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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 강의 2
[본문]
所以者何 佛曾親近 百千萬億 無數諸佛 盡行諸佛 無量道法
쇼이샤가 부쓰 조 신 곤 햐쿠 센 만 노쿠 무 슈 쇼 부쓰 진 교 쇼 부쓰 무 료 도 호
소이자하 불증친근 백천만억 무수제불 진행제불 무량도법
勇猛精進 名稱普聞 成就甚深 未曾有法 隨宜所說 意趣難解
유 묘 쇼 진 묘 쇼 후 몬 조 주 진 진 미 조 우 호 즈이 기 쇼 세쓰 이 슈 난 게
용맹정진 명칭보문 성취심심 미증유법 수의소설 의취난해)
소이(所以)는 무엇이뇨. 부처는 이전에 백천만억 무수(無數)의 제불(諸佛)에 친근하여
남김없이 제불의 무량의 도법(道法)을 행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명칭(名稱)이
널리 알려졌느니라. 심심(甚深) 미증유(未曾有)의 법(法)을 성취해서 기근에 따라 설하신
바의 의취(意趣)는 이해하기 어렵도다.
[통해]
(성문이나 벽지불이 제불의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왜냐하면 부처는
일찍이 백천만억 무수한 제불과 친근하여, 제불의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을
남김없이 실천하셨다.
어떠한 수행에도 용맹정진하고, 그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매우 깊고
일찍이 없던 법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성도<成道>한 이래) 중생의 기근(機根)에
응해서 법을 설하셨는데 그 진의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역]
용맹정진(勇猛精進) : 용감하게 고난을 극복하며 불도수행에 면려하는 것.
수의소설(隨宜所說) : 부처가 중생의 기근에 따라서 적절한 법을 설하는 것.
그리고 설한 법문의 내용. 부처가 수타의에서 설한 방편의 제경(諸經)을 말한다.
의취(意趣) : 부처의 참뜻.
[강의]
왜 제불의 지혜가 심심무량하고, 지혜의 문이 난해난입(難解難入)한 지를
부처의 과거세의 수행을 나타내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석존은 부처의 깨달음이 얼마나 험난한 불도수행 끝에 얻을 수
있는지를 이렇게 설했다.
"어떠한 부처도 과거에 무수한 제불을 섬기고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수행을 용맹정진했다. 그 결과, 미증유의 법을 성취했다. 그 수행에 비하면 사리불 등의 수행은 아직 얕다.
그러므로 부처의 무량한 지혜로 설한 가르침의 진의(眞意)는 알 수 없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이해가, 용기가, 행동이
여기에서 과거세의 수행으로써 부처의 지혜가 심심무량하다는 점을 밝힌 부분이 흥미롭다. 부처가 성취한 지혜 자체는 쉽게 나타낼 수 없으므로, 성불의 원인이 된
수행으로써 그것을 설명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당시 인도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윤회생사(輪廻生死)<주4>는 상식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무수한 제불을 섬겼다는 실례(實例)만큼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도 없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 받아드리면 이해가 깊어진다. 경애가 넓어진다.
진심으로 받아드리면 용기와 희망이 솟는다. 그리고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소중하다. 상대를 깊이 이해시키고, 상대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힘이 '말의 힘'이며, '소리의 힘'이다. 사리불도 석존의 '
언론의 힘'으로 광대한 '불지(佛智)'로 들어가는 구도의 마음이 싹텄다.
부처란 '불도수행'의 달인
여기에서는 먼저, 부처의 지혜와 경애란 '무수한 부처'의 슬하에서 '무량한
수행'을 완수하고 성취한 결과임을 밝혔다.
부처는 과거에 온갖 수행을 경험하고 완수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란 불도수행의
달인(達人)이다. 석존의 생명에도 온갖 수행의 경험과 공덕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응해서, 때에 응해서 적절한 가르침을 설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의
쌓아온 풍부한 경험이 현재의 풍요로운 마음으로 이어진 사람이다.
