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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26-4 창가학회를 창립

by 행복철학자 202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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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창가학회를 창립

창가학회 창립일이 된 1930년 11월 18일은

《창가교육학체계》를 발행한 날이다.

생각하면 발간 자체가 사제공전의 산물이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교육학설을

‘창가교육학설’이라고 명명한 시기는 마키구치가

도쿄 시바에 있는

시로카네심상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교육국장과 장학관 등은, 부정을 용서하지 않고

교육개혁을 주장하는 마키구치를

배척하려고 획책했다. 마키구치는 소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는 중에 이제껏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사색을 바탕으로, 뒤를 이을 소학교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는

교육학설을 발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겨울 밤, 마키구치는 도다의 집에서 화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밤늦게

대화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도다는 교육학설을

남기고 싶다는 마키구치의 생각을 들었다. 많은 학자가

유럽이나 미국의 학문에 심취하던 시대였다. 일본의 일개

소학교 교장이 학설을 출판한들 팔린다는 전망이 없었기에

받아주는 출판사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마키구치는 자신의 교육학설을 출판하고 싶다는 뜻을

도다에게 말하고 나서

곧바로 그 말을 취소하듯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팔리지도 않을 책을 내서 손해를

보겠다는 출판사는 없겠지….

”도다는 힘주어 말했다. “선생님, 제가하겠습니다!”

“하지만 도다 군. 돈이 드는 일이네” “괜찮습니다.

 

제게는 많은 재산은 아니지만

1만 9000엔이 있습니다. 그 돈을 모두 내놓겠습니다.”

소학교 교사 초봉이 50엔 전후인 시절이었다. 스승의

교육학설을 실증하려고

시습학관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운영하던 도다는,

마키구치의 교육사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저는 홋카이도에서 맨몸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다시 맨몸이 되어도 별일 아닙니다.”

마키구치는 가만히 도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결심했다면 한번 해보세!”

마키구치의 눈이 생생하게 빛났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 교육학설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겠는가….”

그러자 도다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교육학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지.”

“그렇군요 … 하지만 가치창조철학이나

가치창조교육학이라고 하면

이상하겠지요.”

“확실히 그 명칭은 확 와 닿지가 않는군. 창조교

육학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도다는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차라리 창조의 ‘창’과 가치의 ‘가’를 따서 ‘

창가교육학’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 좋은 이름이군!”

“그러면 《창가교육학》이라고 정하시지요.”

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이렇듯

‘창가’라는 명칭은 스승과 제지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교육학설을 발간하는

난문제는 원고를 어떻게 정리하고

통합하느냐 였다. 원고라고 하지만, 대부분 마키구치가

교장직이라는 직무 속에서

봉투나 광고지 뒷면 등 못쓰는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써둔 글이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거기에 순서를

매기고 구상하여 문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도저히 책으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힘든 작업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마키구치도 고민하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나선 사람도 도다 조세이였다.

“도다 군, 그 일까지 자네에게 시킬 수 없네. 더군다나

아무리 자네가 수학의 재능이

있어도 문장을 정리하는 일은 전혀 다른 분야라서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마키구치는 도다에게 더 이상 고생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선생님, 제게 문장을 다듬는 재주는 없을지 모릅니다.

또 어렵게 쓰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 도다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난해한 책을 출판한들 누가  읽겠습니까.

선생님은 누구를 위해 출판하시려고 하시는지요.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읽기를 바라십니까. 도다가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책으로 괜찮으시면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도다가 이 작업을 맡게 됐다. 조각조각 나눠진

마키구치의 원고 가운데

중복이 되는 부분은 가위로 잘라낸 뒤, 자기 집의

4평짜리(13.2 제곱미터) 방에 죽

늘어놓았다. 그러자 전체적으로 일관된 논지와 탁월한

학설이 광채를 내뿜었다.

도다는 마키구치에게 보은감사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만든 편찬작업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1930년 11월 18일, ‘발행처

창가교육학회’의 이름으로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표지의 책이름과 마키구치라는 저자명을 금문자로

장식했다. 이 부분에도

제자로서 신심을 다하는 도다의 자세가 담겨 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 ‘

서언(緖言: 머리말)’에서 발간에

즈음하여 청년들이 원고정리와 인쇄를 교정하느라

애를 썼다고 소개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도다 조세이의 지대한 공적을 언급했다.

서언에는 도다가 시습학관에서 마키구치의

교육학설을 실험해 다소 성공을

거둠으로써 가치를 인정하고 확신을 얻어, 이 학설을

완성하고 보급하는데 온 힘을 바쳤다고 씌어 있다.

 

또 도다의 저서 《추리식 지도산술》에 관해서도 “참으로

창가교육학의 실증이자 또한 선구다” 하고 칭찬했다.

이어서 자신과 도다를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

(폴케오이스콜레)를 창설한 니콜라이

그룬트비와 그의 젊은 후계자 그리스틴 콜에 비춰보았다.

그리고 도다가

존재함으로써 “암담한 창가교육학의 앞날에 한줄기

공명을 본 느낌이 든다.” 하고 썼다.

참으로 창가학회는 그 연원부터 사제관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창가의

혼은 사제의 길을 영원히 전하고 남기는 가운데 맥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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