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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학

석존의 문제제기(四苦八苦)

by 행복철학자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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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존의 문제제기

 

석존이 출가하게 된 동기나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진
 
일화로 유명한 사문출유(四門出遊)혹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四門이란 가비라위성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을 가리키고 출유 혹은

 

유관이란 왕자시절의 석존이 각각 그 네 개의 문을 통해서 놀기 위해

 

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간 후에 성 밖의 세계와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에피소드는 전하고 있습니다.


석존이 청년시대의 어느날, 성의 교외에 있는 유원지에 놀러가려고

 

동쪽문을 나왔을 때 거기에서도 노인을 본다. 놀란 석존이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시종에게 묻자 '저것은 노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이란 무엇인가'라고 석존이 다시 묻자

 

'인간은 출생하는 한은 반드시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다시 석존이 '나도 그렇게 되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되돌아와서   '오늘 놀러가는 것은

 

그만두자'라고 말하며 자기방에 들어가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어느날 남쪽문으로 놀러 나가 거기에서 병자를 보았다.

 

거기에서 노인을 보았을때와

같은 이야기를 시종과 하고 난후 마지막에

 

'나도 병자가  되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이날 역시 '오늘은 그만두자'라고 말하더니 방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다음에 서쪽문으로 나왔을 때

 

죽은 사람을 보고 역시 똑같은 문답을 하고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놀러가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방에서 사색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북쪽문으로 나왔을 때 거기에서는 출가한 수행자를 보고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저것은 老.病.死의 苦가 없는

 

세계를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에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찾고 있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출가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노.병.사를 자기의 문제라고 포착 석존이 노인.병자.죽은사람.출가한

 

수행자의 하나 하나에 대해 시종에게 물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처럼 너무도 동화이야기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동서남북의

 

각문으로 나가 노인.병자.죽은사람.출가수행자를 만났다고 하는 것도

 

너무나 꾸며진 듯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전설이라는

 

꾸민 이야기는 대개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만 만약 이 전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면 역시 젊은 석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노인.

 

병자.죽은 사람을 보고 언젠가는 자기에게 덮쳐올 문제라고

 

포착했다는 점입니다.

 
 즉,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노인이나 병자, 또는 죽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순간에는 마음속에서 일말의 불안이나 두려움이
 
생기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곧 잊어버리고 눈앞의
 
일이나 놀이. 그리고 인간관계에 구애되어 전혀 자기에게는
 
노,병,사가 없는 것 같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노,병,사는 누구에게나 틀림없이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되며 마음이 동요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석존이 위대한 것은 청년시절에, 다시 말해서 노,병,사의

 

문제 따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연령이면서도 이런 것을 자기의

 

문제로 포착한 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물며 석존은 차대의 왕이 될 왕자로 태어났으므로

 

그의 청년 시절은 오늘날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유복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석존의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질문이 진지하고 근본적이며 어설픈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청년 석존이 왕자로서 아무런 부족함도 없는 즐거운 생활이나

 

다음에 올 왕으로서의 권력의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출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동기나 이유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명백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시점


그러면 청년 석존이 포착한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질문이란

 

무엇이었을까요.그것을 한마디로 말해버리면 어렵게 됩니다만

 

인간의 유한성, 한계성, 상대성 등이라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바꿔 말하면 인간은 절대적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노,병,사의 세가지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이사람 저사람 차별없이 평등하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예외없는 객관적인 사실이고 법칙이라

 

해도 좋습니다.

 

 확실히 살아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에게 노,병,사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존재라 하겠으나 이 '자기를 안다'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라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으면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청년 석존의 물음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타인이 병을 앓거나 늙고 죽어 가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타인에게 찾아간 노,병,사라는 사실이

 

자기에게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병,사가 자기에게 찾아 왔을 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자기
 
혼자서 늙는 쓸쓸함이나 불안, 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범부는 타인의 노,병,사를 보면서도

 

자기에게 확실히 찾아온다는 사실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또한 잊어버리려고 하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 왔어도 노,병,사는 확실히 찾아오기 때문에
 
그때가 되어 당황해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그래서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

 

청년 석존이 포착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석존 스스로가 아직 어느 하나도 겪어보지 못한

 

청년기에 노,병,사의 현실을 생각했다고 하는 점이 오늘날에서

 

보아도 위대한 것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대개 다음과 같은 인생을 걷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청년일때는 노인을 보고 경멸하거나 가엾게 여기고 곧 자기에게

 

오는 운명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치 않으며, 건강할 때에는

 

병자를 보고 동정은 하지만 내심으로는 냉정하게 보고

 

 

자신도 병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치 않습니다.

