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고마쓰바라 법난
1263년 2월 호죠 도키요리의 사면을 받아 다시 가마쿠라 초암으로
돌아오신 대성인님께서는 다음 해(1264년) 가을 어머님 묘렌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12년 만에 급히
고향 아와로 향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 고향 집에 당도하셨을 때 어머님께서는 위독하시어
곧 임종하실 상태이셨지만니치렌(日蓮) 비모(悲母)를 기념하였더니,
현신(現身)에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사개년(四箇年)의 수명을
늘였느니라 (가연정업어서 어서 760)고 말씀하시듯이 대성인님의
기념으로 병세가 회복되어 수명을 4년간 연장하셨습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는 아와 지방에 머무르시면서 묘법홍통에
전념하셨습니다. 이 때 아마쓰의 영주로서 신심 돈독한 신도
구도 요시타카가 대성인님의 귀향 소식을 듣고 한 번 왕림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므로, 대성인님께서 11월 11일 십 수명의
일행을 데리고 구도 요시타카 저택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부터 대성인님을 염불의 적으로 생각하여 노리고 있던
지두(地頭) 도죠 가게노부가 이를 알고서, 대성인님 일행이 저녁때
고마쓰바라(지금의 치바현 카모가와시 광장 부근)에 접어들었을 때,
무기를 든 수백 명의 염불자를 거느리고 덤벼들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십일월 십일일 아와국 도죠의 마쓰바라라고 하는 대로(大路)에서,
신유시(申酉時), 수백인의 염불자들이 숨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니치렌은 오직 한 사람, 십인 정도, 소용 있는 자 불과 삼사인이니라.
쏘는 화살은 내리는 비와 같고, 내려치는 칼은 번개와 같도다.
제자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두 사람은 큰 상처
입었느니라. 자신도 베이고, 맞아서, 마지막인 듯 하였는데
난죠효에시치로전어서 어서 326)라고 말씀하시듯이,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제자 한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중상을 입고,
대성인님 당신께서도 오른쪽 이마에 중상을 입으시고 왼쪽 팔을
골절 당하시는, 목숨을 위협하는 대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법화경 권지품 제13에서 설하는
악세에 정법을 넓히는 사람에게 도장(刀杖)을 가하는 자가
있으리라 (법화경 375 취의)는 경문 그대로의 양상이었습니다.
몽고의 첩장(牒狀)과 11개소에 보낸 직간장(直諫狀)
1268년 1월 몽고 사신이 일본에 와서 복종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내용의 국서(國書)를 막부에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대성인님께서
이미 8년 전에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타국침핍난(타국이
침략해 오는 난)이 바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몽고에서 첩장(국서)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대성인님께서는
그 해 4월 5일 막부 요인(要人)이었던 호캄보에게
안국론어감유래를 적어 보내시고, 8월과 9월에는
야도야사에몬입도에게 서장(書狀)을 보내시어 재차 간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막부 측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님께서는 10월 11일 막부 최고 수뇌부인
호죠 도키무네· 헤이노 사에몬노죠 요리쓰나· 야도야입도·
호죠 야겐타 및 칠대사(七大寺)라 불리던 고쿠라쿠지(極樂寺)
료칸· 겐쵸지(建長寺) 도류· 대불전 별당· 쥬후쿠지(壽福寺)·
죠코묘지(淨光明寺)· 다호지(多寶寺)· 쵸라쿠지(長樂寺)
이상 11개소에 간장(諫狀-간효하는 서장)을 적어 보내시어
공장대결(公場對決)로 법의 정사를 가려 하루 빨리 정법에
귀의하도록 간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 이들 간효의 서장을
적어 보내신 참뜻은 제종(諸宗)을 멸여(蔑如-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겨 깔봄)함이 아니라 오직 이 나라의 안태(安泰)를
생각할 뿐이니라 (쵸라쿠지에의 어장 어서 380)고 말씀하시듯이,
몽고 내습이라는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 오직 나라의 안녕과
민중의 평안을 바라는 일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수뇌부는 대성인님의 간효장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뒤에서 대성인님을 욕하고 비웃었습니다.
