심즉인생(信心卽人生)인가.

 

 '훌륭한 사람이란 확신에 찬 사람'

 제법실상의 지혜는 인생에 무엇을 주는가.

그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일체를 가치창조의 방향으로 잘 이끌어가는 힘이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일이 일어난다. 고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순풍도 있고 역풍도 있다.

그 모든 현상(제법)이 전부 자신의 불계(佛界)라는

생명(실상)을 빛내는 기회가 된다.

행복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제법실상의 인생이다.

 기쁨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만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괴로움이야말로 깨달음의 어머니'이며, 고뇌나 좌절이야말로

이것에 지지 않는 한,

신심을 깊게 해 준다. 고뇌가 행복의 재료가 된다.

번뇌즉보리이다. 번뇌라는 제법도 또한 즉 실상이다. 신심(信心)하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일체가 공덕이다.

 

그리고 여기에 묘법을 신앙하는

인생과 하지 않는 인생의 차이가 있다.

 나는 젊은 날에 도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어떠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주셨다.

 "확신에 찬 사람이다. 인생은 또 모든 것은 확신이다."

 인생에는 중요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확신"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묘법에 대한 대확신을 뜻한다.

 '나는 반드시 인생을 승리하고야 말겠다.' '나는

반드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겠다' '우리 직장, 우리 지역을 크게 발전시키겠다'.

또 '반드시 기쁨이

가득한 인류사회로 시대를 바꾸겠다.' -

 이러한 확신대로 똑바로 행동해가는 사람은 위대하다.

 확신이란 일념(一念)이다. 확신이란 용기이다.

확신이란 희망이다.

확신이란 여유하고 자애이다.

확신이란 니치칸 상인이 육권초(六券抄)에서

"법화경을 믿는 강한 마음을

이름하여 불계(佛界)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불계를 말한다. 그리고 '확신'이라 하고, '불계'라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현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제법실상이다.

불법은 관념론이 아니다.

 

 '신심'이란, 즉 '생활'

 '불법(佛法)'은 즉 '사회'이다. 제법실상에서 말하면,

불법은 '실상'이고,

사회(세법(世法))는 '제법(諸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신심'은 실상이고,

 '생활'은 제법으로, 신심즉생활이 제법실상이다.

 불법은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니치렌 대성인은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

(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라는 천태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자(智者)"란 세간(世間)의 법 이외에 불법(佛法)을

행하지 않도다"(어서 1466쪽)

, "바로 세간의 법이 불법의 전체라고 석(釋)해져 있느니라"

(어서 1597쪽) 

 '바로'란 '그대로'라는 뜻이다. 세법의 모습이 '그대로'

불법이다. 현실의 모습에서

떠난다면 불법을 증명할 장소는 없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하늘이 맑아지면 땅은 밝아지고, 법화(法華)를 아는

자는 세법(世法)을 깨닫느니라."

(어서 254쪽) 도다 선생님은 이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의

어문(御文)을 배견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본존을 수지한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하고,

자기의 일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태양이 한번 얼굴을 내밀면 대지(大地)가 확 밝아지듯

묘법을 수지한 사람은

세법을 모르면 안 된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 뚜렷하게 보이는

지혜의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신심이다.

부처의 십호(十號 : 열가지 존칭) 가운데 '세간해(世間解)'라고 있다.

세간의 일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부처이다.

 

 국토에도 십여시가

 그런데 우리 생활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국토와

사회에도 십여실상(十如實相)이 있다.

여시인이 있으면 여시과도 있다. 여시력도 있다.

 

그 여시상에는 '숙명'이나

'복운'이 나타난다. 대성인은 "불법은 체(體)와 같고

세간(世間)은 그림자와 같도다.

체가 구부러지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느니라."

(어서 992쪽)라고 말씀하셨다.

 체와 그림자는 떨어질 수 없는 일체(一體)다.