참된 리더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말뿐인 명령자가 아니다. 먼저 자신이 행동하는 솔선수범의 사람이지,
지위나 위치에 눌러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노고하는 사람이지, 요령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하물며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자행화타의 제목에 '만행만선'의 대공덕이
어쨌든 부처의 생명은 불가사의하다. 한 사람의 생명에 무량한 수행의 공덕이 들어 있다.
'일(一)'에 '일체(一切)'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의 '묘(妙)'가 있다. 대성인은
이 '묘(妙)한 생명'을 남묘호렌게쿄로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법화경의 본문(本門)의 간심(肝心)인 묘호렌게쿄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공덕을 모아서 오자(五字)로 하였으니" (어서 1282쪽)
석존은 물론이고 삼세시방의 제불이 행한 모든 수행과 선근(善根)의 공덕은 전부
남묘호렌게쿄에 들어 있다는 말씀이다.
제목에는 '만행만선'의 공덕이 들어 있다. 삼세시방의 제불이 실천한 모든 수행,
모든 선행(善行)이 전부 갖춰져 있다. 따라서 문저에서 본다면 "백천만억
무수의 제불에게 친근하여 남김없이 제불의 무량한 도법(道法)을 행하고"의
경문도 남묘호렌게쿄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신심의 마음'에 말법에서 성불하는 길이
또 여기에서 부처의 무량한 수행을 설하는 까닭은, 그와 동일하게 수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부처를 신뢰하고, 이제부터 석존이 설하는 바를 믿으라는 뜻이다.
석존도 과거에 무량한 수행을 완수한 부처이다.
유명한 설산동자(雪山童子)나 시비왕(尸毘王)의 이야기도 과거세에 석존이
수행에 용맹정진한 모습을 나타내는 설화이다.<주5>
물론 '무량한 도법'을 행하는 수행은 말법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
'만행만선의 공덕'이 들어 있는 남묘호렌게쿄를 자행화타에 걸쳐 수지하면,
거기에 '무량한 도법'을 수행한 모든 공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성인도 '부처가 무량한 도법을 수행하는 '마음'을 소중히 하셨음을
어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대성인은 설산동자의 수행이 말법의 범부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범부는 지(志)라고 하는 문자를 심득(心得)하여
부처가 되느니라" (어서 1596쪽)
말법에는서 정법을 향한 '마음(지<志>)'이야말로 성불의 인(因)이 된다.
대성인은 신심의 '마음'을 관철한 용자(勇者)를 최대로 칭찬하셨다.
예를 들면 대성인은, 가마쿠라에서 멀리 사도(佐渡)까지 험난한 산과 강을 넘고
거친 바다를 건너온 시조 깅고(四條金吾)에게 "(설상동자에게도) 어찌 뒤지겠느뇨."
(어서 1193쪽)라고 하며 격려하셨다.
또 대성인은, 묘이치니(妙一尼)의 남편이 묘법을 끝까지 수지하다 세상을 떠나자
"설산동자와 다를 바 없는 공덕이 있다."(어서 1254쪽, 취의)고도 말씀하셨다.
그 방궤(方軌)에 비추어 보면, 묘법에 살고 광포를 위해 달리는, 한분 한분의
'마음'에 만행만선의 공덕이 들어 있다.
묘법에 제불이 행한 역겁수행의 공덕이
"부처는 이전에, 백천만억 무수의 제불과 친근하여 남김없이 무량의 도법을
행하고"라는 경문에 나타난 '성불관(成佛觀)'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이 경문에서는 부처가 과거에 상상을 초월하는 장원(長遠)한 기간 동안 생사를
되풀이하며 무수한 부처를 섬긴 수행을 불인(佛因)으로 하여, 그 결과 존극한
불과(佛果)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이 수행을 "역겁수행(歷劫修行: 겁을 지나는 수행)"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적문(迹門))에서 말하는 일왕(一往)의
불인과 불과에 지나지 않는다.
도다 선생님은, 문저의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역겁수행은 필요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경문을 이렇게 강의하셨다.
"문저로 읽으면,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는 부처(어본존)는 백천만억의 제불을 출생한 능생(能生)의 근원<주6>이다. 그러므로 소생(所生)의 처지 다시 말해 배례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난행(難行) * 고행(苦行)도 없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백천만억의 제불에게 친근했던 것 이상의 공덕이 있다. 또 그것이 제불의 무량한 도법을
남김없이 행하는 것이 된다."
