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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학

무의왈신(無疑曰信)

by 행복철학자 202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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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왈신(無疑曰信)

성불의 근원은 순진 강성한 믿음에서 
생명 전체로

육박하여 경지명합

 

불법에 있어서 '신(信)'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서를 펼쳐 보면 '신(믿음)'에 대해 가르치신 곳은

그야말로 수없이 많습니다. 각종 회합에서의 지도에서는

행학(行學)의 근저에 강성한 '신'을 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의왈신'이라는 말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 한다'고 읽으며

천태 대사의 《법화문구》에 나와 습니다. 이와 같이

'신(信)'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말법인 오늘날에 있어 '신' 이외는 불법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지혜 제일

사리불마저 '이신득입(以信得入:신을 가지고 들어감을 얻었다)

비기지분(非己智分:자기 지혜가 아니다)'이라 하여 '신'에 의해

비로소 묘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불법의 대상(對象)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불법을 자기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책상이란 이러한 형태와 크기의 것이라는

'이해'와, 불법의 오달(悟達)과는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생명은 현상의 세계를 취급하는 학문으로써는 파악할 수

없는 초합리(超合理) 반합리(反合理)가 아닙니다 적인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실감(實感), 체득(體得)하는 외에

그 전체상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본존님이라는 부처의 생명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학문을 이용한 이해로서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은 이해가 아니라 실감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전 생명으로

육박해 가는 외에 체득 오달은 불가능합니다.

또 이해라는 것은 자기와 이해의 대상으로 되는 사물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비해 '신'이란 대상을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융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 전체로 육박하고 대상과

경지명합하여 일체(一體)가 되는 것입니다.


'귀명(歸命)'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만, 자기의 일념을

집중 투입하여 대경의 힘을 자기의 생명 속에 나타내는

작업이 '신'인 것입니다.

 

대경의 세계로 들어갈 때 대경이 가진 영향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생명이 명합(冥合)하는 작업에 좋지 않은

잡음을 넣게 되면 언제까지 가더라도 경지명합은 없고

본존님의 힘이 솟아오르지 않습니다.의혹이라는

'신'을 끊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이(無二)로 믿음으로써 이 어본존의 보탑(寶塔) 속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불법의 근본은 신(信)으로써

근원(根源)으로 하느니라」(어서 1244쪽)


'신'이라는 생명의 명합작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대해에 들어가는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불계의 문을 닫아 버리는 자살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생명의

향배(向背)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의 생명의 자세가

본존님에게 향하고 있는가 배반하고 있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등을 돌리느냐 아니냐로 성불의 가부(可否)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의심을 품고 본존님에게 향하는 자세가 무너진다면

애석한 일입니다. 순진 강성한 신심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을 강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과학적이고

사람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명한 '신'의 근본 뜻에서도 그것은

부당한 견해라는 것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불법만큼 법의 고저천심(高低淺深)을 엄격하게

추구(追究)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의문도

생겨 질문도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억제하려는

그러한 종교는 교의(敎義)에 자신이 없는 종교이며,

그 자체가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신'이라 해도 올바른 도리 이념이나 풍부한

현증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불법이 비과학적인 것으므로

'무의(無疑)'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명료심원(明瞭深遠)한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외침이며, 어떠한 의심도

눈 녹듯이 녹이는 철리(哲理)에 대한 자신감이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국 '무의왈신'의 '의(疑)'란 미혹, 무명혹(無明惑)을

말합니다. 원품의 무명(생명의 근본적인 미혹)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행에 빠지게 하는 마성(魔性)의

근원을 유발시키는 의심을 훈계한 것으로, 사색의

중요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만불손한, 꺼림직한 의심을 훈계
단순한 맹신(盲信)으로는 고난의 폭풍우가 몰아치게 되면

쉽게 마(魔)의 먹이(희생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도다 제2대회장은 "이(理)는 신(信)을 생기게 하고

신은 이를 구한다. 구해진 이는 더욱 신을 깊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신'이 서로 맞음으로써 확고

동한 신앙이 구축되어 가는 것입니다.


불법은 의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구(求)해서 규명하는

것을 존중합니다.단지 그것이 오만불손한데다가

꺼림칙한 의념(疑念)에서 나오는 것을 본인을 위해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깊숙한 오저에서

이해하려는 구도(求道)의 자세에 입각한 '학(學)'과

'신행(信行)'이 결합할 때 참된 오달(悟達)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묘법에 대한

신(信)이 무의왈신이다"고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본존님의 공덕을 절대적이라고

믿고 대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신심수행(信心修行)을

일관해 간다 이 무의왈신의 신심에 성불이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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