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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 대성인의 생애와 약년표

가마쿠라.입정안국론.이즈유배

by 행복철학자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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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에서의 생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첮번째 국가간효(國諫)

대성인님께서는 1253 8월경 가마쿠라·나고에 마쓰바가야쓰에

작은 초암을 마련하시고 가마쿠라 거리에 나가시어

염불무간(念佛無間),선천마(禪天魔) 진언망국(眞言亡國)’

율국적(律國賊)  그리고 파사현정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방과 욕을 하며 방해했지만,

머지않아 닛쇼, 니치로가 제자가 되고 도키죠닌,

 시죠깅고 등 많은 사람들이 신도가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1192~1333) 중기인 겐쵸(建長1249~1256)·

고겐(康元1256~1257)·쇼카 (1257~1259) 무렵은

큰 화재, 폭풍우, 큰 지진과 돌림병 등이 유행하는 등 일찍이

없었던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비참한 재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가마쿠라 막부는 여러 종파에 명하여

재액(災厄)을 물리칠 기도를 하게 했지만, 재난은 전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쇼카 원년(1257) 8 23일 미증유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와 같은 재난이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밝히시기 위해 다음해 2월 스루가 지방 이와모토

(현재의 시즈오카현 후지시) 짓소지(實相寺) 경장(經藏)에 드시어

일체경을 열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때 근처의 시쥬쿠인에서

수행하던 13세의 호키공(닛코상인)이 대성인님의 고매한 인품과

존귀한 모습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어 시봉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분노(文應) 원년(1260) 대성인께서는 필생의 서

입정안국론을 완성하시어, 그 해 7 16일 야도야입도를 통해

 당시의 최고 권력자 호죠 도키요리에게 이를 주정(奏呈)하였습니다.

 

입정안국론

세상은 모두 정()을 배반하고 사람은 모두 악()

()하였도다. 고로 선신은 나라를 버리고 다 떠났으며,

성인은 거처를 물러나서 돌아오시지 않느니라. 이로써 마()가 오고

()가 와서, ()가 일어나고 난()이 일어나느니라

(어서 234)고 하시며, 사람들이 정법을 버리고 악법에 귀의하여,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고 악귀마신이 찾아들어 전대미문의

재난이 일어난다는 것을 설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을 없애려면, 당시 가장 유행하던 염불의

사의(邪義)를 끊고 법화일실(法華一實)의 정법에 귀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정안국론에서 설해 밝히셨습니다. 또 여래의

금언(金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방법(謗法)을 대치(對治)하지

않으면, 약사경, 인왕경 등에서 예언한 칠난(七難) 가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계반역난(내란)과 타국침핍난(타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난) 두 가지 난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국가의

주권자에게 예언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입정안국론을 제출하여 막부(무인정권)

()하여, 사법(邪法)에 귀의하는 잘못을 설해 밝히셨습니다.

이것이 대성인님 일기(一期) 화도 가운데 첫번째 국주간효

(國主諫曉)입니다.

 

마쓰바가야쓰 법난

기성 불교에 집착해 있던 막부 위정자들은 입정안국론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성인님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은밀히

음흉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1260 8 27일 밤 가마쿠라 막부 6대 집권자

최고 실권자 호죠 나가토기의 아버지, 호죠 시게토키

고쿠라쿠지입도의 뜻을 받아 염불자 등 방법 무리들이

마쓰바가야쓰에 있던 대성인님의 초암을 습격하였습니다만,

목숨을 위협하는 이 위기에서 대성인님께서는 불가사의하게도

상처 하나 입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벗어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 법난에 대해

밤중에 니치렌(日蓮)의 소암(小庵)에 수천인이 몰려와서

살해하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밤의 위해도 모면했노라.

(시모야마어소식 어서 1150)고 술회하셨습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는 한동안 시모사(지금의 치바현)의 도키죠닌

댁에 몸을 의탁하시면서 그 일대를 절복 교화하시어 오타 죠묘,

소야 교신 등을 입신하도록 교도하셨습니다.

 

이즈섬 유배

마쓰바가야쓰 법난을 당하신 다음 해(1261) 봄 대성인님께서는

가마쿠라로 돌아오시어 다시 홍교(弘敎)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막부 집권 호죠 나가토키는 이를 알고서 권력을 휘둘러 그 해

5 12일 대성인님을 붙잡아 단 한 번의 취조도 하지 않고

이즈 가와나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께서는 이즈 유배를 당하시는 동안을

거년(去年) 5 12일부터 금년 정월 16일에 이르기까지,

이백사십여일동안은 그 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로 법화경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까닭은 법화경때문에 이러한 처지가

되었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법화경을 읽고 행하는 것으로

되느니라. 인간으로 생을 받아 이만한 기쁨은 또 어떤 것이 있을 소냐 

(사은초 어서 266)라고 말씀하시듯이  법화경 신독(身讀)

여설수행(如說修行)의 때로 여기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닛코상인은 대성인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와

상수급사(常隨給仕), (항상 따르면서 시중을 드는 것)를 하는 한편

절복홍교에 힘써 아타미에서 진언종 승려 콘고인 교만을

개종시키는 등 이토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을 귀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대성인님께서는 사은초(四恩抄),

교기시국초(敎機時國抄) 현방법초(顯謗法抄)

많은 어서를 지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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