남묘호렌게쿄는 모든 부처의 '능생(能生)의 근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의 부처를
성불시킨 근본원인은 역겁수행이 아니라 남묘호렌게쿄라는 근원의 법을
각지(覺知)했기 때문이다. 그 남묘호렌게쿄를 곧바로 수지하는 것이 말법의 불도수행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불법에 있어서는 역겁수행이 필요 없다.
니치렌대성인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존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의 이법(二法)은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에 구족하도다.
우리들이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
(어서 246쪽)
성불관의 혁명 '수지즉관심'
남묘호렌게쿄에는 석존을 비롯한 삼세시방의 제불이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했던
'인행(因行)'도, 그 '과덕(果德)'도 모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묘법 오자를 수지하는 가운데, 자연히 석존을 비롯한 제불의
'인과의 공덕'을 모두 갖추고, 성불하게 된다.
이것을 '수지즉관심(授持卽觀心: 수지가 즉 관심<성불의 뜻>이 된다.)'이라고 한다.
또 '즉신성불(卽身成佛: 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이라고도 '직관정관(直觀正觀:
곧바로 정관<부처의 지혜, 경애>에 도달한다.)'이라고도 한다.
니치렌 대성인, 이 묘법을 수지한 사람은 "석존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된다."
(어서 1443쪽, 통해)고 말씀하셨다. 대성인의 불법으로 '석존과 같은'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는 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 성불이라고 해도 먼 미래나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인 불법은 만인의 '일생성불(一生成佛: 일생동안에
성불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테면 '수지즉관심'은 성불관의 혁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몇천만년이나 수행한 방편품의 부처들 보다도, 우리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단 한마디 부르면 그것만으로 부처가 되는 수행이 됩니다."
한번의 창제(唱題)에도 무량한 공덕이 있다. 제불이 가나긴 시간 동안 몇번이고
바꾸어 태어나 수행하여 얻은 공덕을 우리들은 잠깐사이에 남김없이 얻을 수 있다.
이만큼 위대한 묘법이다.
"머나먼 저편에 있는 '성불(成佛)'이라고 하는 정상을 목표로 오로지 계속해서
산길을 오른다." - 이것이 통상적인 성불관이라고 한다면, 니치렌 대성인이
불법은 '만인을 순간에 정상에 오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위의 산들을 저 멀리 내려다보며, 360도 활짝 열린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관망하는 듯한 경애. 이 넓디넓은 부처의 경애에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현실 속에 뛰어들어, 이 경애에 선 기쁨을 끝까지 이야기한다 -
이 실천이야말로 대성인 불법의 제호미(醍醐味)이다.
'신심'과 '행동' - 용맹정진하는 사람이 부처로
"용맹정진하여 명칭이 널리 알려졌느니라"라는 경문은 이전(爾前) * 적문의 부처의 수행을 밝힌 글이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신심상에서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먼저 '용맹(勇猛)'이란 '신심'이다. 니치칸 상인(日寬上人)은 '의의판문초(依義判文抄)'에서 "용감하게 함을 용(勇)이라 하며 지(智)를 다하는 것을 맹(猛)이라 한다"는 석(釋)을 인용해, 용감하게 '신력(信力)'을 면려하는 것이 '용맹'이라고 말씀하셨다.
결의하여 용감하게 끝까지 행하는 것이 불도수행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용감하게 도전해야 수행을 성취할 수 있다.
용맹심이 없으면 숙명의 쇠사슬은 끊어버릴 수 없으며, 장마(障魔)를 타파할 수도 없다.
우리들의 불도수행인 근행은, 자기 생명의 도전과 창조의 드라마이다. 신심으로 용감하게 일어서면 절망과 불안의 어둠이 사라지고, 희망과 전진의 빛이 비친다. 이렇듯
'용감하게 일어서는 마음'이야말로 '신심'이다.
