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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無作)의 삼신(三身)
무작(無作)이란 외부의 작용을 받지 않고 스스로도
겉치레를 하지 않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처음도 없으며 끝도 없고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멸 (生滅)도 하지 않는 것을 「무작」이라 합니다.
삼신(三身)이란 부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을 말합니 다. 우리들의 생명을 비롯하여 우주의 모든
생명에는 모두 삼신을 갖추고 있습니다.
응신(應身)이란 외계(外界)에 나타난 색형(色形), 행위이며
보신(報身)은 내면에 구비 되어 있는 힘 (지혜(智慧))이고
법신(法身)은 생명(본래 실재(實在))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달의 체(體)는 법신(法身)이고 달빛은 보신(報身)이며
달그림자는 응신(應身)입니다. 하나의 달에 세 가지의
이치(理致)가 있고 일불(一佛)에 삼신(三身)의 덕(德)이
있느니라」 (시조깅고석가불공양사 1144쪽)
「무작의 삼신」은 아무 꾸밈이 없는 본래 그대로의 부처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내면으로부터 빛나는 지혜와 자비에
넘친 인격 그리고 생명경애의 소유자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릇 현세상의 모습을 볼 때 자못
훌륭한 듯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려고 인격과 능력에 있어서
뛰어난 것 같이 꾸미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그러한 외형에 치우쳐 그 속 내용까지
간파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위엄
있고 화려한 모습을 동경하며 자기의 내실은 어쨌든간에
형태만이라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허영의 인생을 찾는
사람도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역량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외모만을 갖추는데
급급하다면 이것은 첫머리에 말한「유작(有作)」의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무리하게 안간힘을 쓰는 이러한 유작의
인생에 진실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선 본인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충실감을 느끼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용이 없는데 자기를 가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또 거기에서 얻어진
존경, 명성, 그리고 신용 등도 그러한 지위, 직함, 입장,
재산 혹은 권력 등이 없어지면 곧 그 사람을 멀리하여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게 되며 거기에는
빈약한 자신의 인격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한 외형적인 일체의 가식을 버리더라도 역시 빛나고
있는 인간성, 특질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이 인간으로써
존귀한 것이며 그 사람은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에 평안함을
품고 유유하게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태나 명성 등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이 수반되지 않은 외형의 정비는 한없이 쓸쓸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무작」이면서 풍부한 인격을 풍기고 있는
그러한 인간상이야말로 바람직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불법에서는 우리들 범부의 생명에도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부처의 생명, 풍부한 자비, 환희, 영지에 빛나는 생명이
비장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무작삼신」이란 대우주와 함께 본래 존재하는 영윈
불변의 부처를 뜻하며 바로 日蓮대성인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이 삼신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삼신은 즉일신
(卽一身)에 구비되며 일신(一身)은 즉 삼신입니다만
이 무작의 삼신의 생명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도 있으며 대성인님의 생명의 당체이신 묘법의
어본존을 믿고 수지하면 이 무작의 삼신의 생명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고 대성인은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근행과 창제에 면려하고 광포를 위해 노력하면 불계
(佛界)를 용현하여 아무런 가식이 없이 행복에 충만된
자기를 구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묘법의 빛에 비추어 지고 묘법의 대지에
지탱되어 자기의 개성과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인간성 퐁부하게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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