구부러진 '체' 다시 말해 편향된

철학, 사상, 종교를 그대로 두고 아무리 '그림자'를

똑바로 세우려고 해도

세워질 리 없다. 

 우리가 전개하는 대화운동은 이 '체'를 바르게 하는

근본적인 사회공헌이다.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근본인 '여시인'을 만드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올해(1955년) 8월로 50주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를 지옥의 괴로움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에서는

새로운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전란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 국토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전쟁은 무엇이든 파괴해버린다.

전쟁만큼 잔혹한 것은 없다.

 일찍이 도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으로 괴로워하는 한국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쓰셨다.

 "'이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민중이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었겠는가.

또 얼마나 많은 민중이 자식을 찾아, 부모를 찾아 헤메고 있겠는가.'

하고 한탄한다.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서 헤매다. 졸지에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젊은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쁜 짓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외치며 살해당한 할머니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부모라든지 형제라는 종류의 가족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입은 옷 이외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인생의 보통생활이라고

믿게 된 주부도 많을 것이다.

옛날에 먹었던 쌀밥을 꿈에서 보고 놀라는 노인은 없을까?(중략)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물움에 놀란 얼굴로 '먹을 것이 있는 쪽에, 집이

있는 쪽에 붙겠다.'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을까."

 무참히 짓밟히고, 갈기갈기 찢기고, 죽임을 당한 민중의 한탄. 슬픔.

분노, 원한…. 도다 선생님은 아시아 민중의 괴로움을 자기의 일처럼 몹시

가슴 아파하셨다. 마음으로 통곡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오직 홀로 묘법광포의

대투쟁으로 일어서셨다.

 우리는 이 은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묘법으로 벗을 구제하면서 평화 * 문화 *

교육의 파동을 전 세계로 넓히고 있다.

 

 우주에 만연한 탈명자에게 도전

 "제법실상"은 생명존엄의 철리(哲理)이다.

 지금 세계에서 민족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가 심각해지고 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참극(慘劇)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총으로 살인하는 사건이 늘어

 '총기 사회'라는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한사람 한사람을 묘법(妙法)의 당체로 하는 '제법실상'의

불안(佛眼)으로 본다면,

모든 사람은 누구나 둘도 없이 소중한 '한사람'이다.

민족도 관계없다.

지위도 출신도 관계없다.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살인'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인간이여, 빛나라!' '모든 생명이여 빛나라!' -

이러한 인류의 외침이

법화경의 외침이다.

제법실상을 아는 사람의 외침이다. 전 인류가 살아가는 감동을 서로

나누기 위한 불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존엄을 빼앗는 것'과 단호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불법자의 책무다.

 

 도다 선생님은 유명한 <원수폭금지선언>에서,

핵무기 속에 숨어 있는

'손톱'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선언하셨다. 이 선언은 핵을 사용하는 인간 자신의

"마성"에 대한, 또 우주에

만연한 마(魔) 다시말해 '

탈명자(奪命者)'에 대한 도전이다. 보신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조차도

이용하여 희생시키는 권력의

 '악마성(惡魔性)'과 맞서는 전투였다.

 20세기의 비대해진, 인류의 암이라고 해야 할 이 마성을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법화경이 설하는 제법실상의 영지(英智)야말로

신세기를 향한 커대한

지표가 된 것이다.

또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기'  '사람이 함께 사는 세기'

자연과 함께 사는

세기'를 향한 지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서 묘법을 넓히고 있는 여러분은 선구자이다.

