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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 강의 3
본문]
舍利佛 吾從成佛已來 種種因緣 種種譬喩 廣演言敎 無數方便
샤리호쓰 고 주 조 부쓰 이 라이 슈 주 인 넨 슈 주 히 유 고 엔 곤 쿄 무 슈 호 벤
사리불 오종성불이래 종종인연 종종비유 광연언교 무수방편
引導衆生 令離諸著
인 도 슈 조 료 리 쇼 자쿠
인도중생 영리제착
사리불이여. 내가 성불하고 난 이래 여러가지 인연, 여러가지 비유로써 널리
언교(言敎)를 말하고, 무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인도하여 온갖
집착을 떨어버리게 했느니라.
[통해]
사리불이여, (석존이 부르신 후 설하셨다.)
내(석존)가 성불한 이래 여러가지 인연과 여러가지 비유로써 널리 가르침을
설하고,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떨어버리게 했다.
[어역]
인연(因緣): 원인, 내력.
방편(方便):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고자 사용한 가르침. '진실'로 이끌기 위한
절묘한 수단을 말함.
인도(引導): 중생을 이끌어서 불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
제착(諸著): "착(著)"은 집착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어떤 일에 사로잡혀
심신(心身)이 혼란해져 고뇌가 생기는 것.
[강의]
이 경문 앞에서 "부처가 일찍이 없던 매우 깊은 법을 성취하고, 중생의 기근에
응해서 가르침을 설하셨다. 그러나 그 진의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한 말을 다시 자세하게 말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제불의 지혜에 대해 언급했지만, 여기에서는 석존 자신에
한정하여 그 지혜를 밝혔다.
"내가 성불하고 난 이래", 다시 말해 깨달음을 열고 나서 법화경에 이르기까지
석존은 이른바 이전(爾前)의 제경(諸經)을 설했다. 이 경문은, 그 법화경
이전에 설법한 경의 특색을 간결하게 밝혔다.
다시 말해, 석존이 법화경 이전에 여러가지 인연 ('왜 그렇게 되는가.'라는 '내력')과
비유를 들어 널리 가르침을 설한 일. 또 그 가르침은 사람들을 '진실'로 인도하려는
방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들을 갖가지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 일을 설한 것이다.
이전경의 방편
'방편'이란 부처의 자비를 근저로 하는 중생구제의 '수단' '방법'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중생의 성불'이지만, 이전경은 아직 그 사실을
나타내지 않았다. 법화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이전경은, 사람들을 여러가지 집착에서 떨어지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설했다.
어떤 집착에 '얽매이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사람에 응해서
여러가지 인연, 비유를 들어 여러가지 가르침을 설했다.
그 가르침들은 성불이라는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경을 '방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전방편(爾前方便)의 가르침도 사람들에 대한 부처의 자비에서 나왔다.
'온갖 기근에 응해서 적확한 가르침을 택하여,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
석존의 이러한 자비와 지혜의 투쟁이었다.
눈 앞의 '한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지금 상대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한사람 한사람을 깊이 주시하면서 진검승부로 지도했다.
중생이라 해도 추상적인 '불특정 다수'가 아니다. 집단이 아니다.
눈 앞의 '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여는가. 구체적으로 '이 사람'을 어떻게
소생시킬 것인가. 그 마음이 불법의 마음이다.
또 많은 사람에게 말할 때도 구체적으로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말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대중의 마음에 울리는 '살아 있는 말'이 된다.
석존은 성도(成道)한 이래 철저히 '한 사람'을 위해 끝까지 말했다. '한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고 '한 사람'을 위해 설한 언언구구(言言句句)였기에, 법이
'한 사람' 또 '한 사람'에 흉중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투쟁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마음의 청풍(淸風)을 보내 미혹과 불안의
암운(暗雲)을 걷어내고, 희망과 행복의 태양을 떠오르게 할 수 있었다.
