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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
인격(人格)의 평등(平等)을 깊게 밝히다 일체중생을
부처와 동등한 경애로 인도 법화경 방편품 제2에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와 같이 동등하게 해서 다름이 없게 하리라고
읽습니다만, 이 일절에 불법의근본자세가
교시되어 있습니다.
즉 부처는 중생으로 하여금 내부에 있는 불계
(佛界)를 열어 자기와 동등하게 동일한 부처의
경지와 경애로 되게 한다는
것을 결의하여 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불법 본래의 자세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람들의 생명 속에 존엄한 불계가 있다고
인정하여 그 불계를 용현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처와 중생을 차별하는
자세가 전혀 없습니다.
불법은 이와같이 평등한 인간관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위기를 지적하며 인간성이 상실되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자기와 타인를 분리해 놓고
자기만 좋으면 된다, 남의 일은 생각할 수 없다는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태도가 버젓이
통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와 카톨릭의 에수와 하느님을 밑으면
천당에 가지만 밑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 진다는 무자비의 사상은 마땅히 배척되어야 할
위험한 사상입니다. 비록 밑지 않아도 비록
다른 종교를 밑어도 존귀한 생명으로써 형제이고
이웃이고 나아가 국민이고 셰계인 입니다.
이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태도의 전환을
위하여 이타(利他), 공진(共進)의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열쇠야말로 여아등무이의 실천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아(如我)의 아(我)에 대해
<어의구전>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我)란 석존(釋尊) 아실성불구원(我實成佛久遠)의
부처이니라」(어서 720쪽) 즉 아란 별(別)해서는
구원원초(久遠元初)의 자수용보신여래
(自受用報身如來) 이신 니치렌 대성인 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일체중생의 동일고(同一苦)는
남김없이 이는 모두 日蓮 한 사람의 고(苦)라고
말하느니라」(어서 587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고뇌를 자기 한 사람의
고뇌로 하여 인수해서 사람들을 절대적인 행복으로
인도하시려는 대자비가 절실하게 가슴에 느껴집니다.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중생과 동고(同苦)하시고
중생을 부처와 동등한 경애에 도달하게 하는
근원의 스승이십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불교
이외의 많은 종교는 절대자로서의 신(神)을 세워
그 신의 예속(지배하에 들어 가는 것)을
강요해 왔습니다. 신과 인간을 차별하여 인간은
신에 복종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신의 대변자로서 성직자라는 신분을 만들어
민중을 멸시하고 때로는 억압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그러한 절대자와 인간을
차별하고 예속을 강요하는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 속에 누구라도 동등한
불계(佛界)라는 존엄한 생명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 불계를 용현하는 방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불법에서는 부처를 도사
(導師:인도하는 교사) 라고도 말합니다.
이 말 자체가 부처는 중생을 얕본다거나
자기 수하(手下)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최대한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인도한다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처(스승)와
중생(제자)의 차별은 없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원하고, 또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스승과
동동한 경애로 되기 때문입니다.
불법에서 설하는 사제불이(師弟不二)도
여아등무이도 그 근본 뜻은 동일합니다.
또한 우리들의 신심 실천과
지도의 자세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 속에
평등한 인격을 인정하여 거기에 일체의 기축
(機軸)을 두고 인간형성을 촉구하여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이것은 교육 일반에 통하는 중요한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진실한 촉발은 이 원리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나와 같이 동등하게 해서
다름이 없게 하리라고 해도 그 아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용기와 힘을 주는 불계를
용현하는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기가 탐욕, 진에, 어리석음 등의 번뇌에
덮혀 있다고 한다면 도저히 상대방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경애에 육박하여 성의와 용기를 가지고 상대방의
불성을 일깨워 주는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실천에는 어느 한 사람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강하고 순수한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 이상의 인재로
성장해 주기를 바란다는 한결같은 태도가 있음으로써
생명과 생명이 부딪쳐 상호간에 인간완성과
인간혁명의 길을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아등무이의 행위의 근저에는 당연히 자비
즉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정신이 맥동치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만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감연히 벗의 고뇌 속에 뛰어들어
그것을 타개하는 길을 함께 찾는 자세가 불가결합니다.
우리들은 본존님에 대한 강하고 깊은 신심을 쌓아올려
부처의 사자(使者)로서 겸허한 자세로 절복정신을 불태워
불법대화를 전개해 갑시다. 그래야만 여아등무이의
이념이 살아나 인간평등의 사회와 시대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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