 

또 삶의 의욕이 충만할 때에 타인의 죽음을 보고 자신에게도 확실히
 
찾아온다는 사실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하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자기가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년이라는게 얼마나
 
굉장하고 고마운가를 절실히 느끼면서 청년시절에 좀 더 해둘걸
 
하고 후회합니다.
 

또 자기가 병을 앓게 되었을 때 비로소 건강의 값짐과 고마움을

 

알게되는 동시에 건강한 타인이 얼마나 병든 자기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이해해 주지 않는가를 한탄합니다.

 

자기가 죽음에 직면해야 비로소 산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굉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으로서 좀 더 충실한 생활태도를
 
취할 걸 하고 후회합니다.

이와 같이 보통사람이 걷는 인생을 대충 더듬어 보면, 요컨대 인간은
 
인생을 반밖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과 사, 젊음과 늙음, 건강과 병 이처럼
 

각각 반면밖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고 젊고 건강할 때는 죽고 늙으며 병든다는 것을 모르고,

 

반대로 죽음과 늙음과 병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삶과 젊음,

 

건강의 고마움과 값짐을 깨닫는 일면적인 생활태도는 진실로

 

인간이 산다고 하는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닌 生속에서 死를, 젊음 속에서 늙음을, 건강 속에서
 
병을, 각각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물음을 앞에 놓고 보면, 석존이 왕자로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쾌적한 생활이나 차대의 왕으로서 갖게 될 권력의 자리 등에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 앞의 쾌락이나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설사

 

보통 우리들이 말하는 행복의 정상에 올랐다 해도, 결국 노, 병, 사

 

중에서도 특히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땐 반드시 기대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 석존에게는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四苦八苦의 근본적인 질문


여기서부터 후에 생노병사는 四苦라 하여 노,병,사의 현실을

 

苦라고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생기게 됩니다.

 

이 경우의 苦는 보통 말하는 괴로움이나 고뇌, 고통 등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보통 우리들이 행복이라 느끼고

 

즐거움이라 느끼는 것도 苦라 말하고 있습니다.

 

평소 우리들이 느끼는 이러한 幸과 불행, 苦와 樂을 함께 苦라고

 

하는 데에는 단순히 낙과 비교한 고를 초월한 혹은 행과 비교한

 

불행을 초월한 보다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말하면 불법의 苦는 인간의 존재 자체의 한계성,
 
유한성, 부자유성,   비주체성 등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의 존재는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유한성이나 부자유성을 결정적인 것으로

 

하는 요건이야말로 四苦 중의 死의 苦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지금까지의 인생을 부족함 없이 마음대로

 

살아왔고 자기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죽음앞에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허무함과 참으로 자기에게도 한계가 있으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억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불로장생의 약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다녔다는

 

진나라 시황제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死苦는 노,병,사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으로 오히려

 

老苦도 病苦도 죽음과 직결되어 있는 점에 그 고뇌가 있다고

 

해도 좋으며, 여기에서 생,노,병,사의 四苦는 결국 '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생과 사의 二苦에 포함되며 불법이란 인간의 생사문제와

 

대결하여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청년 석존으로 하여금 출가를 단행하게 했던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는 노,병,사의 현실, 혹은 생,노,병,사의

 

四苦에 대해서 석존이 회상한 말을 인용했습니다만, 석존은 후에

 

새로운 四苦를 추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한계성을 명확히

 

했는데 이 기회에 그것을 설명 하고자합니다


*생고(生苦)- 출생할 때의 고통이며 또 살아가는 고뇌입니다.


*노고(老苦)- 늙어 가는 고생, 늙어 간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병고(病苦)- 병드는 고생입니다.


*사고(死苦)- 죽음 그 자체에 늘 붙어 다니는 고뇌이며, 또 죽음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공포 등이기도 합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자와 반드시 이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실이며 한계성입니다.

 

          아무리 영원한 사랑을 서로 맹서한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또 영원한 우정을 맺은 친구 동지라 해도, 또한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굳은 애정으로 맺어진 가정이라 해도
 

          반드시 죽음이라는 현실의 도래에 의해 이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냉엄하리만큼 준엄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별이라는 사실에 수반되는 심리적 불안,

 

          우수, 고뇌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애별리고를 테마로

 

          얼마나 많은 명작의 문학작품들이 쓰여졌는지 모릅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과는 반대로 원망스럽고 미운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인간의 부자유성, 혹은 어딘가에서 만나지 않을까라는
 
심리적인 불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나 형제가 서로 미워하며 같은 지붕 밑에서 산다거나

 

혹은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람끼리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절교를 선언하거나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상대와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라고 내심 겁을 내거나 불안해 하는 경우입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해도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A라는 것을 갖고 싶어 그것을 손에 넣었다해도
 
인간의 욕망은 A보다 더 큰 B를 얻기위해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B를 손에 넣으면 또한 이번에는 B보다 더 큰 C를 갖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부풀어 올라가