이 '한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있었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기꺼이 석존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방편은 민중의 경애를 높이는 '지혜로운 말'
석존의 방편의 가르침을 설한 이유는, 미혹에 빠져 괴로워하고 중생과
'동고(同苦)'했기 때문이다. 중생을 '어떻게든 구제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 동고와 간절한 마음에서 '어떻게 구제하면 좋은가' '어떻게 하면 미혹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가.'하는 방법, 다시 말해 '방편'이 생겨났다.
자비가 지혜를 낳은 것이다.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연 석존은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겠노라고
결의했다. 이때 시방(十方)의 부처가 나타나 "과거의 부처처럼 방편력을 쓰시오.
우리도 모두 그렇게 했으므로" 하며 석존을 격려했다. 그래서 석존은 자신이
깨달은 '일찍이 없던' 법을 설한 준비로 방편력을 써서 이전(爾前)의
가르침을 설하기 시작했다. (법화경 142쪽)
그야말로 '방편'이란 민중의 경애를 높이는 지혜의 표현이다.
석존은 '자비로운 말' '지혜로운 말'로써 모든 민중을 구제하는 험난한 설법의
여정을 향해 힘차게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인류에게 행복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불교가 개막했다.
법화경의 '비묘방편'
먼저, 이 경문에 설해진 방편은 '이전경(爾前經)의 방편'이라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법화경의 '방편품'이라는 제명(題名)에 있는 '방편'이 아니다.
법화경의 방편에는 깊은 의의가 있다.
방편에 대해, 천태는 ① '법용방편(法用方便)' ② '능통방편(能通方便)'
③ '비묘방편(秘妙方便)' 이렇게 세 종류로 나눴다. 이 가운데 법용방편과
능통방편이 '이전경의 방편'이고, 비묘방편이 '법화경의 방편' '방편품의 방편'이다.
법용방편이란 중생의 갖가지 기근에 맞춰 설한 여러가지 법이다.
그 법의 작용으로 사람들에게 제각기 이익을 준다.
능통방편은 진실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
가는 것이므로 능통이라 한다.
이 이전(爾前)의 방편은 부처의 지혜로 이끌기 위한 가르침이고,
그런 의미에서 법화경에 도달하기까지의 수단이 되는 가르침이다.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이라고 있듯이, '이전경의 방편'은 법화경이
설해진 뒤에는 버려야 할 방편이다.
이것에 비해 '법화경의 방편'은 버려야 할 방편이 아니라 '진실'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진실이면서도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진실을 설한 품(品)이지만
'진실품(眞實品)'이 아닌 '방편품'이다. 여기에 '비묘방편'의 깊은 의미가 있다.
방편품 첫머리의 전개에 따라 말하면, 제불(諸佛)의 지혜는 심심무량이며,
일체의 성문(聲聞) * 벽지불(辟支佛:연각)이 생각하기 어렵다. 말로써는
다 설할 수 없는 구극의 법이다. 그러나 굳이 이 제불의 지혜를 표현하지 않으면,
중생은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있게 된다. 그래서 부처는 굳이 말로 설한 것이다.
부처가 스스로 중생에게 다가가 말한다
설한 말 자체는 설할 수 없는 진실과 비교하면 '방편'이다. 그러나 중생이
그 '말'로써 구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비롭기에 부처가 수자의(隨自意)로
전 민중에게 설한 법화경의 말. 그것이 비묘방편이며, 이미 그것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부처의 지혜와 일체인 방편이다.
니치렌 대성인이 법화경의 문자에 대해 "문자즉실상(文字卽實相)이고"(어서 383쪽)
, "법화경의 문자는 육만구천삼백팔십사문자, 일자(一字)는 일불(一佛)이니라"
(어서 971쪽), "법화경의 문자를 배견하심은, 생신(生身)의 석가여래를 만나
뵙옵는 것이라 생각하시라" (어서 1122쪽) 등으로 반복해서 가르치신 것도 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경의 방편과 법화경의 방편은 완전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방편'이란 산스크리트어의 원의(原義)로는 '다가가다'라는
의미인데, 이전경은 사람들을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방향이다.
중생이 부처의 지혜에 다가가는 방향이다. 그것이 법용 * 능통의 두 가지 방편이다.
