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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하라 법난
아쓰하라의 법난은 무명의 민중이 강대한 권위,권력의 탄압에 맞서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자랑스러운 '선구'의 역사이다.
또한 지금 법난의 경과를 돌이켜봤을때 거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법난의 발달은 닛고상인의 후지지방의 홍법에 기인한다.
원래부터 후지지방은 닛고상인에게 있어서 인연이 깊은 땅이다.
어린시절을 보내셨던 곳은 어머니인 유이입도의 저택이 있던
가와이 마을, 수학하신 곳은 후지천의 강가에 있던
간바라지역의 천태종 사원,시주쿠원이었다.
또한 스도노지역의 도코사의 미마사카 아사리에게 외전(유교등)을,
그 땅의 지두 레이제이추조에게는 가도나 서도를 배우셨다.
1258년 日蓮대성인은 입정안국론의 구상을 하시기 위해
이와모토의 천태종 사원 짓소사에서 일체경을 열람하셨다.
닛고상인은 여기에서 대성인과 만나서 스스로 원해 제자가 되셨다.
이 인연이 있는 땅에서 닛고상인은 벌써부터 정법홍통의 손길을
뻗치고 계셨다. 특히 1274년 5월, 대성인이 미노부로 입산하신 후
본격적인 홍법을 개시하고 있다.
조부인 가와이의 유이입도,닛고상인의 숙모가 출가한 가지마의
다카하시로코로효에입도,난조도끼미쓰의 누이가 출가한
오모수의 이시카와신효에입도등이 닛고상인의
절복에 의해 입신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닛코상인에 의해서 시주쿠원의 짓소사의
승려 중에도 정법을 믿어 대성인의 문하로 죄는 자가
수없이 나왔다. 더욱이 시모카타지역 아쓰하라 고을 남부의
이치바사의 땅에 천태종의 류센사라고 하는 큰 절이 있는데,
그곳의 주승인 쇼우보가 유이가와 인연이 있던 관계로
닛코상인의 절복을
받아 입신한 것을 계기로 ,시모스케보,에치고보,미카와보등이
잇따라 정법에 귀의했다.
스루가 지방은 집권자인 호조도키무네가 지두이며 특히 후지의
시모카타지역은 도키무네의 어머니이자, 도키요리의 미망인 소유의
소령이었던 것이다. 박해의 중심자는 '가짜 중' 류센사는 원주가
없기 때문에 원주대(주직대리)인 헤이노사콘입도교치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류센사에는 원주는 있었지만 직접 사무를 볼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래서 호조가의 서류(본가로부터 분리된 일족)로서, 이 벽촌에
유랑하고 있던 교치라는 어설픈 중인 멍텅구리가 독점으로 사무를
임시로 처리하고 있었지만, 학문이 있을리도 없고 수행이 쌓여
있을리도,인덕이 높을리도 없다. 집권자의 권력을 등에 없고
무턱대고 으시대고 있었다. 라고(아쓰하라의 법난사)
'사콘입도'라고 하면 재가의 입도(불문에 들어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政所)의 주민지배를 배후에서 돕기 위하여 류센사라고 하는 큰절의
주직대로, 주민에게 위엄이 서는 호조일족의 출신이기는 하지만
신앙심도 자격도 없던 교치를 앉혀놓은 것 같다.
신앙을 잃은 종교가 권력과 결탁해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도구로 된 사례는 고금의 역사에 많이 있다. .. 승이 권위주의화
한 역사의 교훈 승려는 본래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서 정법에 인도하고
성불의 길은 가르쳐서 신앙을 격려하는 등, 신도의 행복에 진력하는
것이 그 사명인 것이다.
승려의 권위를 내세워 신도를 억압하고 종속을 강요해서 신도로부터
봉사하도록 시킨다는 것은 본말전도이다.
그런 자는 이미 불제자가 아니며 승려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사를 펼쳐보면 인도에 있어서 초기의 불교 교단에서는,
출가의 수행자도 재가의 신자도 모두가 '가르침을 듣는 사람'으로서
평등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단이 발전하고 교단의 권위가 확립되자 출가의 수행자는
재가의 신자에 대해 권위를 가진 자로서 한층 높은 위치에 서게 되어 갔다.
그래서 이윽고 재가의 신도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불리게 되어
출가의 수행자에 대해 봉사하는 존재로 되었다고 한다.또한
아소카왕의 시대로 되면서 교단에 분열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단의 승려는 자신들의 소행을 반성하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신도를 향해 '승려를 존경하라'고 하며 순종과 존경을 강요했다.
그것은 교단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신도의 기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승려를 해치면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협박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시대이든 불교의 '평등'정신에 위배해서 승려가 권위를 휘두르고
신도에게 순종과 존경을 강요하게 되었을 때에, 교단은 부패하고
승려는 타락하였다.
신도가 승려의 권위에 굴복했을 때에 본래의 신앙심은 없어지고,
승을 받들며 존경 할 뿐인 형식적인 신앙으로 되어 참된 공덕은 없어진다.
본불님 日蓮대성인 즉 대어본존에게 신복수종하여 받드는 것은
올바르지만 그 근본에서 벗어나 승려를 받드는 것은 불법의
본의에 어긋나는 잘못임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日興상인과 민중이 '타락승과 대결' 불법파괴는 악려의 악행에서
1279년 10월 닛고상인이 막부에 제출하신 '류센사 신장'에는
원주대인 교치의 적지 않은 악행이 폭로되어 있다.
법화경을 조각조각 찢어서 시지(서로 맞대어 붙여 감물을 발라 깔개나
포장등으로 씀)로 만들어 건물의 수리용으로 썼다.
절의 재산을 자기 멋대로 사용했다. 뇌물을 받고 무지악재(無知惡才)의
도둑을 공승(본존을모시는 중)으로 채용했다. 사원안의 농민을 부려
메추리사냥, 너구리사냥, 사슴사냥들을 해서 주직의 방에서
그 사냥한 것을 먹었다.
사원안의 연못(살생을 금지한 연못)에 독을 풀어서 잉어나 붕어를 죽여
마을에 내다 팔았다
등등... 도저히 승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추행뿐이다.
"견문한 사람은 이목을 놀라게 하지 않음이 없으며, 불법파멸의
근본은 슬퍼하고 남음이 있소이다"(어서 853쪽) - (그 악행을)보고
들은 사람은 눈이나 귀를 의심하고 놀라지 않는자
는 없으며 불법파멸의 근본이고 아무리 슬퍼해도 못 다할 정도이다 라고
한탄하시고 있다.
외부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악려에 의한 악행에 의해서 불법은
파괴되는 것이다.
악려가 실권을 잡은 경우에는 절이 황폐하고, 다른 선량한 승이나
신도의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부패를 지적 당한 악려들이 원한을 품고 탄압
개혁과 반동(反動) 그곳에 닛고상인이 말법의 정법을 높이 들고
근원의 사의(邪意)를 부수고 '개혁'을 부르짖으셨기 때문에, 보신하는
중은 놀라고 무서워하는 한편 뜻 있는 승려는 정의에 눈떠 갔다.