또 '정진'이란, 자행화타에 걸친 '제목(題目)'의 실천이다. 용맹심이 있어야
정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니치칸 상인은 이어서 "무잡(無雜)이므로 정(精), 무간(無間)이므로 진(進)"
이라는 묘락(妙樂)의 말을 인용하여 창제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무잡'이란 불순물이 없이 순수한 것. '무간'이란 끊임없이 언제나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하는 창제의 실천은, 순수하게 끊임없이 매일매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들의 생명연마, 일생성불의 수행이 된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서 790쪽) -
'일념에 억겁에 필적하는 노력을 다하면, 본래 내 몸에 갖추어진 무작삼신의
부처의 생명이 순간순간 일어난다. 실로 남묘호렌게쿄는 정진행이다.'
우리가 부르는 남묘호렌게쿄는 정진행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계속 투쟁하는 사람의 흉중에 무작의 삼신, 즉 부처의 무량한 지혜와
자비가 염념(念念)에 용현(涌現)한다. 용맹정진하겠다는 '신심의 일념'이
그대로 '부처의 일념'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앞에 말한 '수지즉관심'이다. 바꾸어 말하면, 용맹정진하는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대성인이 말씀하셨다.
창가학회는 이 용맹정진하는 신심이 있었기에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용맹정진이란 '진지함'이다.
나는 어느 해외 저널리스트가 '학회가 크게 발전한 이유'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것은 필사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벗을 위해, 사회를 위해,
평화를 위해 오직 진지하게 열심히 행동했기 때문에 오늘날 광선유포의 전진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어느 청년이 마키구치 선생님께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종교를 목숨 걸고 수행한다 - 그 노력과 용기가 있으면 알게 된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용맹정진하라. 실행이다. 정진이다. 늙기는 했지만 나도 실천하고 있다."
참으로 '용맹정진'이란 학회정신이 원류(源流)이다. 용감하게 도전하면 생명의
약동하고 지혜도 생긴다. 환희가 있고 희망이 용솟음친다.
순간순간 자기완성을 향한 인(因)을 끊임없이 쌓으려고 용맹정진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승리자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사자왕(師子王)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또 넓디넓은 마음으로 투쟁하는 것이 곧 용맹정진의 실천이다.
삼세시방의 불 * 보살이 지용의 동지를 상찬
그리고 다음의 "명칭이 널리 알려지셨느니라"란 경문상으로는 용맹정진의 수행에 면려하는 사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는 말이다. 용맹정진이므로 이름을 떨쳤다. 훌륭한 불도수행이므로 제불의 마음도 움직인다.
대성인은 문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임종을 하게 되면 영산(靈山)으로 가는 길에서 "니치렌의 제자"라고 밝히시라. 대성인의 이름은 시방의 정토(淨土)에 알려져 있다. 천지도 알고 있다. '니치렌의 제자'라고 밝힌다면 어떠한 악귀(惡鬼)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어서 1480쪽, 취의)
도다 선생님도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산에 가면 '광선유포의 동량(棟梁)인 도다 조세이의 제자이다.'라고 가슴을 펴고 이름을 대라."
용맹정진하며 광포에 끝까지 살아가는 수행자의 이름은 시방의 제불 * 보살, 범천(梵天) * 제석(帝釋)을 비롯하여 모든 제천 사이에 알려지고, 널리 넓혀진다.
왜냐하면 정법을 말법에 홍통하는 것은 난사(難事) 중의 난사라고 경문에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법화경을 현실에 넓히는 위업이 시방세계로 널리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삼세시방의 제불 * 보살, 제천선신이 정법을 홍통하는 용자(勇者)를 수호한다는 사실은 단연코 틀림없다.
어본불에 연결된 긍지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1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 법화경은 부처의 멸후에는 수지하기 어렵다. 만약 잠시라도 수지하는 자가 있다면
나(석존)도 제불도 환희하고 그 사람을 찬탄한다" (법화경 393쪽, 취의)
또 대성인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법화경에 이름을 세우고 몸을 맡기시라." (어서 1360쪽)
"대신력(大信力)을 내어서 법화종(法華宗)의 시조깅고(四條金吾) * 시조깅고라고
가마쿠라 중의 상하만인 내지 일본국의 일체중생의 입으로 칭송받으시라" (어서 1118쪽)
"지역과 사회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정법(正法)의 명사(名士)'로 빛나라." 하는 마음이셨다. 또 반드시 그와 같이 명성이 넓혀져 간다.