이것은 법화경에 이르면 소용이 없어지는 방편이다.
그에 비해 법화경은 부처 지혜 그 자체를 수자의(隨自意)로, 현실세계를 향해
설명하고 표현한다. 부처가 중생의 세계로 다가서는 방편이 된다.
이것이 비묘방편이다. 이 법화경의 힘으로 인해 이전경도 그 진실의
일분(一分)으로서 되살아난다. 이것을 개회(開會)라고 한다.
방편품이 밝힌 제불(諸佛)의 지혜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며 바꾸어 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이다'라고 하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비묘방편(秘妙方便)의
'비(秘)'다. 또 중생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묘(妙)'이다. 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이다'라는 진리에 눈뜨게 하는 가르침이 '비묘방편'이다.
도다 선생님 - '우리가 범부로 있다는 것이 비묘방편'
예를 들면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제8에 나오는 "의리주(衣裏珠)의 비유
"<주7>도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친구가 그의 옷 속에 무상(無上)의 구슬을 넣어 꿰맸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한 나머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어 괴로워한다. 나중에 그 친구와 재회했을 때, 친구가 그 사실을 가르쳐주자,
비로소 자신이 보배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본래 보배 (흉중의 불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친구(부처)는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본인(구계의 중생)은 깨닫지 못했다.
범부가 그대로 부처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믿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비(秘)'이다. 그러나 깨달으면 '비(秘)'가 되지 않는다. '묘(妙)'의 힘이 나온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만 범부로 있다는 것은 비묘방편이며, 진실한 부처이다"
이것을 자각하면 비묘방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부처이지만 범부로 태어난다. 그것이 인간혁명(人間革命)하여 묘법을 증명하고,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광선유포를 하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건강하고 돈이
많아 윤택하다면 범부의 모습으로 고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묘방편이다.
어본존을 근본으로 끝까지 살아간다면, 어떠한 고뇌도 불계를 강하고
깊게 해주는 방편이 된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든 일이 묘법의
힘을 나타내는 방편이 된다.
'인생은 연극(演劇)과 같다'고 한다. 그대로이다. 어떤 사람은 상업으로,
어떤 사람은 교육계에서, 어떤 사람은 남편으로 아버지로 - 각자 연기하고 있다.
그 '배역' 자체는 방편이다. 그러나 배우(俳優)는 역이 끝나면 그 이외의
사명은 없다. 역을 연기할 때가 자신의 진실을 최대로 발휘하는 때이다.
생활즉신심이다. 불계라고 해도 현실이라는 구계의 무대에
즉(卽)해야만 나타낼 수 있다.
아무쪼록 이 인생이라고 무대에서 훌륭한 인간혁명의 드라마를 완벽하게
연기하기 바란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숙명에서 사명으로,
고뇌에서 상락(常樂)으로 - 이 역동적인 전환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 묘법이고 신심이다.
종횡무진의 대화로 홍법
불법의 생명선은 '대화'이다. 부처의 근본목적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부처와
똑같은 영지(불지견<佛知見>)를 연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방을 근본적으로 공경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해도 소용 없다'고 생각하면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존경하기 때문에
'끈질긴 대화'를 할 수 있다.
"널리 언교를 말하고, 무수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인도하여"의 경문은, 부처가
종행무진으로 대화하여 민중을 이끌어 왔음을 말한다.
석존도 니치렌 대성인도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대화'로 법을 넓히셨다.
또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도 대화와 좌담회의 달인이셨다. 상대가
서민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언제나 신념에 찬 당당한 '대화의 역사'를 남기셨다.
대화의 힘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꾼다. 성실한 대화는 상대방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햇빛이다. 명쾌하고 확신있는 말은 미혹의 구름을 걷어내는 새로운
바람이다. 불법을 이야기하는 일은 상대방의 생명을 변혁시키는 원천이 된다.
행 * 불행의 원인은 모두 자기자신에게
상대방을 구제하려는 자비의 대화. 진지한 대화. 상대방이 마음에 닿도록 부처는
지혜를 다해 연구했다. 그것이 '종종인연(種種因緣), 종종비유(種種譬喩)"이다.
