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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염정불이(染淨不二)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하겠다!
행복을 위해 살고 자타가 함께 환희를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자는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있다라고
대답할 사람은 실로 소수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시 그렇게 되기 쉬운 사람은 있을런지 모른다.
그래도 어떠한 계기로 좌절해서 자기자신을 잃었다가 문득 자신을
되찾고 보니 남에게 범죄자라는 말을 들을만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할 것이다.
병이 잦은 어머니를 모시고 장애자인 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던 형이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되어 단신으로 부임했을 때,
동생의 장래를 비관해서 살해하고 자신도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수한 사건이 있다.
이런 일을 상기하며 앞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무저항의 동생을 죽인 살인자에게도
깊은 동정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아주 간단히 생각하고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해 살인까지
범한 소년들에 대한 보도에 접했을 때의 심리적인 움직임은 어떨까.
틀림없이 극악무도함에 노하고 비인간성에 어이없어 상응하는 처벌!
이라고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어떤 계기로
좌절한, 어떤 의미에서 약자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흉악 범죄의 보도를 접하면 무슨 짓을 했나 어떤 방법으로
했나라고 사건의 표면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깊이 파고들어 왜 그런 짓을 했는가라는 면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잔인한 행동이 비정상적인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표면상의 잘못에만 현혹되어 내면 문제에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내면을 객관적으로 보고 보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외부에 나타난
사건만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에도 틀림없는 사실과 진실이 있다.
그것을 해명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있을 수 없다.
형벌로 범죄 억제할 수 없다
염법과 정법이 서로 대립
도로시 루이스라는 미국의 여성 정신 의학자는 20여년간을 흉악
소년 소녀범과 대화를 갖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과 인생을 신중하게 되돌아보며 원인을 탐구했다.
그 경험에서 그들의 폭력 행위는 충동적이고 찰나적이며 순간적인
생각에 의한 것이다 흉악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형벌의 발상은
폭력행위를 범했을 때의 범인의 심리상태를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말하고 코네티컷주(미국)의 법률개정이 유지(有志) 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고 있다.
그들을 끝까지 몰아넣은 것은 부모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며
빈곤과 차별 등 각종 사회적인 요인도 있다.
이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엄습해 온 상황이 있으며 마지막
한 순간이 범죄에 이르게 했다.
물이 가득히 찬 컵에 마지막 한방울을 떨어뜨려 물이 넘친 것과 같다.
불법(佛法)의 눈은 해결의 열쇠를 지닌 내면의 진실에 대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일면에 번뇌에 물들어
악업(惡業)을 쌓고 허덕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깨끗한 마음으로 인간성 풍부하게 살고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안심시키는 면이 있다.
이 양면을 각각 염법(念法)과 정법(正法)이라 하고, 서로 대립하는
염정(染淨)의 이법(二法)이 실은 하나의 생명에 갖춰져 있으며
일체불이(一體不二)인 것을 염정불이라고 한다.
그것이 고뇌를 만들어 내는 염법으로 작용하는가, 자타(自他)가
함께 하는 환희를 만들어 내는 정법으로 작용하는가.
여기에 관건이 있는 것이다.
악연에 물들어 갈 것인가,
선연으로 꽃을 피울 것인가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당체의초(當體義秒)>에서 염정의 이법의
관계에 대해 염법은 생명에 깊이 새겨져 미혹과 깨달음으로 차이는
있어도 어느 것이나 본질은 같으며 생명에 본질로서 갖춰진
진리(법성진여〈法性眞如〉)다.
그것이 선연에 접하면 깨달음이 되고 악연에 접하면 미혹으로 된다
(어서 501쪽, 취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생명의 가능성으로는 선도 악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느 쪽을 현실적으로 열어 나타낼 것인가.
선을 열어 나타내는 궁극적인 선연만이 성불이라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위한 핵심인 것이다.
여성 악인 성불할 수 있다
격려는 불가사의한 열쇠다
묘락대사는 염정불이(染淨不二)를 천태대사의 감응묘(感應妙)
신통묘(神通妙)를 기본으로 해서 논하고 있다.