시모스케보 등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창제에 면려하며 절복을 실천하는
동시에 부패한 류센사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악인에게
공통되는 점은 궤변을 늘어놓아 자기 정당화를 하는 것이 교묘하고
능숙하며, 타인인나 환경에 책임을 전가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이 비판받으면 원한을 품고 반대로 상대를 심하게
비난하고 공격한다.
이번 '종문문제'의 발단의 하나도 묵과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행위 등,
승려의 비행이 지적된데 대해서 심하게 반발한 종문이 '신도인
주제에 승려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건방지다'
라고 원한을 품고 감정적으로 학회를 공격해 온 점에 있다.
1. 교치는 닛고상인의 문하로 된 시모스케보(닛슈)등 4명을
불러오게 해, 신앙의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교치는 이렇게 명령했다.
"법화경에 있어서는 불신용의 법이니라, 조속히 법화경의 독송을
정지하고 오로지 아미타경을 읽고 염불을 불러야 한다는 내용의
기청문을 쓰면 안도케 하겠다는 취지의 명령을 하시므로" (어서 852쪽)
법화경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즉시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미타경만을 일고 염불을 부를 것을 맹서하는 기청문을 쓰면 용서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추방한다고) 명령했다라고. '도리'로 대적할 수 없는
'권력'을 쓰는 불합리한 교치의 말에 시모스케보는 이렇게 반론했다 라고,
니치코 상인은 말씀하시고 있다.
"그것은 원주대의 명령이라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이 절은 천태종이며
말사이다.
그 근본 대사의 정신에 따라서 법화독송을 하는 것이 어째서 나쁜가,
日蓮대성인 주의(主義)로 옮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뚤어진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전교대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해서 여러분도 우리들과 함께
법화독송을 시작합시다.
미타염불은 이 산에서는 몇 대 전부터 시작된 것인가.
극히 근대의 일이 아닌가, 빨리 사견을 바꿔서 우리들의 정의에 따르라.
이것이 오히려 석가불의 본의입니다."(아쓰하라 법난사)
바른 도리이다. 정론이다. 그것에 대해서 불법에 무지한 교치는 한 마디
반론도 할 수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미쳐 날뛴 교치는 "아니다! 여기는 법론의 장소가 아니므로 법론무익이다.
우리들 원주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려면 빨리 이 절을 떠나라"라고 외쳤다.
의론(議論)도리로 이길 수 없다고 보자 "따르지 않으려면 나가라!"라고
'권력화된 종교' 의 처사이다.
1. 대성인은 "불법이라고 함은 도리이며 도리라고 함은 주군에게 승리하는
것이니라"(어서1169쪽)
- 불법은 도리이다. 도리라고 하는 것은 주군이라고 하는 권력자에게도
이기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시조깅고가 동료로부터 참언 당하고 신앙을 그만두라고
주군으로부터 강요당해 최대의 고경에 빠져있었을 때, 대확신을 갖고
격려하신 말씀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주군도 깅고를 참언 했던 동료들도, 당시 유행하고
있던 병으로 쓰러졌다.
대성인은 십나찰녀가 깅고를 돕기 위해 이 병을 일으켰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의료에 소양이 있던 깅고는 그 주군의 병을 치료하고 구한다.
꼭 1년 뒤에는 주군의 신용도 이전보다 커지고 소령도 3배가 되는
대승리의 실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성한
신심만 있으면 '최대의 곤란'의 때야말로 '최대의 찬스'이다.
위대한 변독위약을 이루고 복운을 무량으로 쌓아갈 수 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할 것은 없다.
더욱더 '신심'을 분기시키면 되는 것이다. --- 사자와 같이 ---
대화가 없는 일방적인 처분은 권력자의 수법이다.
열려진 대화를 거부하는 '책모'나 파문,추방 따위로 위협하는
'헙박'도 불법자의 행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성인의 말씀처럼 반드시 '도리'는 '권력'에 승리한다는
것을 확신해주기 바란다.
대성인은 아쓰하라법난의 때에 "아무리 위협할지라도 겁내지 말지니라.
사자왕은 백수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사자의 새끼도 또한 이와 같도다.
그들은 야간이 짖는 것이고 日蓮의 일문은 사자가 짖는 것이로다"
(어서 1190쪽)라고 말씀하셨다.
- 아무리 남이 위협해도 결코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새끼도 또한 이와 같다. 그들은 야간(여우의 일종)이 짖고 있는 것과 같다.
겁 많은 여우가 멀리서 짖고 있는 것과 같이 정의의 외침을 계속해
간다면 쥐나 호리(여우나 너구리)같은 무리는 반드시 두려워서
물러가기 때문이다. .. 대성인이 창가학회를 불러내셨다"
학회에만 대공덕의 신심 따르지 않으면 추방한다. - 교치의 위협에
신심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자들은 두려움을 품었다. 미키와보라이엔은
절에서 쫑겨날 것이 두려워 서약서를 쓰고 퇴전하여 난을 피했다.
어떤 이유라도 아무리 정당화 할지라도 퇴전하면 성불의 '종자'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 된다.
현재로 말하면 대성인의 유명대로 광선유포를 실현해 가는
불칙의 단체, 불자의 단체인 학회를 비방하고 탈퇴하여 다른 곳에서
성불의 도를 구해도 소용없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시고 있다.
"백법은몰이라고 하는데 석존의 불법만이 아니고 日蓮대성인의
불법도 7백년이 지나서 바야흐로 은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에 의해 대성인의 불법은 다시 융성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대성인께서 창가학회를 불러내신 것이지요.
장래를 위해서도 확실히 단언해 두겠습니다.
이 학회의 신심 이외에 대성인의 뜻에 맞는 신심은 없습니다.
대어본존의 참된 공력도 없습니다"
"불법의 승부는 엄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학회에 적대하면 어떤 자라도 대성인께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 확신이 없으면 학회의 회장은 될 수 없습니다.
마음 편히 보고 있으세요. 그래도 스스로 학회에서 떠난다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중에 아무리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상사와 싸워 회사를
그만두어도 수입이 없을 뿐이고 그 괴로움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학회에 적대한다면 그것은 큰일납니다. 생생세세에 걸쳐
복운의 길을 끊고 괴로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그것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가르쳐
두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지도는 상세하게 소설[인간혁명]의 '오사카'장(제31,32회)
중에서 소개 했지만 거듭 그 일부를 말씀드렸다.
학회원으로서 사명의 신심을 관철하는가 퇴전하는가.
그것은 각자의 자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과의 보를 받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퇴전한 뒤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불쌍하다. 사의에 희롱당하여 영원히 후회를 남겨서는 안된다.
아무쪼록 리더인 여러분들에게는 여러 회원들에게 대성인의 불법의
본의에 입각한 납득이 가는 명쾌한 지도를 부탁한다. ..
"경을 넓혀서 남을 이익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 승려
난을 받으면서도 홍법해 가야만 하는 것이 승려 교치의 박해는
1276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뒤 쇼우보는 방을 비워주고
생가가 있는 가와이로 돌아간다.