다시 말해, 왜 그렇게 되는가라는 '내력(인연)'을 설하고, 알기 쉽게 '비유'를
구사하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인연'이라고 하면 현대인은 뭔가 선조(先祖)의 혼령 탓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불법의 본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행 * 불행의 원인은 모두 자기자신에게 있다.
본래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원인'을 뜻하는 말이다. 또 '인과(因果)' '유래'
'연계' 등의 의미도 있다.
예를 들어, 아소카 대왕의 인연에 대해 불전(佛典)에 이렇게 나온다.
덕승동자(德勝童子)와 무승동자(無勝童子)라는 두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덕승동자가 석존에게 흙떡을 공양하고, 무승동자는 합장을 했다.
석존은 종자(從者)인 아난(阿難)에게 "이 덕승동자는 아소카라는 왕이
되어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후에 이 덕승동자는 부처에게 공양한 인연으로 빈두사라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아소카이다.
이전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 생명에 '원인 * 결과의 법칙'이
엄연히 있음을 깨닫게 했다.
구원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유대
법화경의 '인연'에는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처와 민중의
'생명의 연대'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삼천진점겁(三千塵点劫),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라는 구원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부처와 중생의 관계이다.
도다 선생님은 이 법화경이 말하는 인연의 의의를 토대로 '종종인연(種種因緣)'에
대해 문저(文低)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구원원초(久遠元初)에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권속(眷屬)이었다.
그 인연 때문에 지금 말법에 니치렌 대성인의 제자로서, 고뇌에 빠진
이 나라에,니치렌대성인 멸후 6백 몇십년 만에 가난뱅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 어본존(御本尊)을 믿고 부자가 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종종인연'이란 바로 이것이다. 광선유포를 하겠다는 약속한 인연을
생각하면, 가난 따위의 고뇌는 한순간에 해소된다."
우리가 금세에 여러가지 번뇌와 맞서 격투하는 모습은 묘법의 공력(功力)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구원부터 묘법유포를 약속하고 '지금' 사명을 위해 태어났다.
고뇌에 빠진 채 헤어나지 못하는 지용보살 따위는 없다.
고난에 지는 지용보살 도 없다.
불법을 증명하려고 자신이 원하여 태어난 인연을 자각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한 사람을 '비유'로 들어 만인이 승리를
이어서 '종종비유'의 '비유'란, 이전경이 설한 '우화(寓話)'를 말한다.
그대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법의 진리도, 자연히 도리(道理)나
신변에 있는 생활상의 예를 통해 이야기하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근본은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이다. 자비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알기 쉽게 해주자'며 절묘한 비유를 설하셨다.
부처는 사람들의 기근에 응해서 모든 현상,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이전경은 번뇌를 '사람을 휩쓸고 가는 격류'에 비유하고,
불성(佛性)의 빛을 가리는 '덮개'에 비유했다. 심신(心身)을 불태우는 '불'에
비유하고, 엄청난 해(害)를 '독(毒)'에 비유하는가 하면, 길을 잃으면
나올 수 없는 '밀림' 등에 비유했다. 이처럼 번뇌의 두려움을 가르치고,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부처의 깨달음은 아니다. 이전경의
비유는 어디까지나 부처의 지혜의 일면(一面)만을 비유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비유에 집착하면, 부처의 깨달음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 이에 비해 법화경의 비유는 부처와 지혜와 일체(一體)인 비유이다.
부처의 깨달음과 지혜를 그대로 열어서 보기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근본의 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에서 되돌아볼 때, 법화경 28품을
포함하는 일체경은 모두,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장대한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문저에서 보면, 생활상에 나타나는 신심(信心)의 실증은 어본존의
공력(功力)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참으로 현실생활의 실증이라는 '비유'는
어본존의 진리를 웅변으로 말한다.
