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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즉적광(娑婆卽寂光)
현실에 도전하여 이상을 열다 고뇌를 성장과 행복 창조의
밑거름으로 칼보스(그리스의 시인)의 시에 산 넘어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산다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스스로의 행복을 어디엔가 멀리 있다고 하여
계속 찾는다 해도 그것은 방랑의
여로(旅路)가 된다고 노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행복은 산 넘어 저쪽에 있는 것도 또한 어디엔가 별세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몸을 두면서 그 흙탕물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지금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흙탕물과 같은 현실사회에 감연히 도전해 가는 데서 아름답게
개화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바즉적광>의 원리는 참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해 자신이 있는 장소를
스스로 청정하게 빛내 가는 변혁의 철리며, 진실한 행복을
가져오는 실천의 원리 바로 그것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사바>란 범어로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에 좥사바란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 하느니라
(어서 771쪽)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바세계란 괴로움이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세계를 말합니다.
<적광>이란 적광토(寂光土)를 말합니다. 적광토란 부처가
거주하는 국토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바즉적광>이란 우리들 인간이 거주하는
이 사바세계가 실은 그대로 부처가 거주하는
적광토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명확하게 설해진 것은 법화경입니다.
즉 여래수량품 제16의 자종시래(自從是來),
아상재차(我常在此), 사바세계(娑婆世界), 설법교화
(說法敎化)의 경문입니다.
법화경 본문 이전의 이전적문(爾前迹門)의 가르침에서는
부처는 결코 이 예토(穢土:더러워진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량품에 와서는
번뇌와 고뇌가 소용돌이 치는 이 사바세계야말로
실은 부처가 설법 교화해 온 곳이며 묘법으로 일관된
적광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를테면 종교의 근본문제에 관계되는 중대한
원리의 선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적문의 제경에 있어서는 대승교나 소승교나
우리들 범부가 거주하는 이 사바세계를
예토라 하였고, 시방(사방팔방에 상하)의 국토를 불, 보살이
거주하는 정토(淨土:깨끗한 세계)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염불종에서 의경(依經)으로 하는 아미타경에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있는 극락정토, 아미타불이
사는 정토를 설하고 있습니다.
또 약사경에는 동방에 약사여래(藥師如來)가 거주하는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깨끗한
유리라는 보배가 깔려 있는 세계)가 있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거주하는 세계를 더러운 것이라 해서 몹시 싫어하여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먼 저쪽 어디엔가
이상세계를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리가 현실사회에 매몰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당시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생각케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진실한
생활방식에 눈뜨게 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실한 <목적>은 묘법의 철리(哲理)를 근간으로 하여 사람들이
고뇌가 충만하고 끝없이 변해 가는 현실을 직시하여 거기에
감연히 도전해 가는 가운데 상주(常住)의 인간의 행복도
사회의 평화와 번영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수량품의 <사바세계 설법교화>이며,
<사바즉적광>의 원리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 현실변혁의 철리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불법은 단순한
현실도피의 관념론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현실생활을 떠나 아무리 과거를 생각해 보아도 혹은 미래를
꿈꾸어 보아도 현실의 고뇌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는
불법 본래의 자비의 정신에도 위반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말법의 오늘날 <사바즉적광>의 원리를 밝히신
대성인의 불법 이외는 시대와 사회의 탁함과
정사(正邪)에 대한 가치판단의 혼란,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종말이 우려되는 현대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있는
실천의 철리는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면하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나 고생을 도리어 스스로의
성장과 행복을 창조하는 밑거름으로 해 가는 힘이
묘법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청정하고 강력한 일념을 빛내자
또 <일생성불초>에는 중생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토(土)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토(土)도 청정(淸淨)하다고 해서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穢土)라 함도 토(土)에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에 의한다(어서 384쪽)고 있습니다.
현실의 세계를 예토라 느끼는가 적광토라 느끼는가는 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애 문제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외계를 볼 때 보이는 세계가 그 안경색에
따라 색채를 나타내듯이, 일념의 청탁(淸濁), 강약(强弱),
명암(明暗)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념(정보〈正報〉)이 가장 깨끗하고 강력하고
밝게 빛나고 있으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사물(의보〈依報〉)도 행복과 성장의 소재가
되어 작용할 것입니다.
또 그 생명의 빛이 있는 곳에는 스스로가 현실의 모순이나
비뚤어진 것에 대한 행동변혁이 연동되는
것도 틀림없습니다.어쨌든 <사바즉적광>이야말로 묘법을
근간으로 하는 인간혁명과 사회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의 철리라는 것을 명심하여 각자가 그 주체적인
체현자(體現者)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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