기우(祈雨)
1271년 5월경부터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계속되자, 막부는 당시
사람들이 생불(生佛)로 우러러 받들던 고쿠라쿠지 료칸에게
기우제를 지내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대성인님께서는 이를 기회로 불법의
정사(正邪)를 만인에게 알리고자 하시어 료칸에게 『7일 안에
(비를) 내리게 하시면 니치렌이 염불무간이라고 하는 법문을
버리고 료칸상인의 제자가 되어 250계를 가지리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승(僧)은 지계(持戒)인 듯하지만
대광혹(大誑惑-크게 남을 속여 홀리는 것)인 것이 분명하니라.
또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오로지 법화경을 믿으시라』
(요리모토진장 어서 1131)고 기우제에 즈음하여
약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수락한 료칸은 많은 제자들과 함께 온 정성을 다하여
기우제를 지냈으나 약속한 7일은 커녕 7일을 더 달라고 하여
그 기간이 다 지났는데도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가뭄이 극심해지고 게다가 폭풍마저 휘몰아쳐 사람들을
더욱 괴로운 지경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료칸의
기우는 참패로 끝났습니다.
제2국가간효 (第二國諫)
기우제에 패한 료칸은 맺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여러 종파 승려들과
모의를 하여 대성인님에 대한 갖가지 악구참언(惡口讒言)을 막부
요인에게 해댔습니다.
그리하여 대성인님께서는 1271년 9월 10일 효죠쇼(評定所)에
소환되어 헤이노 사에몬노죠 요리쓰나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성인님께서는 부처님의 사자(使者)인 니치렌을 박해하면
반드시 불천(佛天)의 벌을 받아 자계반역· 타국침핍 이난(二難)이
일어나리라 (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57, 취의)고 엄하게 간효하시고,
이어서 그 다음 다음 날인 9월 12일 역시 헤이노 사에몬노죠에게
대저 귀하는 지금 천하의 기둥인데 어찌 나라 안의 훌륭한
인재를 손상하려 하느뇨. 속히 현명한 생각을 짜내어 모름지기
이적(異敵)을 물리쳐야 하십니다 (일작일어서 어서 477)라는
서장을 보내시어 재차 반성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님의 이와 같은 간효에 대해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더욱 더 증오심을 일으켜 그날로 무장한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쓰바가야쓰 초암을 쳐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승려를 붙잡으려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마어마했고,
병사들은 경권(經券)을 짓밟는 등 포악하기 짝이 없었고, 특히
헤이노 사에몬노죠의 부하 쇼우보가 대성인님께서 품고 계시던
법화경 제5권을 빼앗아 그 경권으로 불경스럽게도 대성인님의
머리를 세 번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 법화경 제5권에는 말법
시대에 법화경을 홍통하면 도장의 난 등을 당한다고 설한 권지품이
들어 있었는데, 이 점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훗날 쇼우보를
경문부합(經文符合)의 은인이라 하셨습니다.
헤이노 사에몬노죠 등의 폭거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성인님께서는
큰소리로 가소롭구나 헤이노 사에몬노죠가 발악하는 것을 보라,
당신들은, 지금 일본국의 기둥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소.
(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58)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제2국가간효입니다. 난폭하기 짝이 없이 마구 난동을 부리던
헤이노 사에몬노죠와 그 부하들도 대성인님의 기백에 압도되어
일순간 얼어 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日蓮 대성인의 생애와 약년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지건립.입종선언 (4) | 2024.07.25 |
---|---|
가마쿠라.입정안국론.이즈유배 (3) | 2024.07.25 |
아쓰하라 법난.대어본존 도현 (3) | 2024.07.25 |
대성인님의 일생 8..부촉 .입멸 (2) | 2024.07.25 |
니치렌 대성인 다음의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내용 (2)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