 

결국 그 사람의 일생의 총결산에 있어서는 구해도 얻지 못하였다는

 

결과가 된다고 하는 지적입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오취음고(五取陰苦)라고도 하며 오음이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물질적인 형태, 신체),
 
수(受-감수작용, 감각이나 감정),
 
상(想-표상작용, 마음에 물건이나 대상을 회상하는 것),

 

행(行-형성작용),

 

식(識-식별작용, 물질을 인식하고 이것 저것을 판단하는 것)의

 

다섯가지의 요소를 말합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의 신체와

 

마음을 다섯가지의 요소로써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色이 신체와 외계의 사물을 나타내고 受想行識이 마음의

 

영역을 나타내며 인간의 신체가 외계의 사물을 받아들인 후의 마음의

 

움직임과 작용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마음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行은 인간의 신체와 마음을 통일하여 형성하는 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오음이란 인간의 신체와 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신체와

 

마음이 외계의 사람이나 환경과 밀접하게 관계하여 교섭하고 있는

 

상태를 합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음성고 혹은 오취음고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면,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마음   그리고 이 자신의 身心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며
 

거기에 인간의 한계성, 부자유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의 四苦와 애별리고,원증회고,구부득고,오음성고의

 

四苦를 합하면 八苦가 됩니다.

 

실은 八苦라 불러도 좋습니다만 불법에서는 四苦八苦라

 

부르고 있습니다. 四苦八苦를 듣고 과연 그렇구나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들은 이 사고팔고란

 

말은 일상대화에서 자주 쓰기 때문입니다.

 

그 본래의 불법상의 의미는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인간과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들 앞에 던져놓은 것입니다.
 
석존시대로부터 2천수백년의 세월이 경과했으며
 

사회도 세계도 전혀 달라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문명 속에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만 청년 석존이

 

포착한 거대한 물음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아직도 무겁게

 

느껴지고 있으며 결코 퇴색해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 더욱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대승불법의 영지가 필요


그러면 이 四苦八苦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가.

 

석가불법 특히 소승교에서는 무상(無常)을 주시하여 집착을

 

버리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하고 싶다.

 

 건강한 신체로 있고 싶다. 재산,지위,명예,신용,애정을 유지하고

 

싶다는 등등     이것은 인간 범부의 자연의 정입니다만, 이 세상의

 

일체 현상은 모두 변화해 마지않는 것이며

 

무상인것인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상주(常住)의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고팔고가 생긴다고 석존은 특히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은 소위 회신멸지(灰身滅智)입니다. 확실히 그 통찰은
 
사실이며 보람이 없는  심로(心勞)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무상인 것에 분동되어 일생을 끝낸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 집착을 버려라 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지나친다면

 

인간성에 반하게 되며, 본래 행복을 위한 철학이었던 것이 체념과

 

기만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대승불법의 중도(中道)의

 

영지가 필요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대아(大我)를 확립


살고 싶다, 건강하게 있고 싶다 등등. 이것은 인간 본연의 소원이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빼앗는 악마의 철학이라 단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 생노병사는 또 인간 아니 일체의 생물을 관철하는 법칙입니다.

 
따라서 무상의 현실에서 일희일우(一喜一憂)하지 않으며,
 
제법 깨달은 척하는 체념의 생활태도로 점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고팔고를 자기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전진의 양식으로
 
대처해가는 풍부한 생명력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소승불법이 무상을 인식시킨 것은 그 나름대로 의의는 있었습니다만,
 
 그 한계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법에는 무상의 발견에 머물 뿐만 아니라 무상의 속에 있는
 
 상주란 것을 포착합니다.
 

그러나 석가불법에는 이 상주라는 것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밖에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한 데 비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만인이 명확하게 포착 할 수 있도록 나타냈으며, 상주의 인생이

 

생활해 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  니치렌대성인의

 

동서고금에 둘도 없는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무상한 현상에 집착이 되어 번뇌나 고에 농락당하는 것은 작은 자기,

 

말하자면 소위 '소아(小我)'에 사로잡힌 생활태도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이 소아가 아니라 '대아(大我)'에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명에 맥동치는
 
변함없이 빛나는   생명(불계의 생명 즉 대아)에 살며, 그 위에 소아를
 
감싸들여 어떤 사고팔고도 행복, 희망,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해
 
가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상주의 자기를 확립하여 일체의 고를
 

상락아정의 도약대로 열어 가는 것입니다. 상락아정이란 어디까지

 

가더라도 막히는 일이 없고, 어떤 고라도 즐거움과 성장으로

 

바꾸어가는 힘이며, 깨끗하고 확고한 자아의 확립을 뜻합니다.

 

그 원천이 南無妙法蓮華經의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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