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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26-7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이 펼친 불멸의 투쟁

by 행복철학자 202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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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군국주의와 철저히 싸우신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 장대한 투쟁을

펼치신 두 분의 모습은 그야말로 왕자였습니다.

검사에게 조사받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모습은

오히려 검사를 절복하는 듯한

의연한 태도였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말을 결연한 논리와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도리에 입각해 정면에서

당당히 주장하셨습니다.

 

가혹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짬을 내어 교도관을 절복하고

검사에게 ‘가치관’을

설하면서 날마다 끊임없이 어서를 배독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고결한 모습입니까. 강인한 신앙입니까.

이렇게 위대한 창립자를 둔 사실은 창가학회의 커다란

자랑이자 긍지입니다.

 

또 어떠한 권위와 권력에도 타협하지 않고 한결같이

대법유포를 위해 행동하신

마키구치 선생님의 정신은 학회의 전통정신으로 확고히

자리잡아 아직도 맥맥히

계승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감옥에서도 유유자적한 경애로 생활하신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오로지 신앙에 전념하는 것이 요즘 내 일입니다. 신앙만 하고

있으면 어떤 불안도 없습니다.

마음 둘 곳이 있어 지옥에 있어도 안전합니다.”

1944년 1월 17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단,

‘지옥’이라는 글자는 검열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선생님은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물론 난방기구 등은

하나도 없고 1.5평 크기(5제곱미터)의

마룻바닥에 딱딱한 다다미가 한 장 깔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어떤

불안도 없다’고 쓰셨습니다.

무엇에도 지지 않는 또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 용자’,

‘신앙의 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칸트의 철학을 정독하고 있다. 100년 전과 그 뒤의

학자들이 손대고 싶어도 손대지 못한

‘가치론’을 내가 저술했다. 게다가 위로는 법화경의

신앙에 결부시키고 아래로는

수천 명이 낸 실증을 보면서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그러므로 삼장사마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경문 그대로다.

”(1944년 10월 13일)

지금은 그 때보다 수천 배. 수만 배의 규모로 광포가

추진되어 굉장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장마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어서에 비추어 경문에

비추어도 당연한데. 별 것 아닌 일로

푸념하거나 신심이 흔들리면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여하튼 마키구치 선생님의 투철한 신심,

부동의 결의 그리고 넘치는 정의감과 정열을 영원한

학회정신으로서 후세에

계승시키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함께 감옥에 있던

도다 선생님은 날마다 오로지

고령이신 스승을 걱정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훗날 “3일을 못 뵈면 1년을 못 뵌 듯한

마음으로 섬겼다.” 하고 술회하셨는데,

스물한 살 때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마키구치 선생님을

모시고 끝까지 받들었습니다.

 

그런 스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낀

낙담, 분노, 슬픔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도다 선생님은 오로지 홀로 진정한

제자로서 용감하게 일어서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 심정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자, 두고 봐라! 선생님이 올바른지 그

른지 증명하고야 말겠다. 만약 내가 별명을 사용한다면

암굴왕의 이름으로 뭔가

큰일을 하여 선생님께 보답하겠다.”

도다 선생님은 1954년 11월 마키구치 선생님의 법요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아직 선생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일생을 통해

선생님의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증명할 각오입니다.”

열렬한 사제의 서원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 선언대로 마키구치

선생님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스승의

정의를 증명하셨습니다. 이 진지한 정신과 실천에 숭고한

사제의 진실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나도 도다 선생님의 모습이 내 목숨이라는 마음으로

오늘날까지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 법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나는 부모와 자식 관계라고 믿습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의미는

선생님의 정신적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또 여기에 커다란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가치론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또 커다란 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불법을 기조로 한

‘평화’, ‘문화’, ‘교육’운동을 향한 첫걸음이 된 이론체계에

관해서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마키구치 선생님이 목숨을 깎아 구축하고 남겨 놓은

존귀한 유산인 ‘창가’라는

광선유포의 ‘정신적인 성채’를 절대로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침범당하면 안 됩니다.

더욱더 공고히 더욱더 반석같이 구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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