법화경과 연이 있는 이름이야말로 최고의 자랑이다.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에게 연결된
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빛난다. 그 이름은 반드시 시방의 제불에도 통한다.
그 원리에서 보면 오늘날 SGI의 이념과 운동이 전 세계에 넓혀지고, 불법에
대한 찬탄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모습이야말로 "명칭이 널리 알려졌느니라"라는
경문에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 192개국(2012년 12월 현재)에 이르는 묘법유포의 전진은 불교 역사상
전대미문의 위업이다. 그 성업(聖業)을 완수한 사람이 몇백만에 이르는
지용의 동지 여러분이다. 이 이상 진지하게 홍교에 면려하며, 이 이상 세계에
정법을 선양한 개인이나 단체는 어디에도 없다.
여러분의 이름이 또 창가학회의 이름이 인류사에 황금의 빛을 발해갈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이름이 우주시방의 제불에게 널리 알려지고 전해지고 있음은
'명칭보문(名稱普聞)'의 원리에 비추어 명백하다.
대성인은 '미증유의 어본존'을 건립
"심심 미증유의 법을 성취하고"라는 경문은, 우리가 믿는 묘법은 '일찍이 없는'
최고의 법이라는 내용이다. 눈 앞에서 여명이 순식간에 넓혀지는 듯한 경문이 아니겠는가. 부처는 무수제불(無數諸佛)을 섬기고, 무량도법(無量道法)을 행했다. 그러한 매우 힘든
역겁수행 끝에 '심심미증유의 법(매우 깊고, 일찍이 없었던 법)'을
성취하고 佛果(불과)를 얻었다.
천태는, '심심'이란 '깨달음의 오저(奧底)에 이르는' 깊이라고 설명했다.
또 '미증유'란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고, 부처 자신도 깨달음을 열기까지는 몰랐다는 말이다.
하물며 이승이나 보살을 비롯한 구계(九界)의 중생이 알 리 없다. 그러므로 방편품에는 뒤에 "유불여불(唯佛與佛) 내능구진(乃能究盡)"이라고도 설한다. 다시말해, 다만 부처와 부처만이 알 수 있는 법인 것이다.
이 '미증유의 법' '부처만이 아는 법'을 밝힌 가르침이 법화경이다.
그 이전의 경문은 구계의 중생의 마음에 맞춰 설한 수타의의 가르침이었다. 법화경은 구계의 중생이 '일찍이 들은 적이 없는' 가르침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미증유'의 법이다.
'부처만이 아는' 미증유의 비법(秘法). 그것을 굳이 전 민중에게 공개한 것이 법화경이다.
참된 비법이란 자신만이 알고 숨기고 감추어 자신을 신비화하고 권위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닛켄종의 권위주의는 법화경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증거이다.
참된 '비법'이란 "때(시<時>)"가 오면 전 민중의 병을 구제하기 위해
대음성(大音聲)으로 가르치고 넓혀, 그 혁혁한 힘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비법'이다. 그러기 위한 '심심 미증유의 법'이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서 곳곳에서 삼대비법(三大秘法)의 어본존을 "미증유의
대만다라(大曼陀羅)"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이 어본존은 법화경 중에서도 수량품에서 비로소 설해 나타내고, 신력품에서
지용보살에게 부촉되었다. (어서 905쪽, 취의)
"석존 멸후의 정상(正像) 이천년에는 어본존의 이름조차도 나타나지 않았고,
천태와 전교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어본존을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니치렌이 비로소 도현(圖顯)했다.(어서 1243쪽, 취의)
대성인은 부처만이 아는 대비법을 '미증유의 어본존'으로서 말법의
일체중생에게 남겨주셨다. 그 때문에 일신(一身)에 대난을 받셨다.
이 대자대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감사와 감격의 신심을 없애면 안 된다.
