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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座란 妙法 실천자의 座
妙法은 대중 속에서 사자후한다
법화경을 수지한 자는 사자의 좌에
사자왕의 자식(子)은 사자(師子). 그래서 우리들은 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승리의 힘으로 바꾼다!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불법(佛法)에서 사자(獅子)=사자(師子)라는 말에는
참으로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실제의 사자의 습성도 고려하면서 불법과 사자'에 대해서 그 일단을
약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법화경'은 經의 왕
사자(獅子)라고 하면 역시 아프리카의 초원을 달리는 이미지가 강하다.
도대체 석존이 불교를 설한 인도에는 사자가 있었는가? 아프리카 이외에도
현재 인도 북서부의 카차왈반도에 인도사자가 2백마리밖에 없으나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1세기 전후에는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발칸반도, 소아시아,
아라비아반도에서 인도 전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아소카대왕이 세운 사자주두(獅子柱頭) 등 고대의 각종 조각의 사자들이 매우
실질적인 것을 보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권과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자는 힘'과 지혜'의 상징이었다.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의 신체부분이 사자의 모습인 것은 유명하다.
사자춤' 등은 중국에서 서역(西域)의 맹수로서 형상만이 전래된 것이다.
격언에서는 스파르타교육에 통하는 사자는 자식을 산골짜기에 떨어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그 외에도 사자에 타는 것과 같은 모험적 행위를 가리키는 사자의 말' 등
사자와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사자 신중의 충
사자신중(獅子身中)의 충(蟲)'이라는 격언은 집안(내부)의 배신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불법에서 설하는 본래의 뜻은 말할 것도 없이 더욱 깊다.
불전(佛典)에서는 최고로 존귀한 부처' 법화경'을 백수의 왕 사자(獅子)로 비유,
사자(師子)'라고도 표기한다.
그 신중(身中)의 충(蟲)'이라는 것은 올바른 불법의 내면에서 법을 파괴하는
나쁜 인간'이 나타나는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사도어서>에는 불제자(佛弟子)등이 반드시 불법(佛法)을 파(破)하느니라.
사자신중(師子身中)의 충(蟲)이 사자(師子)를 먹는다 등운운(等云云)
(어서 957쪽)이라고.
이 충의 전형이 시애틀사건으로 이름을 떨친 닛켄(日顯)이다. 그가 매달려 있는
예좌(猊座)의 좌(座)는 사자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자는 부처의 상징이므로 본래 예좌는 사자좌 즉
부처의 좌를 뜻한다. 그 좌에서 불자(佛子)를 탄압하고 사의(邪義) 기의(己義)를 꾸며
본불에게 반역하는 가짜 법주는 사자(師子)의 육(肉)에서 나온 황충의 비구(比丘)이니라
(어서286쪽)와 똑같다. 사자의 자리에 벌레가 앉다니!라고 놀랄 일이다.
사자의 기사도와 평등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자는 자비심이 있어 여자나 어린이는 습격하지 않는
고결한 맹수로 생각됐다. 로마시대의 기사도 이야기에는 사자의 기상높은
신사다움을 그린 장면이 많다.
유럽의 왕가(王家)가 도시의 문장(紋章)에 때때로 사자의 모티브가 채용되고 있다.
고경에 빠졌을 때 구해준 기사에게 사냥감을 잡아서 보내는 사자도 등장한다.
신의가 두텁고 은혜에 예(禮)를 다하는 인격을 사자의 웅자에 투영했을 것이다.
초원에서 사냥을 하는 사자는 자기들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사냥만 한다.
육식하는 짐승 중에서 특히 필요 이상의 먹이를 탐내지 않는 습성이 강하다.
또 일반적으로 동물의 집단에서는 먹이를 먹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자는 순서를 만들지 않는다. 참으로 평등하다.
사자후로 사방의 벗을 부른다
사자의 포효에 대해서는 동물학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인상적이고
가슴 깊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울림이라고. 신비한 미성(美聲)은
사방 8㎞까지 울렸다는 관찰기록도 있다.
불전에서는 부처가 정법을 설해 넓히는 것을 사자후'에 비유한다.
어서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어서 1124쪽)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가 창제하는 제목의 음성은 대우주에 울리고 생명의
개가를 위한 리듬을 연주하는 것이다.
또 불전에는 여래(如來)는 대중 속에 있으면서 용한(勇悍)하게 사자후한다 라고 있다.
부처가 민중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위해 용감하게 법을 설하는
모습을 사자후라고 한다. 법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을 위해 사자'와 같이 싸우자!
이케다(池田) SGI회장의 호소에 전국의 동지는 니치렌 대성인에게 직결한 사자왕'의
마음으로 승리를 향해 일어섰다.
실제로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사자도 벗 부르기'라고 해서 한 마리가 힘차게
포효할 때 다른 사자도 이에 따라 포효하여 대지를 뒤흔드는 대 합창이 된다.
항상 전력으로 싸운다!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는 남묘호렌게쿄의 사자후에 의해서 무수한 지용의
벗이 본래의 사명에 눈뜨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일체의 방법을 타파하는 것이다.
또한 신심의 환희와 약동으로 벗에게 말하고 회우에게 벗에게 공감을 넓히는
학회활동이야말로 사자후'의 실천이다.
어서에 사자왕은 전삼후일(前三後一)이라 하여 개미새끼를 잡으려 할 때나
또한 사나운 것을 잡으려 할 때나 힘을 내기는 매양 한 가지이니라(어서 1124쪽)라고
말씀하시듯이 사자는 어떤 경우라도 방심하지 않는 자세로 적에게 향한다.
대성인은 니치렌이 수호(守護)의 어본존(御本尊)을 쓰는데 있어서도
사자왕에 못지 않노라. 경(經)에 가로되 사자분신지력(師子奮迅之力)'이란
이것이니라(어서 1124쪽)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사자가 항상 싸움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부처의 자비를 만인에게 전혼을
다해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상대가 자기보다 강하면 무서워 도망간다. 약하면 내려다보고 득의 만만해서
덤벼든다. 그 때 두려움 겁'은 만심'과 표리이고 만심'은 항상 방심'을 내포하고 있다.
반대로 사자왕'은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력으로 싸우므로 언제나
향상을 위한 의욕에 차있다. 그 마음에는 방심이 자리할 틈이 없다.
사자'와 다른 축생'의 대비는 새로운 전진과 성장을 향해 활기 넘치는
학회동지의 스크럼과 부패타락의 길로 한없이 떨어진 닛켄종(日顯宗)의
모습의 명암(明暗)에 그대로 통한다. 그리고 그 근본은
정법(正法)을 아끼는 마음'의 유무(有無) 즉 깊은 신심의 유무에 의하는 것이다.
사자는 '사제'에 통한다
제66세 닛다쓰(日達)상인은 더구나 후의 오백세(五百世)에 만약 사람이 있어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자를 보면 응당 천인대중(天人大衆) 속의
사자의 법좌(法座)의 위에 앉아야 하느니라 라는 경문을 인용해서 이 말법의
시대에 이 정법을 수지하고 홍통하는 자는 대성인의 금언(金言)에 따라서
모두 부처로서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전력으로 광포의 길을 개척하는 묘법의 실천자만이 사자의 좌(座)' 즉
예좌(猊座)'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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