한편 시모스케보(닛슈)와 에치고보(니찌벤)두 사람은 일단 방은
비워 주었지만 다시 류센사 내에 숨어산다.
그리고 그 고장의 아쓰하라 고을은 말할 나위도 없고, 멀리 타향에 까지
나가 절복, 홍법에 면려했다. 난에 굴하지 않고 민중속에 뛰어들어
인간 속을 헤치고 들어가, 사의를 타파하고
정법을 가르쳐서 한 사람 또 한 사람 구해간다 - 이러한 닛코상인과
그 제자의 모습이야말로 참된 불법자이고 진실한 승려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은 말법의 승려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는
남에게 미움 받을수록 수지하고 실천해 가는 것을 진실한 대승(大承)의
승이라 하였더라. 또한 경을 넓혀서 남을 이익케 하는 법사이니라"
(어서 556쪽)
-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는 남에게 미움을 받을수록 수지하고 실천해 가는
것을 진실한 대승의 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그 경을 넓혀서 사람을 이익케 하는 것이 법사인 것이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난을 만나지도 않고 절복하지 않고 민중을 위해
이바지하려 하지도 않는 승려에게 어찌 불제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라는 대성인의 엄한 훈계이시다.
정종의 승복은 '절복행의 작업복' 승복은 무엇때문에 본래 정종의
승려가 착용하는 승복도 결코 권위의 상징도, 존경을 강요하기
것도 아니다.
총본산 제 26세 니치칸 상인은 정종에서 '생명주(生命紬) 5조의 승복
생명주는 보잘 것 없는 비단, 5조는 다섯 폭의 천으로 만든 법의)를
착용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생명주 5조는 그 모양이 단협하고 기거동작에 가장 편리하다.
따라서 행도잡작의 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어찌 동분서주하여 절복행을 하기에 좋지 않으랴.(당가삼의초) -
생명주 5조의 옷은 짧고 좁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기거동작에
가장 편리하다. 그래서 '행도잡작의'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동분서주하여
절복을 실천하기에 어울리지 않는가 - 라고. 니치간 상인은 정종에 있어서
승복의 의의를, 승려의 몸을 권위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불도수행의
작업복' 즉 절복에 분주하기에 민중구제를 위한 '광포의 행동복'이다 라고
정하신 것이다. .
삼열사에는 '조금도 권위에 굴하지 않는 법화혼(法華魂)
무명의 서민이 법난의 선두에 닛코상인의 지휘하에 열렬하고 확신에 찬
홍법의 싸움은 사람들의 공감을 넓혀간다. 이윽고 아쓰하라의 땅 일대에
창제의 소리가 울리는 집이 급속히 늘어났다.
그래서 1278년 진시로의 3형제가 입신, 아쓰하라의 농민신도의 중심자가
된 것이다.
3명의 이름은 닛코상인이 '본존분여장(本尊分與帳)'
(백련제자분여신어필어본존목록사)에서
재가신자의 최초로 기록하시며, "이 3인은 에치고보 시모스케보의
제자 20인 중에 속한 사람이다.
홍안 원년 신심하기 시작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시로라는 이름에 대해 (그의) 형이 야토지 입도, 동생이 야고로,
야로쿠로 라고 한다
면 '진시로(神四郞)'라고 하기 보다는 '야시로'라고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왜냐하면 통례상 서민의 이름에 '신(神)'자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니치코 상인은 '홍안2년 10월15일의 감죄 이후... 흥사가(닛코상인)
추선공양 하실 때에 진시로라고 찬양하는 개명을 하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된다(아쓰하라 법난사)라는 견해를 밝히시고 있다.
즉 '진시로'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그 공적을 기려서 닛코상인이 주신 이름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또 대성인의 문하에 야시로라고 하는 신도가 몇명 있었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진시로 형제는 입신 전부터 지역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던
'서민의 리더'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 농민의 신분이었지만 명주(名主:자작지(自作地)를 가진 농민, 자작농)
그룹 이었다고 한다.
니치코 상인은 "이 3형제는 재가의 신분이면서도 다소 문무의 소양도 있고,
성실하며 대담 해서 무사들도 부끄러워할 정도의 대장부였기 때문에,
후에 대난을 만나서 조금도 권위에
굴하지 않는 법화혼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용(地湧)의 (義)라고 하는데, 때가 오면 민중 속에서 지역과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인재가 출현한다.
사명을 자각하고 광포를 추진해 간다. 이것은 불가사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순난의 신도'가 있어야 '대백법'은 번창
'자각하라 민중이여' '변혁'은 여기에서 사회의 대다수는 말하자면 '서민'이다.
그 민중이 강요당하고 있는 종교적 권위에는 아무런
실체도 없고, 도리어 자신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간파했을 때 위대한 변혁이 시작된다.
언제 어떠한 종교이든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경우의 주요 테마는 늘 '자각하라,
민중이여,반성하라, 성직자여'인 것이다. 그러나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성직자가 스스로 자각해서 자기를 변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지극히 어렵다. 먼저 민중이 자각하고 각성하는 것이다.
정의에 의해 깨우친 민중의 용감한 전진이 있어야만 대성인이 가르치신
위대한 종교혁명의 여명이 시작된다. "화합승을 붕괴시켜라!- 악의 모략"
교치는 류센사에서 대성인의 문하를 추방했지만 정법신앙의 불길이
조금도 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넓게 타오르는 것에 놀랐다.
이대로 놔두면 자신의 지위가 위험하다. - 그는 여러가지 모략을 꾸며서
동료를 모아 반법화당을 형성해서 탄압의 기회를 엿보았다. '마의 집단'
'악의 야합' - '무리짓는' 것도 정법파괴 세력의 특징이다.
교치가 우선 눈독을 들인 것은 진시로 형제의 큰형인 야토지입도였다.
염불의 재가 입도였던 것 같으며 니치코 상인은 "탐욕,간지가 여간내기가
아니며 마을에서도 유력자"(아쓰하라 법난사)라고 하셨다.
욕심 많고 악지혜에 뛰어난 마을의 유력자였던 모양이다.
야토지는 평소의 언동과 성격으로 보아 전부터 진시로 형제들과 대립하는
일이 많았다. 동생들이 정법을 믿고서 부터는 형의 권위로써 반대하여,
원래 믿던 염불신앙으로 돌이키려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동생들로부터 "염불은 무간 지옥의 업이다"라고
파절 당했다. 그 분함도 있었던 것일까. 동생들을 퇴전시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교치의 감언에 유혹되어 그 한패가 된 것 같다. 불신과 불안
질투와 증오를 북돋우어 친한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 신앙자의 연결을
내부로부터 분단하려 하는 것이 마의 책략이다.