'미증유의 대만다라'를 향한 불타오르는 '신심' - 그 '신심' 속에 실은
'심심 미증유의 법'이 현현(顯現)하고 있다.
기신 안에'빛나는 보탑'을 세워라
도다 선생님은 "심심 미증유의 법을 성취해서"라는 경문에 대해 "문저하종(文低下種)의
대어본존을 우리 기신(己身: 지기 몸) 안에 세웠다는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심심 미증유의 법'이란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이 생신(生身)의 몸, 이 현실의
생명상에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유명한 '아부쓰보어서(阿佛房御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신이 보탑(寶塔)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어서 1304쪽) - '귀천상하에 관계없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대로 그 몸이 보탑(寶塔)이고,
또 다보여래(多寶如來)'라는 말씀이다.
'자기 몸' 안에 남묘호렌게쿄의 '보탑'을 세우시오- 이것이 '심심 미증유의
법을 성취해서'의 경문에 담겨 있는 마음이다.
석존 한사람만이 아니라, 만인이 '심심 미증유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만인이 자기 몸에 보탑을 세우고 보탑의 당체로서 찬연하게 빛난다.
그리고 이 빛나는 생명의 보탑이 이 지구상에 무수하게 늘어선다.
이것이 대성인 불법이 말하는 '성취심심(成就甚深) 미증유법(未曾有法)'의
실증이다. '일찍이 없던 대법(大法)'으로써,'일찍이 없던' 인류사의 여명을
우리가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미증유의 법'이므로 그것을 넓히려면 '미증유의 행자(行者)' '미증유의
지용의 용자(勇者)'가 출현해야 한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미증유의 광선유포를 위해 대지에서 솟아나온 학회의 자식이며
지용보살(地涌菩薩)이다."
여러분은 도다 선생님의 이 마음을 계승하여 '미증유의 실천'에 매진하고 있다.
이 '미증유의 광선유포'를 추진한 공덕도 무량무변한 '미증유의 복덕'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기 바란다.
부처의 지혜는 자비에서 나온다
"기근에 따라 설하신 바의 의취(意趣)는 이해하기 어렵도다"란 부처의
'지혜의 문(門)'이 난해난입인 이유를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결국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은 구계(九界)의 중생의 여러 기근(機根)에 맞추어
설한 것이지만, 그 '의취', 다시 말해 부처의 '진의(眞意)'를 아직 설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부처가 과감한 수행 끝에 얻은 '심심 미증유의 법'을 곧바로 설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衆生)의 차원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정법(正法)을 가르쳐도 중생이 어중간하게 이해하거나, 의심을 일으켜
오히려 정법을 부수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석존 자신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한 직후 한때는 법을 설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면, 중생은 영원히
미혹의 어둠 속에 갇힐 것이다. 여기에 인류의 선각자(先覺者)인 석존의 갈등이 있었다.
그 남모르는 고충을 극복하고 법을 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석존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올바르게 법을 회득(會得)할 수 있도록 종횡으로
지혜를 발휘하여, 깨달음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지를 고심했다.
그것이 석존이 자비이다. 지혜는 자비에서 나온다.
삼승(三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가르침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부처가 각각의 기근에 맞추어 성문의 길, 연각의 길,
보살의 길이라고 했듯이, 개개인에게 응한 가르침을 설했다. 그렇게 해서 부처의
'지혜의 문'까지 이르게 하려고 했다. 그것이 이전권교(爾前權敎)의 방편(方便)이다.
경문에서는 그것을 "기근에 따라 설하신" - 다시 말해, 중생의 기근에 응해
적절하게 설하신 가르침이라고 한다.
부처의 진의(眞意)는 어디까지나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게 길, 일불승(一佛乘)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문이나 벽지불 등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임시의 가르침에 집착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 인류를 부처가 되게 하고 싶다"는
부처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는 진실한 법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의취(意趣)는 이해하기 어렵도다" - 다시 말해, 부처의 진의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처가 일부러 어렵게 설법한 것은 아니다. 결국, 받아들이는
중생 쪽의 '불신(不信)'과 '집착' 등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의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을 닫아버리면 정론(正論)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잘못된 사상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인생을 파괴하고 만다.