감응의 감이란 사람들이 생명 속에서 요지부동의 행복을 원해
그 실현에 의해 부처와 그 법(法)을 구하는 마음이다.
응이란 부처가 사람들의 마음에 응해서 자비심을 일으켜 법문을
설해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신통이란 사람들에게 법을 이해하고 체득시키기 위해 각종
불가사의한 것을 실현하는 작용이다.
최고의 불가사의는 이 사람만은 성불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사람을 성불로 인도한 것을 말한다.
법화경은 석존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제바달다와 같은 최고의 악인도,
인도 전통문화 속에서 차별 당했던 여성도 많은 대승경전에서
성불할 수 없다고 규탄 받았던 출가의 제자들도 석존과 똑같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성불에서 가장 먼 사람에 대해 성불 할 수 있다고 단언하면서
모든 사람의 성불을 보증했던 것이다. 자네도 아직 기회가 있다라고
따뜻이 격려하며 최선을 다 하자라고 참여 의식을 고취시켰다.
대만심 부수고 무상의 원을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외침
법화경에서 제자의 한사람이 법화경을 들을 때까지의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이미 연로해서 기력도 체력도 없다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제는 충분히 행복하므로 더 이상해야 할 일이 없다 스승인
부처는 훌륭하지만 나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 자기가
가르친 사람이 보살이 되어 성불하는데 자신은 되지 못한다라고.
자기 나름대로 노력해도 이상에 도달하지 않으므로 체념이
일어나고 대만심이 생겨 그 결과로 자기 정당성의 만심마저
생기는 것이였다.
제자는 자기가 만든 집속에 틀어 박혀 있다. 스승은 그것을 부수고
더욱 최선을 다하라 라고 격려하여 힘을 주었다.
그 격려의 근본은 무상(無上)의 원(願)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
심심(深心)의 본원(本願)<오백제자수기품>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생명 깊이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소원(심심의 본원), 부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 속에 있다고 자각하고 이것을 기본으로 살고 싶다는
소원(무상의 원)을 부처는 성불의 종자로써 사람들의 심전(心田)에
심었던 것이다.그 소원이란 이 정도의 나지만 역시 행복하게
되고 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틀림없이 행복하게 되고 싶어 할
것이므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행복하게 하고싶다라는 마음이다.
행복하게 되고 싶다라는 생명 속의 외침이 행복의 제일보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을 원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지쳐 각종
이유를 내세워 자신을 설득하고 체념하며 돌변해 버린다.
혹은 그런 원이 있었던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마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피의 삶의 자세에는 기쁨이 없고 생명의 충실감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일단 깊은 소원을 깨닫게 되면 무한한 힘이
용솟음 치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나간다.
그 깨달음은 때때로 참으로 정체했을 때 일어난다. 이 이상
물러서면 이미 나 자신이 아니다. 이제는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라고 됐을 때 자신을 염려 없다, 최선을 다하라! 지지 말라!라고
격려하는 생명의 소리에 힘입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라는
마음으로 힘이 솟는다.
반대로 최선을 다하자라고 자신을 격려할 수 없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가 된다. 행 불행의 분기점에 서서 최고의 행복한 길을 향해
인간은 최저로 도탄에 빠져 고뇌의 경애로 떨어질 염려가 있으며
동시에 최고로 빛나는 기쁨의 경애로 향할 수도 있다.
이 선악(善惡) 행불행(幸不幸)의 분기점에 항상 처해 있다.
이런 준엄한 사실 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인간은 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자고 노력해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악세이며 악연만의 세계다. 그러므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향상하는 궤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들의 불도수행이다라고도 말했다.
그 궤도란 지난번에 보았듯이 법화경에 밝혀진 누구나 본래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 라는 올바른 인간관과 그러므로 각자가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전진을 계속하자라는
올바른 목적관으로 사는 것이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그 묘법의 궤도에 끝까지 살아가신 자신의
혼을 우리가 모범으로 하고 기반으로 해야 할 본존님으로 나타내시어
우리의 최고 무이의 선연으로 해서 큰 격려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가 분기점이다고 자각하고 본존님 근본으로
끊임없이 투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최고의 선의 길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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