더욱이 교치는 정법의 신앙자 중에서 신심 약하고 동지에게 원질을 품고
있던 불평분자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이익으로 유혹하기도 해서
퇴전시키고 반역시켰다. '약한 곳'만 노렸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입신해서 얼마 안 된 오타치롱에치카마사,
나가사키로효에도키쓰나들의 무사나
닛코상인 홍법에 응원해 파견되어 있던 산미보등의 승려가 퇴전하여
정법을 탄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대악마는 귀승(鬼僧)이 되어 성불을 방해'
산미보 - 질투로 퇴전한 장로 니치코상인은 산미보에 대해서 "산미보라고
하는 자는 시모우사 출신의 니치교를 말하며 제자로서는 노배이며 에이산
장시의 학문의 공도 쌓여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신행이 부족했던 탓에
마침내 사적대의 방법의 악도에 떨어져 임종도 나빴다(아쓰하라 법난사)
라고 말씀하셨다.
'4~5년 존명했다면 육노의 제2위에 반드시 있었을 사람'이었다. 라고도
말씀하신다.
산미보는 닛쇼다음의 장로이고, 닛고상인의 선배였다.
교토에 유학하고 류조보를 논파했던 구와가야쓰 문답에서도 활약하는 등
학재도 있었다. 법론에 뛰어나 문하중에서도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성인의 지시로 아쓰하라의 홍법의 응원에 임했을때 산미보는
닛코상인의 선배이고
격이 위라는 권위를 내세워 지도하려고 했다.
산미보는 교조적, 관념적인 설법은 가능했어도 민중 속에 뛰어들어
홍법하고 지도한다고 하는 실천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거만하고
권위주의적인 본질은 현명한 서민에게 간파되어
뜻대로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해 닛코상인은 신명을 아끼지 않고 광포의 길을 여는 과감한
실천과 뛰어난 인격에 의해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존경 받았다.
그것을 본 산미보는 자기를 반성하기는 커녕 닛코상인을 질투하여
진에의 불꽃을 거세게 태우고 끝내는 증오마저 품게 되었던 것 같다.
거기서 교치의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산미보는 간단하게 사적대의
반역자, 광포의 방해자로 전락해 버리고 끝내는 지옥에 떨어지는
고뇌를 받게 된다.
'질투의 마음'의 허점에 '마'가 들어왔던 것이다.
"대악마는 거룩한 승으로 되어 부모, 형제 등에게 붙어서 사람의 후세를
막는 것이니"(어서1497쪽) - 대악마는 거룩한 승이 되어 혹은 부모나
형제 등에 붙어서 사람들의 성불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라고 대성인은
가르치시고 있다.
가령 지위가 높고 존경받는 입장의 고승이라도 사의에 현혹되고
또한 질투나 진에 등의 감정에 휩싸여 '정법'을 잃을 경우에는 일변해서,
사람들의 성불을 방해하고 광포를 방해하는
'대악마'로 되는 경우가 있다.
대성인의 말씀에는 한치의 과오도 없다. 현재와 같은 문제의 본질도
어서에 비추어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 겁쟁이, 탐욕 - 정법파괴자의
공통점 또 대성인은 산미보등의 퇴전자에게 공통되는 생명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겁쟁이고 법리를 기억하지 못하며 욕심이
많고 의심이 많은 자들"(어서 1191쪽) - 겁쟁이이고
구도심이 없으며 욕심이 많고 의심이 많은 자들 - 이것은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광선유포 하려고 한다든가 화합승을 넓히려는
생각은 없이, 탐욕스럽고 시기심이 강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퇴전, 반역의 무리들의 언동을 상기해보면 누구라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수가 있다. 또한 입장이나 역직이 높을수록
퇴전하고 반역한 경우의 영향은 크며 그 죄도 깊고
무겁다. 이상 말씀드린것을 전제로 해서 다음에 법난이 본격화되었던
구체적 경과를 언급해 두고 싶다. 현재 상황과 통하는 면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 '모략문서'에 올바른 정보로 대응 1278년 5월경, 교치는
가짜 교서를 만들었다.
'법화경을 믿는 자는 중죄에 처하고 문책이 있을 것이다 - 라고
가마쿠라에서 하달이 있었다'고 퍼뜨리고 다니게 하여, 막부의
권위로 사람들을 퇴전시키려고 노렸던 것이다.
대성인은 즉각 진상을 간파하셨다. 그 직후에 쓰신 구보니에게 보낸
소식(消息)에 나타나있다.
그 속에서 사도에서도 세 번에 걸쳐 가짜 교서가 만들어져, 탄압의
구실로 된 것을 지적하시고 이번 아쓰하라의 사건도 똑같은 수법이라고
교시하시고 있다. 당연히 닛코상인에 대해
서도 그런 취지의 지시가 있었다고 배견된다.
대성인의 지도에 의해 막부의 교서가 가짜이므로, 두려워할 것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신도인 사람들에게 철저히 알려졌다. 그 때문에
교치의 모략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악의 모략에 대해서는 항상 본질을
꿰뚫은 올바른 정보를 널리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의 의도를 재빨리 꺾고, 타파해 갈 수 있다.
'폐쇄된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폐쇠된 논리'로 아무리 궤변을 되풀이해도
민중은 속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으로 양식 있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뿐이다. 그래서는 법을 낮추어 버린다.
'이체동심이면 만사를 성취'
'폭력과 협박' 교치 등에 의한 박해는 1279년 4월경부터 심해졌다.
이 해는 오미야의 아사마신사가 조영중이었기 때문에 항례의
야부사메(말위에서 활을 쏘는 행사)가 아쓰하라 고을 내의 삼일시장에
있었던 분사에서 행해졌다.
4월8일 야부사메를 구경하는 혼잡속에서 아쓰하라의 신도 한 사람인
시로가 습격 받았다.
범인은 시모카타정소 대관의 지시를 받은 자로써,
칼로 상처를 입었다고 하니 무사의 소행인 것 같다.
8월에는 신도인 야시로가 습격당하여 살해되었다.
더욱이 목을 잘리어 "법화경의 신앙을 계속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로 삼았다. 역시 암살자가 무사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권력의 폭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포학을 당하면서 아쓰하라의 사람들은 죽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비열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신심과 단결을 관철하였다.
"아쓰하라의 자들의 마음가짐이 이체동심이면 만사를 이루고 동체이심이면
제사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중략)日蓮의 동류는 이체동심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 악은 많아도 일선에는 이길 수 없으니"
(어서1463쪽)
- 아쓰하라 사람들의 신심의 뜻이 이체동심이라면 만사를 성취할 수가 있다.
동체이심이라면 어떤일도 이를 수는 없다.(중략)日蓮의 일문의
이체동심이므로 인원수는 적지만 대사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홍통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악은 많아도
일선에 이길 수는 없다.
.. 마(魔)란 '파괴자' 마(魔)란 범어 '마라'를 줄인말로 '파괴'라고도 변역된다.
개인의 신심을 파괴하는 동시에 화합승 - 신심의 단결을 파괴하는 작용을 한다.
마란 '파기자'인 것이다.
폭력에 의한 육체적인 박해나 처벌, 처분이라는 사회적 제재등의
정신적 압박, 이익을 은근히 부추기는 경제적 유혹등에 의해 개인의
신심을 파괴하고, 퇴전시키는 것은 마의 상투적인 수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 멋대로 날뛰는 때야말로 더욱더 신뢰의 유대를 강화시켜,
이체동심의 전진이 아주 중요하게 된다.
