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불법즉사회 의의를 생각한다
실천교학 -불법즉사회 의의를 생각한다
열려진 마음이 이해와 공감을 낳는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사회를 분단하고 연대라든가 공화라는 정신이
급속하게 상실해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호간의 신뢰가 아닐까 생각한다.
불교는 본래 적극적으로 타인이나 지역, 사회와 서로 관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21세기 개막 청년의 해인 올해, 우리들이 믿고 행하는 불법(佛法)과
사회의 관련에 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참된 인간의 삶의 방법을 추구한 석존
불교는 본래 인간과 현실사회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종교다. 불교를 죽음(死)이나
죽은 후(死後)에 대한 단순한 일시적인 위로나 마음의 준비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 현실과 동떨어진 정신주의라고 하는 것도 불교 본래의 정신을
얕보고 멸시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석존이 설하고자 한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육박하면서 이 현실세계에서
살고 있는 하나 하나의 인간이 어떻게 하면 물심양면으로 절대적인 행복을
획득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점이었다. 즉 불교의 주안(主眼)은 진실한 인생
진실한 인간을 추구(追究)하는 것이었다.
그 법을 추구하고 대오(大悟)한 석존은 카스트제도와 싸웠다. 고정화된
신분제도에 묶여 고뇌에 허덕이는 민중을 해방시키고 전 민중이 평등하게
행복을 쌓아 가는 원리를 설해 갔던 것이다.
광대한 인도의 대지를 생애 내내 걷고 또 걸었다. 이 한가지 일만 보더라도
불교가 현실과 유리된 정신주의라고 할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회로 열려진 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개가의 변혁이 사회의 변혁도 가능케
니치렌(日蓮)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불교 본래의 정신이 더한층 명확하게 되어있다.
현재에도 종교는 하나 하나의 혼을 구제하는 것, 정신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고
현세 이익을 설하는 종교는 저속한 것이다 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나 사상, 철학이 직접 하나 하나의 인생이나 사회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사에서 분명하게 보는 바가 아닌가. 예를 들면 12세기 일본에서는
아미타신앙이 퍼지면서 자살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또 4세기 북아프리카의 어느 파의 기독교도는 순교에 의해 신의 은혜가 얻어진다고
믿고 일부러 이교도에게 자기의 목숨을 끊도록 했던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으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개개의 인간변혁에 의해 현실사회를
변혁하는 원리를 설하셨다. 적극적으로 정법을 믿고 행함으로써 개인이
행복하게 되고 사회, 국가도 크게 변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던 것이다.
보살의 정신과 행동에 구극의 인간상이
불교가 그 출발부터 적극적으로 사회와 연관되어 왔던 것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타인과 연관되고, 공동체에 소속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약 반년간에 걸쳐 남극의 빙원에서
오직 혼자 지낸 어느 탐험가의 보고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빙원뿐인 속에서 그는 최초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고요함과 온 하늘에 빛나는 별들에 마음을 빼앗겨 고독하게 있다는 것을 즐기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0일을 넘길 때쯤부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초조감
같은 것을 느끼며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고독하다는 것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60일을 넘길 때쯤부터는
인간은 결코 고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신조로 삼게 됐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련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진력하는 이타의 정신과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진실한
인간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타(利他)의 근본은 자비다. 이곳에 바로
불교 본래의 철리가 있는 것이다. 이 자비의 정신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상징하고 체현하는 것이 보살인 것이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마하지관)이나 보살의 사홍서원의 중생무변서원도에
나타난 것처럼 자기 성불의 추구와 동시에 타인도 성불로 인도하는 것을
서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존귀한 삶의 방법이며,
인간으로서 목표로 삼아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의 성장, 완성과 동시에 타인도 구제하고 함께 성불의 경애를 구축한다 -
바로 창가학회의 실천이야말로 보살의 삶의 방식,
참된 인간의 행동에 합치되는 것이다.
광포는 내 손으로라는 깊은 결의와 기원
불교는 인간상호의 신뢰를 쌓는 사상
대성인은 <개목초(開目抄)>에서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안목(眼目)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대선(大船)이 되겠노라
(어서 232쪽)고 말씀하셨다. 나는 일본이라는 넓이 위에 주체자로서 나가
있다는 것에 감동을 느낀다.
자신이 주체자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와 연관하고 일체중생을 행복으로
인도하자 라는 혼의 외침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그 활동을 전개하는 곳은
내 몸이 있는 내 몸 근처의 우리 지역이다. 대성인은 지역의 광선유포에
매진하는 문하에게 여러 가지로 격려하시고 계신다.
그 지방의 불법은 귀하에게 맡기겠소(어서 1467쪽) 사관(仕官)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의 치생산업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어서 1295쪽)
강성한 대신력을 내어서 법화종의 시조깅고(四條金吾) 시조깅고라고,
가마쿠라 중의 상하만인 내지 일본국의 일체중생의 입으로 칭송받으시라
(어서 1118쪽) 문하의 사람들에게 지역 사회의 정법의 명사로서 향기를 내어라.
지역광포의 용자(勇者)이어라 라는 말씀으로 배찰 된다.
종종보장엄과 지역에 희망의 빛을
우리들이 조석으로 부르는 법화경 수량품에는 아차토안온(我此土安穩)
(법화경 508쪽)이라는 일절(一節)이 있다. 나의 이 땅은 안온하고- 나의 지역을,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수호하며 발전, 번영시켜 가자 라는 기원이야말로
지역 공헌의 근본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이상, 타인의 불행을
돌아보지 않는 자기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자신이나 가족, 지역, 사회에 희망과 행복의 빛을 보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내 지역을 종종보장엄(種種寶莊嚴)
(법화경 508쪽)하게 하고 희망의 낙토(樂土)로 변혁시키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생명의 진실을 설(說)해 낸 위대한 법을 믿고 있는 한사람으로서,
구체적인 말로서, 또 행동이라는 무언(無言)의 말로서 신뢰의 틀을
더욱 확대해 가고 싶다.
그리고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 (법화경 510쪽)대로 열심히, 지역에 사회에
인간주의의 빛을 끊임없이 보내는 인간주의의 철학으로 인간과
인간의 신뢰를 구축해 가고 싶다.
728x90
반응형
LIST
'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부의 책임 (0) | 2024.07.20 |
---|---|
이케다 선생님 스피치 (0) | 2024.07.03 |
보탑이 의미하는 것 (1) | 2024.07.03 |
妙法은 대중 속에서 사자후한다 (0) | 2024.07.03 |
용기 있는 대화 (0) | 202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