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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대성인 시대의 제자들16

波木井實長(하기리사네나가) 波木井實長(하기리사네나가) 하기리사네나가(波木井實長), 정확하게는 난부로쿠로사네나가(南部六郞實長)는가이(甲斐) 겐(源)씨의 후예라고 전해진다가슈(甲州:山利縣)난부의 하기리 미마키(御牧) 이이노사부로(飯野三郞)의 지두로하기리에 살고 있었던 것에서 하기리도노(波木井殿)라고 불리고 있었다2조 日興상인이 시주쿠인(四十九院)에서 면학에 힘쓰고 있었을 즈음부터 교제가 있고 그 후 1269년경 日興상인의 교화에 의해 대성인께 귀의했다고 전해진다​1274년에 대성인으로부터 내려졌던 어서에는『귀하는 이것을 들으신 것은 한 두 번이며 일시 이시니라 그러나 아직도 버리시지않고 신심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오로지 금생의 일이 아니로다』(어서 1372)고 말씀하시고 있으므로 입신당초에는 직접 대성인으로부터 지남받고 있었던 기회는 .. 2024. 9. 18.
伊東八郞左衛門(이토하치로사에몬 伊東八郞左衛門(이토하치로사에몬) 「후나모리야사부로모토어서(船守彌三郞許어서)」에 말하기를『특히 당지두의 병뇌에 대해서 기청하겠다는 뜻을 말씀하시므로 생각을 해 보았도다​ 그러나 일분 신앙의 뜻을 日蓮에게 나타내시므로 법화경에게 호소하려고 생각했느니라 이 때에는 십나찰녀도 어찌 힘을 합하지 않을소냐 하고 생각하여 법화경 석가 다보 시방의 제불 및 천조 팔번 대소의 신기 등에게 말했으니 필시 평의 끝에 영험을 나타내시리라 설마 日蓮을 버리시지 않으리라.​ 아픈 곳과 가려운 곳과 같이 손이 미치도록하시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병뇌도 치유되고 해중의 물고기 속에서 출현한 불체(佛體)를 日蓮에게 주신 일 이것도 병뇌 때문이며』(어서 1445)1261년 5월, 염불자의 참소에 의해서 이즈유죄에 쳐해졌던 대성인이 어.. 2024. 9. 18.
池上兄弟(이케가미형제) 池上兄弟(이케가미형제) 이케가미형제는 형을 우에몬다유무네나카(右衛門大夫宗仲), 동생을 효에사칸무네나가(兵衛志宗長)라고 하고 작사봉행(作事奉行:당시 조영 토목공사 등을 통활 하는 관직)으로서 막부에 근무했던 이케가미사에몬다유야스미쓰(池上左衛門大夫康光)의 아들이었다​형 무네나카는 신심 때문에 아버지 야스미쓰로부터 두 번에 걸쳐 의절을 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신심을 관철하고, 동생 무네나가도 또한 형에게 동심(同心)하여 아버지를 간하여 드디어 아버지 야스미쓰를 입신하게 했던 것이다​■ 이케가미형제의 입신​이케가미가는 원래는 후지와라(藤原)씨의 일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기록에 의하면 섭정 후지와라 다다히라(忠平)의 삼남 다다가타(忠方)로부터 시작되어 다히라노마사카도(平將門)의 난(亂)을 평정하기 위하여 쿄오.. 2024. 9. 18.
소야교신(曾谷敎信) 소야교신(曾谷敎信)  ■ 소야교신의 입신소야지로효에몬노죠교신(曾谷兵衛尉敎信)은 日蓮대성인 탄생으로부터 2년후인 1224년에 시모우사(千葉縣)지방 고쿠분무라(國分村) 소야의 읍주(邑主) 오노마사사요(大野政淸)의 장자로 출생했다​가문은 원래 진언종의 종지로 교신도 그 교의에정통하고 있었던듯 하다1260년,「입정안국론」상정으로 대성인의 몸에 마쓰바카야쓰법난이 닥치고있었다​위험을 면하기 위하여 대성인은 일시 가마쿠라를 떠나서 입종직후부터의 단월인 시모우사의 도키죠닝에게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시모우사 체재중에도 대성인은 백좌설법(百座說法)등 적극적으로홍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소야교신은 이 때에 오다죠묘(大田乘明) 아키모도다로(秋元太郞)등과 함께 귀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소야교신이 살고 있는 고쿠분에 인접한 나.. 2024. 9. 18.
宿屋光則야도야뉴도 宿屋光則야도야뉴도 야도야사에몬뉴도미쓰노리(宿屋左衛門入道光則)는 집권 호죠도키요리와 도키무네의 측근으로 종사했던 무사이다「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1263년 도키요리의 임종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최후의 간병을 위하여 출입을 허락받은 7명중에 야도야사에몬의 이름을 볼 수 있다​그런데 日蓮대성인은 1258년부터 2년반동안에 일체경의 검색을 거쳐 1260년에「입정안국론」을 완성, 전집권 사이묘지뉴도도키요리(最明寺入道時賴)에게 진상했지만 이 때에 사사봉행(寺社奉行)으로서 중개의 역할을 한 것이 야도야사에몬뉴도였다물론 이 당시는 야도야뉴도도 다른 막부의 요직자와 같이 고쿠라쿠지료칸에게 귀의하고 율과 염불을 신수하고 있었던듯 하다그 때 대성인은 야도야뉴도에 대하여『선종과 염불종을 버리시라고 말씀드리시.. 2024. 9. 18.
船守彌三郞(후나모리야사부로) 船守彌三郞(후나모리야사부로) 1260년 7월의「입정안국론」제출 직후 마쓰바가야쓰초암을 습격받은 日蓮대성인은 일시 시모후사의 신도 도키죠닝의 댁으로 몸을 의탁하셨으나 다음해인 1261년 봄에는 다시 가마쿠라에 돌아오셔서 이전보다 더욱 맹렬한 절복홍교를 개시하셨다​이것을 알았던 염불자등의 놀람은 예사롭지 않아 법의(法義)상으로는 이길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참언으로써 대성인을 처벌하도록 막부요인에게 호소했던 것이다당시의 집권 호죠나가도키는 아버지인 고쿠라쿠지입도시게도키(極樂寺入道重時)가 대성인에게 강한 증오 원질을 하고 있었으므로 한 번의 취조도 없이 바로 대성인의 처단을 결단하고 이즈의 이토에 유죄했던 것이다​5월 12일, 작은 배로 사가미탄(相模灘)으로 호송되었던 대성인은 이즈의 가와나(川奈)진(津)에서..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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