'정의의 단결'이야말로 마의 모략을 막는 방파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성인은 "부디 부디 스루가의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되라고 말씀드리시라"(어서1487쪽) - 아무쪼록 스루가의
모두 같은 마음이 되시도록 하라고 전해 주시오 - 후지군의 가미가타
지역에 사는 미사와고지로와 오스키에 사는 조렌보에게, 시기는 다르지만
단결의 중요함을 가르치시고 있었다는 것을 배찰할 수 있다. 마침내
강경수단 - '도당(徒黨)'을 짜서 습격 여러가지 책모가 모두 실패하여
광포의 전진을 막을 수 없게 된 교치들은앞이 막히고 말았
다. 그러나 이젠 물러설 수도 없다. 마가 그 몸에 들어간 자들은 '폭주'했다.
마침내 비상수단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대성인의 문하인 농민신도 20명을 마음껏 폭행한 다음에 부당하게
체포한다는 - 폭거로 나왔던 것이다.
1279년 9월21일, 시모스케보(닛슈)의 자작의 소유논에서 벼 베기가 행해졌다.
절복되어 지도를 받았던 감사의 마음에서, 진시로를 비롯해 다수의
농민신도가 모였다.
교치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관리나 교치일파의 무사들이
류센사와 야토지일당의 농민 등을 다수 끌어 모아, 활이나 칼로
무장하여 벼 베기의 현장을 급습했다.
시모스케보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진시로 등이
재빨리 피신시켰던 것 같다.
그러한 '시간을 벌기'위해서이기도 했고, 또한 너무나 부당한 소행에
신도들이 마침 그 자리에 있는 낫이나 막대기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응전했다고 생각된다.
민중의 '응전(應戰)'극
총본산 제59세 니치코 상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신도 측에서는 지금까지는 흥사(닛코상인)의 훈계와 슈벤양사
(닛슈,니찌벤)의 훈유를 굳게 지켜서 때리는 대로 얻어맞고 칼로 치면
치는대로 잘리는 형편인데, 대개는 도망치는 것이 상수로 되어 있었으나
재삼의 난폭에 더는 못 참고 울화통이 터져서 한 사람도 도망치거나
듣기는 커녕 슈사등이 아무리 말려도 슈사를 퇴산시키고서 진시로가
지휘하여, 도리어 그 자리에 있는 막대기나 낫으로
응전을 했다.
아무튼 살벌한 시대의 백성이므로 완력도 있고 무술도 할 수 있다. 하물며 진시로는 몸은 농부이지만 무도의 소양이 우둔하지 않았던 자이므로
(少勢)의 임기응변의 진퇴가 자유롭다. 그 중에는 폭도의 무기를 탈취하여
목숨을 걸고 사자분신의 용기를 휘둘렀다.
평소에는 번론으로 하던 절복을 오늘이야말로 무력으로 바꾸어 힘껏 싸웠다.
이 미운 교치놈, 야토지가 주은 것에 대해 오래 전부터의 분함을 풀 기회는
바로 오늘이다.
시로의 원수 야시로의 원적 각오하여라, 법화절복의 이검의 맛을 받아
보라고 모두가 질세라 분투하여 마음껏 다수의 악도를 괴롭혔으나
유감스럽게도 다세(多勢)에 무세(無勢)라 마침내 20명의 신도의 힘이 다하여
, 모두가 정소(관청)에 구속되었다."(아쓰하라 법난사)
그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생생한 광경묘사이다.
폭력에 대한 '응전' - 현대로서는 민중의 '대언론전'이 정의의 주장 전개에
이은 전개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리는 힘이다.
이야기한 몫만큼 정의는 확대되어 간다. 광선유포가 넓혀져 간다.
어쨋든 '박해하는 측'에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도리가 없기 때문에,
힘에 의해 정의를 눌러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권위, 권력이나
폭력 등, 힘에 의한 박해를 가하는 자는 본질적으로는, 또 불법의 눈으로
본다면 이미 '박해 당하는 측'의 민중에게 패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는 반드시 멸망해 간다.
아쓰하라 법난의 도식(圖式)'원죄 만들기'로 화합승을 파괴 책모실패--
발동--신도는
더욱 단결 '엉터리의 소장' 교치들은 체포한 20명을 시모가타 정소에 연행하는 동시에 야토지가 고소인이 되어 소장을
제츨, 정소에서는 그것을 가마쿠라에 보냈다.
20명의 죄상은 현재로 말하면 불법침입, 강도, 폭행, 상해였었다. 물론 사실무근의 누명이다.
소장의 내용에 대하여 어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금월21일 다수의 인세(人勢)를 동원해서 궁전(弓箭)을 휴대하고 원주분의 방내에 쳐들어가서 시모스케보는 승마 동반하고, 아쓰하라의 농민인 기지로 오는 푯말을 세우고 벼를 베어 다가, 닛슈의 주방에 거두어 넣었느니라"(어서 852쪽) 이달(9월)21일 다수의 사람을 모아 활을 가지고 (류센사)의 원주인 방내에 들어가, 시모스케보는 말에 탔으며, 아쓰하라의 농민,
기지로는 (원주의 논에) 푯말을 세우고, 익은 벼를 베어들여, 닛슈의 주방에 운반했다 라고.
"그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서 사상자가 생겼으므로 빨리 이 난폭한 사람을 체포하여 법령대로 재판하여 주십시오"라고 상소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엉터리이다. '사실과 정반대'이다.
또한 그들은 비열하게도 아쓰하라의 신도인 시로나 야시로의 상해, 살인사건까지 시모스케보 일행의 범행일 것이라고 참소했다. 물론 이러한 죄상은 구실에 불과하고 신앙을 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무실의 죄를 씌우고 처부 한다는 것도 권위, 권력이 신앙을 탄압할 때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대성인에 대한 이즈유죄, 사도유죄등도 악구의 죄를 씌워서 처분되었다고 추중되고 있다.
(이번의 문제에서도 이른바 '11.16의 스피치'가 발단인 듯이 종문은 위장해 왔으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종문이 몰래 녹음한 스피치에 대한 테이프를 이용하여 더욱이 그릇된 반역(反譯)을 한 다음, 그것에 곡해와 왜곡을 가한 것이며, 학회가 사실 오인을 지적하자, 중심이 되는 항목에 대해 '사과하고 철회합니다'라고 하는 허술한 것이었다.
원래 아무런 비판당할 만한 그러한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날조해서 비방한다 모든것이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트집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본당의 의의에 관하여 "닛다쓰 상인도 말씀하시지 않았던 일을 신도의 주제에 앞질러서 단정한 만심이다"라고 비판해 온 것도 금방 "닛다쓰 상인의 확실한 말씀이 있었으므로 정정한다"고 철회라고 있다.
닛다쓰 상인의 지남을 바르게 근거로 한 발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며, 처음부터 비판해야 할 것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처음부터 유죄라고 마구 꾸짖는 그야말로 '원죄(無實의 죄)사건'의 전형이 아닌가.
'지금이야 말로 성불의 때'
그런데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20명에게 씌워진 죄상은 중죄에 해당하며, 형사사건으로서 시소(侍所)의 솬할 아래 두게 되었다.