새로운 세기의 갈채는

틀림없이 여러분의 것이다. 제법실상의 눈으로 보면,

누군가 '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우주'에 상처를 주는 것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이러한 우주와의 일체감을 잃을 때 인간은 마마른

모래알처럼 따로따로 고

립된다. 그리고 빈약하고

허무한 마음 오저에서 폭력이 분출한다. 묘법이라는

'무한한 생명'과의

일체성을 느낄 때, 인류는 분명 감옥에서

행방되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혜의 일륜'으로 인류를 비춰라

 니치렌 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만법(萬法)은 기심(己心)에 담아져서 일진(一塵)도

궐여(闕如)함이 없고 구산(九山) *

팔해(八海)도 자신에게 갖추어지고 일월(日月) * 중성(衆星)도

기심에 있느니라"(어서 1473쪽)

 '산도 바다도, 태양도 달도, 별들도 모두 자기 마음속에 있다.-  

이 얼마나 광대하고도 장엄한 대성인의

경애인가. 이러한 '우주즉아(宇宙卽我)' '아즉우주(我卽宇宙)'라는

어본불의 대생명을 그대로 도현하신

만다라가 어본존이다. '똑같은 경애를 목표로 삼아라'하고

대자비로 남겨주신 어본존이다.

 불법 이외에서도, 예를 들면 영국 작가 D.H.로렌스는 이렇게 썼다.

 "눈이 내 몸의 일부이듯 나도 또 일륜(日輪)의 일부이다. 내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은 내 다리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 피는 또 바다의 일부이다. 내 혼(婚)은 내가

전 인류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표현된 있는 것은 개인의 생명과 대우주와의 일체감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생명의 실상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여러 철학과 종교,

문학 등이 탐구했다. 그것을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완벽하게 밝혔다. 대성인의 불법은 말하자면 '우주적 인간주의'

 '우주적 휴머니즘'의 종교이다.

 또 로렌스는 인류의 신시대 도래를 기대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먼저 일륜(日輪)과 함께 시작하라, 그러면 다른 것은 서서히

서서히 따라 일어날 것이다"

 불법은 경애이다. "일륜과 함께 시작하라." -  일천(日天), 월천(月天)까지도

벗으로 삼고, 천(天)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웅대한 경애를 여는 것이

우리들의 불도수행이다.

 

 '고락과 함께' 모두 의미가 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자신의 생명에 굳건히 쌓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있어도 즐겁다. 무엇이 없어도 즐겁다.

언제나 생명 오저에 환희가 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 -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일어도 대해(大海)의

깊은 곳은 흔들리지 않듯이, 또 호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먹구름을 뚫고 올라간 저 높은 곳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고락 함께 즐기면서'

한걸음 한걸음마다  가치를 만들고, 경애를 여는

삶이 제법실상의 인생이다.

 니치렌대성인은 '태양의 불법'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리고 이 대불법이

인류문명의 여명을 얼마나 찬연하게 비출 것인가.

이것은 지금부터 앞으로

21세기까지 더욱 분명히 증명될 갈 것이다.

그 대확신에 불타 '우리의 내일'을

향해 전진하기 바란다. 

 이상으로 법화경 방편품 제2의 강의를 마치고자 하다.

석존이 연 '일체중생이

성불의 길'은, '제법실상'의 지혜를 나타낸 방편품에서 대략 모습을

나타냈다고 해도 좋다.

지금부터 배울 수량품 제16에서는, 부처의 영원한 수명이 밝혀진다.

수량품은 방편품의 법리를

석존 자신의 생명에 즉(卽)해서 더욱 깊이 전개한,

말하자면 "부처의 체험담"이다.

 "불계라는 '자신의 흉중의 태양'을 떠오르게 하자." -

방편품에서 이 위대한

메시지를 배운 우리의 탐구도 드디어 생명의 드라마인

수량품의 세계로 나아간다.

대성인의 문하로서 매일매일 광선유포에 매진하는

여러분을 위해, 나도 더욱 힘써 강의할 결심이다. 

 

728x90
반응형
LIST

'방편품 제2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편품 강의 3  (0) 2024.06.20
방편품 강의 4  (0) 2024.06.20
방편품 강의 5  (0) 2024.06.20
방편품 강의 6  (0) 2024.06.20
방편품 강의 7  (0)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