'부처의 진의를 아는 사람'이란 정법을 유포하는 사람
사실은 삼류강적(三類强敵)이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까닭도 법화경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취난해<意趣難解>), 방편권교(方便權敎)에 집착한 데 있었다.
경문에는 "탁세(濁世)의 악한 비구(比丘)들은 부처가 중생의 기근에 따라서
서한 방편의 법을 알지 못하고 악구(惡口)하며"(법화경 420쪽)라고 있다.
'말법의 탁악(濁惡)의 악승(惡僧)'은 이전권교(爾前權敎)가 '방편(方便)으로
기근에 응해 설하신 법'임을 모르고, 그런 낮은 가르침에 집착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수지한 이전교(爾前敎)를 타파하는 법화경 행자에게
적의(敵意)를 품고 그들을 박해했다. 부처의 진의를 왜곡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처의 가르침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박해한다. 어느 시대라도
전자(前者)는 많고 후자(後者)는 적다.
탁악한 사회에서 박해를 가하는 쪽은, 법화경 행자에 대한 악구를 퍼뜨려
'나쁜 여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을 내쫓으려고 한다.
이런 전도(轉倒)된 탁세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계속 외쳐야 한다.
이겨서 정의를 증명해야 한다.
대성인 멸후(滅後)에도 오직 홀론 일어서신 닛코 상인(日興上人)이
대성인의 정의를 지켰다. 닛코 상인이 침묵하셨다면 '오노승(五老僧)이
정의'라는 역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닛코 상인은 엄격하리만큼 오노승의 사의(邪義)를 타파하셨다.
오노승은 대성인의 '의취(意趣)' 다시 말해 어본불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대성인의 '의취'는,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유포하고 말법의 모든 민중을
행복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오노승은 이 삼대비법을 나타내신
대성인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오직 닛코 상인 한분만이 대성인에게 상수급사(常隨給仕)하고, 난(難)을 견디셨다.
그리고 스승의 말씀대로 과감하게 홍교를 전개하셨다. 스승과 함께 마음을 합쳐
투쟁했기 때문에, 대성인의 '의취'를 알았다.
'스승의 마음'이 올바르게 전해졌느냐 여부는 '제자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삼대비법(三大秘法)을 수지했다고 자칭해도 만인의 행복을 원하는 광선유포를 위한 행동이 없다면, 대성인의 '의취'를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행복의 정상으로
대성인의 인난홍통(忍難弘通)으로부터 700여년. 그 대성인의 정신이 참으로 멸하려고
할 때, 창가학회가 출현했다. 학회는 대성인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불의불칙의 단체이다.
'대성인 직결' '어본존 근본' '어서 근본'을 관철하는 SGI만이 대성인의 '의취'를 올바르게
전하는 유일한 화합승단(和合僧團)이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정의의 증명자'로서,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이야기해 가자.
긍지도 드높이 당당하게, 소리도 아끼지 않고, 황금이 웅변으로 ….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의취는 이해하기 어렵도다"라는 경문을 우리 실천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는 앞날을 한눈에 내다보시지만, 이쪽은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지나간 뒤쪽만 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어본존의 마음을 깨닫기 어려운 법이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똑바로 어본존을 믿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공덕이 나온다. 도중에 의심하면 안 된다."
여기에 신심의 극의(極意)가 있다. 어본존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에 통한다. 이것이 '이신대혜(以信代慧)'이다.
일체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이 대성인의 '의취(진의)'이다. 그러므로
대성인 불법을 끝까지 수지한 사람이 행복해지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그 도상에는 자기자신의 숙업 등 갖가지 일이 일어난다. '어째서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현상(現象)에 일일이 분동하면 안 된다. 최후에는 반드시 행복해진다고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일체를 행복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수행이고,
단련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가서 비로소 하나하나의
현상에 대해 깊은 '의취'를, '의미'를 알게 된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 (어서 234쪽)
- '나와 나의 제자는 많은 난(難)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른다.'는 말씀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신앙의 승리자이고, 대성인의 '의취'를 깨닫는 것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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