즉시로 시소의 소사(차관)인 헤이노사에몬요리쯔나의 지시로 20명은 가마쿠라로 송치되었다.
20명이 가마쿠라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순경이라고 생각된다. 구력의 10월 초는 현재의 11월 중순경에 해당할 것이다. 당시는 지금보다 겨울의 기온이 낮고, 눈도 많으며 훨씬 추웠던
것 같다. 또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대성인은 10월 1일, 문하일동에게 대하여 '성인어난사'를 쓰시어 가마쿠라의 시조깅고에게 보내시고 있다. 여기에서 대성인은 '출세의 본회'이신 대어본존 건립의 날이 가까워진 것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아쓰하라 법난이 단순이 한 지방의, 일부 신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하 전체에 관계되는 사건이며 대성인 - 일대의 화도상(化導上)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교시 하시고 있다고 배견된다.
그 속에서 대성인은 말씀하셨다. "저 아쓰하라의 우치한 자들을 말로 격려할 것이요, 위협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오직 한결같이 결단하게 하여라.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요 나쁘게 되는 것은 필정이라고 생각하라. 배가 고프다고 하거든 아귀도를 가르치고, 춥다고 말하거든 팔한지옥을 가르치며, 두렵다고 생각하거든 매를 만난 꿩, 고양이를 만난 쥐를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어서 1190쪽)
- 저 아쓰하라의 (체포당한) 우직한 자들에게는 강하게 격려하되 위협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결같이 결단하게 하시라, 좋은 결과로 되는 것은 불가사의며 나쁜 결과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라고 가르치시라. 공복에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아귀도의 고통을 가르치시라.
추위에 견딜 수 없다고 하거든 팔한지옥의 고통을 가르치시라. 두렵다고 하거든 매를 만나 꿩, 고양이를 만난 쥐를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라 라고. .. 대자비의 세계가 '본불님의 세계' 가마쿠라에 잡혀 있는 신도를 걱정하시어 "틀림없이 추울 것이다. 필시 배가 고플 것이다.
얼마나 두려울까" 라고 깊이 동정하시면서도 성불을 위해서는 결탄코 져서는 안된다.
기가 꺽여서는 안된다고 격려하시는 대성인 - 그 대자비에 감동하여 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퇴전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깊고 깨끗한 '사제의 유대가'있고
'신앙의 진수'가 있으며 '생명유대의 드라마'가 있었다고 배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신도의 신심의 일 따위는 어떠튼 상관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파화합승에 면려해라" - 이런 따위의 냉혹하고, 무자비, 오만의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본불님의 세계"와 전혀 반대인 '대마(大魔)의 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당당히 공장대론(公場對論)을' '모략을 꾸미는 것은 제바'
사제일체로 정의의 주장 닛코상인은 야토지의 소장을 알게 되자, 그에 상대하는 신장(申狀:막부에 보내는 상신서)의
원안을 쓰시어 미노부의 대성인님께 보내시고 지시를 바랬다.
사건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명백히 하여 야토지의 소장에 반론하여 20명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동시에, 교치의 악행을 지적하여 정당한 재판을 강하게 요구한다. - 그 닛코상인의 문안은 그대로 두고 대성인이 앞부분을 가필하셨다.
이것이 '류센사신장'이다. 신장에서는 '입정안국론'의 주장을 되풀이 하시어, 닛슈,니찌벤들이 日蓮대성인의 제자가 되어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은 나라를 생각하기 때문에 한 행위라는 것, 미심쩍은 일이 있으면 고승과 공장에서 대론시켜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시고 있다.
그리고 "모안(模案)을 꾸며서 종종의 부실을 고해 바치는 것은 어찌 제새의 조달이 아닐손가"(어서 853쪽)
- 계략을 꾸며서 여러가지 엉터리를 고해 바친다는 것은 석존 재세시의 제바달다와 똑같지 않은가 라고. 즉 당당하게 공개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고 모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제바달다'의 존재라는 말씀이시다. '류센사신장'은 첫머리에서부터 "이러한 연유에 의하여 불심(不審)을 가지신다면"(어서 852쪽 8행째,원문은 한문)까지를 대성인이 집필하시고, '(불심자)고승들을 불러서부터'
최후까지는 닛코상인이 쓰시고 있다. 그야말로 '사제일체'
'사제공저'의 어초인 것이다. 대성인은 권력에 의한 탄압의 기회를 포착하여 막부에 대해 재차 불법의 정의를 호소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난이 닥쳤을 때야말로 정의를 주장해야 할 때이다.
용약 싸워야 할 때이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옥중에 있어서 조차 검사를 상대로 일보도 물러 서지 않고 확회의 정의를 계속 외치셨다.
가마쿠라에 도착한 20명은 난폭한 취조를 받아 법화겨을 버리고 염불을 부른다는 기청문을 쓴다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위협을 당한 것 같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저 다이신보나 야토지들이 교치의 꾐에 빠져 폭행, 살상사건을 일으킨 것이 사건의 진상이다. 그것을 피해자측(농민들)이 사과하여 기청문을 쓴다고 하는 것은 '고금미증유의 이상한 일이니라'(어서 1456쪽)이며 지금까지 아직 들어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절대로 기청문을 써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고 있다.
(피해자에게 사죄시킨다고 하니 말인데, 종문에서도 '사죄요구서'라는 것을 내 놓았다. 어느 미입신의 변호사는 종문의 강압적인 행위에 대해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종문이 이와같이 발전해 있는 것은 바로 이케다 SGI회장을 비롯해 학회의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종문을 지켜왔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 자식은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자식의 마음을 모르는 어버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신도의 마음을 모르는 종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도에게 이바지 할대로 해놓고 사정이 나빠지게 되면 '자 이것으로 헤어지자'라고 하는 짓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문이 하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것을 비판하여 시정한다는 것은 바로 신도의 의무가 아닐까요"(고타니야시부로 변호사의 말) 종문이 하는 자세는 헤이노사에몬노죠 등의 수법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
. '신심을 지키는 신도, 권위를 지키는 악인' 1279년 10월 17일의 오후 6시경,
닛코상인의 편지를 휴대한 급사가 가마쿠라로부터 미노부의 대성인에게
도착했다. 10얼 15일에 체포된 아쓰하라의 20명이 헤이노사에몬노조에 의해 고문을 받아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모자'로 간주된 진시로, 야고로, 야로꾸로의 3명이 처형되었다는 보고였다. 또한 나머지 17명은 추방되었다.
닛코상인은 '본존분여장(本尊分與帳)'속에서 후세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고 있다."이 3인은 ... 마침내 목을 잘렸느니라. 헤이노사에몬입도의 짓이니라. 자식인 이이누마한간(13세)은 명전(화살)으로써 심하게 쏘아, 염불을 부르라고 재삼 이를 책하였지만 20인은 더욱 부르지 않으므로 장본인은 3인을 참죄에 처했노라" 이 세사람은 마침내 목을 잘리고 말았다.
