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삼대(三代)의 사제와 어서
도다 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구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보다 대성인이 위대한 대확신, 광선유포를 향한
준엄한 대정열 그리고 민중을 구제하려는 대자비를 느껴야 한다.”
조금씩이라도 좋습니다. 또 처음에는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어서에 도전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생명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쌓여 자신의 마음에 ‘철학의 기둥’을 만듭니다. 마음에
‘기동’이 있는 사람은 격동하는 변화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행복해지기 위한 교학입니다. 더불어 타인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불도수행입니다.
청년부가 ‘청년부교학시험 1급’에 도전한 보고를 받고
불법의 위대한 칠리를 연찬하는 모습은 참으로 존귀한 모습입니다.
조금씩이라도 좋습니다. 나날이 어서를 읽은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늘 새로운 바람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 신선한 바람이 신심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어서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배독할 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새로운 결의가 솟아납니다.
나는 도다 선생님 슬하에서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잊지 못할 1950년 11월의 일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도다 선생님은 학회에
그 책임이 미치지 않도록 이사장직을 사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생님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돌변해
선생님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은 홀로 유연히 미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에게 (만반의 학문과 더불어)
매일 아침 어서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아침 8시경부터 약 1시간 정도, 도다 선생님과 일대일로 연찬했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엄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진지하고 나도 열심히 했습니다.
도중에 어쩔 수 없이 못한 저도 있지만, 선생님은 서거하시기
직전까지 거의 10년 동안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엄한 자애로 나를 하나부터 열까지 육성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내 윈점입니다.
입정안국론을 시작으로 개목초 보은초 선시초 관심본존초의 오대부
그리고 당체의초 어의구전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등을 강의해 주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늘 신심에 대한 대학신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불법의 본질을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입정안국론> 강의 때 선생님은 유머를 섞어 “묘법은 ‘요술방망이’다.
기원하면 무엇이든 나온다. 반드시 행복해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몽테뉴나 베르그송 등의 서양철학에 친숙한 나는 불법이 어딘지 모르게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전쟁이 끝나 혼란하고
가난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런 힘 있는 사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 같지만 불법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살기 위한 철학임을 배웠습니다.
이런 추억이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이사장을 사임하신 다음달로 기억합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이토까지 전철을 타고 둘만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전철 안에서 도나 선생님은 <관심본존초>를 강의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차창 밖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태평양과 같은 대경에의 신심으로 어서를 배독하지 않으면 대성인의
마음에 다가갈 수 없다. 그저 재지(才智)로 어서를 알려고 하면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마는 법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다 선생님은 어서를 깊이 배독하셨습니다.
‘교학을 위한 교학’은 안 됩니다. ‘확신’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신심의 교학’이 바로 참된 불제자(佛弟子)의 길입니다.
세계도 시대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언제까지 똑같은 상태가 이어질 리 없습니다.
그 변화 속에서 다양한 사상의 본질을 어떻게 올바르게 간파하는가.
대성인은 “법화(法華)를 아는 자는 세법(世法)을 깨닫느니라.”(어서 25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에는 확신한 세계관, 인간관, 올바른 사회관, 보편적인
시대관 등 온갖 지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강합니다. 무슨 일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서를 배우는 의의도 여기에 있습니다.
“행자는 무엇인가” - 마키구치 선생님이 배독하시던 어서에 힘찬 필체로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법화경의 행자가 있으면 반드시 삼류(三類)의
원적(怨敵)이 있으리라.”(어서 230쪽) 하신 <개목초>의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전진하면 마(魔)도 움직입니다. 진정한 불법자에게는 반드시 마가 출현합니다.
그 마와 싸워야 비로소 ‘행자’이자 부처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불법의 궁극을 회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종문에 깃들었을 때 그 정체를 간파하고 엄연히 싸우셨습니다.
500일에 이르는 투옥생활에도 ‘모두 어서 그대로다’ 하고 유연하셨습니다.
왜 교학을 배우는가 바로 마를 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학은
‘마와 싸우는 검’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감옥에서 대성인의 어서를 몸으로 읽으셨습니다.
학회에 만년의 규범을 남겨주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대원(大願)을 세우리라.”(어서 232쪽) 하신 <개목초>의
구절에 두 줄로 밑줄을 그으셨습니다. 그리고 크게 ‘대원’이라고 쓰셨습니다.
감옥에서 쓰러지신 마키구치 선생님을 일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많은 사람이 생애 대원을 위해
산 마키구치 선생님을 상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선사와 같이
‘어서근본’ ‘대성인 직결’로 삼세에 빛나는 영광스러운
길을 당당히 나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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