도다 선생님은 '종종비유'에 대해 "(대성인 재세 당시의 신도가)
사신홍법(死身弘法)에 면려하여 공덕을 받는 모습을 나타낸 사실은
우리에게 비유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문하의 활약은 후세의 귀감이다. 직장에서 고난을 극복한 시조 깅고(四條金吾),
신심을 반대하던 아버지를 입신시킨 이케가미(池上) 형제, 병마(病魔)의 숙업을
단절하고 후계의 사명을 완수한 난조 도키미쓰(南條時光), 죽은 남편의 몫까지
투쟁한 묘이치니(妙一尼) 등 고경을 극복하고 실증을 낸 문하들의 모습은,
같은 문제에 직면한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가 된다.
이 원리는 지금도 변함없다. 우리 체험담도 같은 원리이다. 승리한 '한 사람'의
체험은 많은 사람에게 이해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준다.
그대의 승리는 '만인(萬人)이 승리할 수 있다'는 훌륭한 예증(例證)이 된다.
그대가 어려움에 이기면, 남들에게 '그렇다면 나도 이길 수 있다' '저 사람도
이길 수 있다' '모두가 이길 수 있다'라는 확신을 준다. 사람들이 묘법의
힘을 말하는 데, '그 예로 저 사람을 보라' '그 예로 저 사람의 인간혁명 한
모습을 보라'하며 당신의 승리를 '비유(譬喩)'로 들어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인간혁명의 드라마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을 수많은 '종종인연(種種因緣)' '
종종비유(種種譬喩)'로 장식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역을 '이 사람도 이겼다.' ' 이 사람도 행복해졌다.'는
다종다양한 인간혁명의 '종종비유'로 장엄하게 꽃밭처럼 장식해야 한다.
집착을 간파하는 지혜
"온갖 집착을 떨쳐버리게 했다"는, 석존이 '인연'이나 '비유'를 들어 사람들의
갖가지 욕망과 미혹을 없애려고 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원흉은 여러가지 일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집착'이란
문자 그대로 '얽매이는 마음'이다. '번뇌'나 '욕망' 등이다.
석존은 이전경에서, 불행에 빠진 구계(九界)의 사람들에게 집착에서 떠나는 길을
가르쳤다. 그것이 '영리제착(令離諸著: 온갖 집착을 떨쳐버리다.)'이다.
그러나 법화경의 마음은 번뇌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묘법을 근본으로
했을 때 번뇌를 그대로 보리(菩提)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을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한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御義口傳)'에서 법화경 약왕품의 "일체의 苦(고)를
떨어버리게 하다"라는 경문에 대해 "이(離)의 자(字)를 명(明)이라고 읽느니라"
(어서 773쪽) - "'이(離)'의 자(字)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온갖 집착을 떨어버리게 했다'는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온갖 집착을 분명히
하다'는 의미이다. 집착을 떨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본다. 다시말해
번뇌와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간파하고 행복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확실히 '집착'을 떨쳐버리라고 말은 해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설사 떨쳐버리면 현실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중요한 점은 집착에 휘말리지 않고, 끝까지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을 집착이라고 분명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집착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되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본존은 집착을 집착으로 분명히 밝혀주신다. 그대들도 집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집착이 있다. 모두에게 집착이 있기 때문에 멋진 인생을
보낼 수 있다. 마음껏 장사에 집착하고 절복에 집착해야 한다. 단, 그 집착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집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신심이다. 집착에
이용당하면 안 된다. 자신의 집착을 끝까지 이용해서 행복해져야 한다."
이 '집착을 분명히 하여 끝까지 이용하는 경애' '마음껏 집착하여 멋진 인생을'
사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마음껏 번뇌를 불태우고, 그만큼 진지하게 제목을 올리고 행동하면 된다.
그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번뇌가 계기가 되어 자신의
성불(成佛)을 향해 나아간다.
신심은 올라야 할 '산'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산'에 도전해간다. 그 반복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자신만의 작은 번뇌에 사로잡힌 경애가 이윽고 벗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인류를 위해라는 '커다란 번뇌'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무엇을 위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인생의 근본목적이 결정되면 집착을 잘 이용하게 된다. 모든 것을 행복의
순풍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한 신심이다. 이 법리는 욕망에 흔들리는
현대사회에 틀림없이 커다란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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