헤이노사에몬입(요리쯔나)의 명령이다. 그 자식인 13세의 이이누마한간스케무나가 명전으로 심하게 쏘아 염불을 부르라고 재삼에 걸쳐 책했으나 20명중
누구 하나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장본인(주모자)으로 된 (진시로등) 3명을 참죄에 처했던 것이다
헤이노사에몬노조의 사저의 넓은 뜰에 끌려나온 20명은 기조사실의 취조는 거의 없고 요리쯔나가 직접 "법화경의 제목을 버리고 염불을 불러라"라고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협박에 굴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요리쓰나는 "나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들은 천마가 붙어 있는 것이겠지"하고, 차남인 13세의 소년에게 명전의 화살로
진시로등을 쏘게 하였다.
명전의 화살이란 오동나무로 만든 우는 화살을 말한다.
순무 모양을 한 나무는 대마무의 속을 파내어 화살 앞에 붙인 것으로 쏘면 구명에 바람이 들어가 퓨웅하고 소리가 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 소리를 듣고 악마가 퇴산 했다고 했던 것이다.
쇠로 된 화살촉이 아니기 때문에 맞아도 몸에 박히는 일은 없으나 무서운 소리와 화살에 맞는 아픔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곧 항복한다고 한다.
그러나 20명은 그러한 정신력, 육체적인 고문을 당해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 높게 제목의 소리로 응했던 것이다.
당시 천하에 견줄 자가 없는 권세를 자랑했던 요리쯔나도 신명을 아끼지 않는 서민의 강한 신념앞에 맥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모두가 넙죽 엎드리는데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요리쯔나는 권위, 권력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내심으로 두려움과 패배감을 품으면서 그것을 분노와 증오로 바꾸어 진시로등 3명의 처형을 명령했을 것이다.
자기의 권위를 자랑하는 자일수록 그에게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치 못한다는 '수라의 마음'이 강하다.
이것이 '독재자의 심리'이다. 대어본존은 민중의 '불석(不惜)의 법전'을 기회로 영원히 빛나는 '불퇴의 신심의 빛' 아쓰하라의 사람들은 가르쳐 주었다. 어떠한 권위, 권력도 정법을 내걸고 불석의 신심으로 굳게 단결한 민중 앞에는 전혀 무력하여 이윽고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표면의 모습만을
본다면 삼열사는 처형되어 패배한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중 사이에 확고한 신심이 깊이 뿌리내린 것을 몸으로써 실증했다. 이 법난을 계기로 대성인은 출세의 본회이신 '일염부제총여의 대어본존'을 건립하신다.
여기에 삼열사의 이름은 영구히 남고 영원히 계속 빛나는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같은 길을 나아간다.
지금의 투쟁이 '일염부제 광선유포'의 커다란 길을 개척해 간다는 것을 확신하고자 한다. 닛다쓰 상인의 말씀 - 학회가 말법광포를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학회의 초대 마키구치 회장도 또한 정법의 명맥을 지키기 위해 부당한 탄압과 투쟁, 옥사하셨다. 순교의 일생이었다.
당시 이사장이었던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도 함께 투옥 당하셨다. 음험하고 집요한 협박도 있었다. 그러나 일보도 물러섬이 없이 사자와 같이 싸우셨다.
이것이 학회정신의 원점이다. 여기에 바로 대성인이 보여주신 사신홍법의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
아쓰하라의 삼열사가 보여준 불석신명의 정신, 어떠한 권위,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정의의 행동은 초대, 2대 회장이래, 창가학회 속에 엄연히 계속 살아있다. 맥동하고 있다.
총본산 제 66세 닛다쓰상인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 이 12일(1279년 10월 12일)을 계기로 삼아,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의 건립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시어, 진시로등을 원주(願主)로 세우시어, 진시로는 아직
이때는 살아 있었으므로 진시로의 이름은 쓰지 않고 대성인의 기심의 인물의
이름에서, 혹은 또 전에 살해된 야시로구니시게라고 하셔서 본존님을
서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계단의 원주인 야시로구니시게 법화강중등 삼가 말씀드림.
1279년 10월 12일 이라고 본존님에 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창가학회의 사랍들은 이 법화강중(法華講衆)의 정신을 가지고, 방법퇴치에 신명을 바쳐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지금 시대에는 본존님을 호지하고, 부촉해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학회입니다. 또 영법구주를 위해 사신홍법으로써 불법을 수호하고, 계단의 대어본존님을 호지하며, 그리고 절복을 하고 있는 것은 학회입니다.
또 모든 방법의 난을 연구하고, 육난구이를 몸으로써 행하여 말법 광선유포를 실현하고 있는 것도 학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성인이 말씀하신 법화강입니다. 법화경의 참된 정신은 지금의 학회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로 나는 그 학회의 회장인 이케다 선생님을 법화강 총강두로 의뢰한 것입니다" 라고. 우리들이야말로 '본불님의 영예로운 문라'인 것이다. .. 명확한 법화의 현벌(現罰) 퇴전자: 산미보- 변사(變死), 오타치까마사- 낙마(落馬), 나가사키도끼쓰나- 낙마
박해한 주모자들: 다이라노요리쓰나- 모반죄로 주살(誅殺),
장남 무네쓰나- 사도로 유죄, 차남 스케무네- 아버지와 함께 자살, 교치들-
비참한 '지옥도 ', 다이신보- 낙마하여 민사(悶死)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잘라 말하시라'
1279년의 8년전인 1271년 9월10일에 대성인은 다음과 같이 헤이노사에몬노조를 간효하시고 있다.
'부당하게 처벌을 하게 된다면 나라에 후회할 일이 생기리라. 日蓮이 감죄를 당한다면 부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범천, 제석, 일월, 사천의 가책이 있어서 원류(源流), 사죄(死罪)의 후 백일, 일년, 삼년, 칠년 내에 자계반역난이라고 하여 이 일문에 내란이시작될 것이니라.
그 후에는 타국침핍난이라 하여 사방에서 특히 서방으로부터 공격당하게 되시리라. 그 때 후회가 있으리라(어서 911쪽)라고.
도리에 맞지 않게 (日蓮대성인) 죄를 씌우려 한다면 나라에 후회할 대사가 일어날 것이리라. 日蓮이 막부의 감죄를 받는다면 부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된다.
(그 결과) 범천, 제석, 일천, 사천왕의 가책이 있어서 (日蓮대성인을) 원류나
사죄에 처한 후, 백일, 1년, 3년, 7년내에 자계반역난이라고 해서 호조일문에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 후에는 타국침핍난이라고 하여 사방에서 특히
서방에서 공격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 (日蓮대성인에게 죄를 씌우려 한 것을)후회할 것임에 틀림없다.- 라고.그리고 대성인은 아쓰하라의 법난에서 투쟁하시는 닛코상인에게 이 1271년의 상황을 근거로 하시어, 단호히 항의하라고
명하셨다.
"헤이노깅고에게 말하는 방법은, 문영의 감죄시의 성인의 말씀을 잊으셨느뇨. 그 재앙이 아직껏 다하지 않았으니 거듭하여 십나찰의 벌을 초래하시려느뇨. 최후에 잘라 말하시라"(어서 1455쪽)라고.
-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시오.(즉)'문영의 감죄때의 日蓮대성인님의 말씀을 잊으셨는가.(방법의 죄를 범하여)그 죄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거듭하여 십나찰의 벌을 초래하려는 것인가'라고 최후에 잘라 말하시오
라고. 대성인의 확신 앞에는 세속의 권위, 권력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의 요리쓰나는 호조도키무네의 사후, 막부내의 라이벌이었던 아다치야쓰모리를 집권 사다토키에게 참언을 하여 멸망시키고 완전히 막부의 실권을 잡아 7년간에 걸쳐서 공포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1293년 4월에 장남 무네쓰나에 의하여 '아버지는 차남 스케무네를 장군으로 하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참언당하여 사다토키의 토벌에 의해 삼열사를 처형한 자택에서 일족이 동시에 멸망했다. 또한 밀고한 무네쓰나도 아버지와 동생을 밀고한 불효자라 하여, 사도에 유죄 되었다.
닛코상인은 아쓰하라 법난의 14년 후에 요리쓰나, 스케무네 부자가 모반죄로 멸망한 것을 '법의 현벌을 받았노라'(본존분여장)고 기록하시고 있다.
또 총본산 제 26세 니치칸 상인은 요리쓰나의 멸망의 원인을 "멀리는 연사(蓮師:대성인)타척의 대과(大科)에 의하고, 가까이는 아쓰하라의 살해에 의하느니라"(선시초문단)고 밝히시고있다.
억울한 죄로 대성인을 사죄, 유죄에 처하고, 아쓰하라의 삼열사를 사형시킨 장본인 헤이노사에몬노조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끝에, 자기 자식의 참언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이 사실은 '인과의 이법'의 엄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가마쿠라 막부도 호조일문이 멸망하여 막을 내렸다.
막부멸망의 원인은 몽고내습의 후유증과 그 후의 악정에 있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불법의 눈으로 본다면 그 근저에는 대성인의 '입정안국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퇴전자, 가담자의 전락한 말로'
한편 법난 때 교치의 꾐에 빠진 토전자 또한 탄압에 가담한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대성인은 '성인어난사'에서 '오타노의 지카마사, 나가사키지로호에노조도키쓰나, 다이신보의 낙마등은 법화경의 벌의 나타남이로다'(어서 1190쪽)라고 말씀하셨다. 다이신보는 낙마가 원인이 되어 이윽고 민사(끝까지 괴로워 하다가 죽는 것)한 것 같다.
어서에는 '또한 다이신보의 낙마도 밝혀지리라. 밝혀지면 사람들은 유독히 두려워 하리니' (어서1455쪽)- 이 일(산미보의 사망)은 그들(교치들)도 내심으로는
겁먹고 두려워 하고 있을 것이다 - 라고 말씀하셨다.
또 산미보에 관해서도 '이 일은 그 사람들도 내적으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느니라'(어서1191쪽) - (교치등의 죄를 말함으로써)또한 다이신보가 왜 낙마했는지도 분명하게 될 것이다. 분명해지면 사람들은 특히 (현벌을) 두려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변사였다고 한다.
또한 아쓰하라의 사람들을 박해한 주모자인 류센사의 원주대, 교치나 피를 나눈 동생들을 억울한 죄로 살해당하게 했던 야토지입도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황폐해져 간 악려가 지배한 사원'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제 59세 니치코상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사실, 법난 후에는 닛슈, 니치벤도 다른 법화승도 얼씬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사운(寺運)이 부흥하리라 생각했는데 농민에게도 양심이 있다."
"(농민들은)법화종을 박해한 후회 막심한 생각이 더해감에 따라서, 원주대나 야토지에 대해 머리숙이는 일을 꺼리게 되고, 절의 방사의 지붕을 새로 바꾸는
일을 돕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원주대 쪽의 승속들은 장애물이 치워졌기 때문에 활개를 치며 제멋대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원의 경영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우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자연 소멸되고, 그 동안에는 바람도
있고 불도 있고 물도 있어서 부탁하지 않아도 파괴를 돕고 있다.
"교치나 야토지가 아무리 이를 갈아도 따르지 않고 관권에 의지하는 줄도 끊어져, 꼼짝않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마을쪽의 다수가 반항할 것 같아서, 내노라 하는 방도의 장본인도 전전
긍긍하여 결국 지옥도에 굴러 떨어졌다.
류센사도 삼재(三災)를 만나 함께 흔적도 없이 되었던 것이다"(아쓰하라
법난사) 주변의 농민들을 비롯해 아무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게 되어 교치나 야토지의 말로는 비참했다. 류센사도 쇠운의 길을 걸어 이윽고 멸망했다.
권위를 내세워 정법유포를 방해하고 민중의 신앙을 파괴하려고 한는 악려들은 니치코 상인의 말씀대로 '지옥도'로 떨어졌다. 악려에게 지배된 절도 또한 멸망의 고갯길을 굴러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악의 집단은 분열과 항재으로
멸망' 민중을 경시하고 신도를 억압하는 악려에게 현명한 신도가 따를리 없다.
그 밑에 모이는 것은 산미보나 야토지와 같이 배은이나 망은, 질투나 증오, 탐욕이나 게으름, 광신이나 맹신에 지배당하여 불신과 시기로 그득찬 무리들일
것이다. 그런 인간은 '비판'은 할 수 있어도 '건설'은 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은 따져도 '이타'(利他)는 없고, '대립'은 해도 '단결'은 못한다. 곧 내분을 시작해 분열해 가는 것이다.
악려에 따라가서 신심이 강성하게 된 자 같은 것은 전무 할 것이다. 물론 성불의 공덕 같은 것도 있을리가 없다.
비참한 말로를 걷는 사례는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따라서 악려 밑에서는 차츰 신도가 떠나가고 절도 쇠망의 길을 걸을 뿐이다. 당시 뽐낼 대로 뽐내고 있던 류센사는 지금 자취도 없다. 이렇게 하여 지금 아쓰하라법난의 경과를 더듬어 보니 광포를 방해하는 '魔'의 수법은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변함이 없다는 것이 새삼 분명해진다. '본불님의 문하'로서
'광포의 정도'를 '법난'은 영예, 용감하게 '세계'로 어쨋든 '세계광선유초'는
본불님의 유명이며 창가학회의 사명이다. 이 전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천마는 유일하게 학회원에게 권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정종의 고승을 노려, 그 몸에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의도도 무너졌다. 민중이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본불님의 문하'이다.
7백년 전 과 똑같이 지금 강권에 의한 '민중탄압' '화합승의 파괴'가 행해지려
하고 있다. 이 법난을 대성인의 말씀대로 '불굴의 신심'과 '이체동심의 투쟁'으로 극복하고, 상쾌하게 ' 세계광선유포의 아침해'를 떠오르게 하기 바란다.
모두 깊은 불의(佛意)라고 우리들은 학신해 가기 바란다.
지금 용감하게 환희에 불타서 앞으로 전진한 사람이 '일생성불'과 '삼세의
영예'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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