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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용 맹 정 진 의 실 천

by 행복철학자 2024.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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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맹  정  진  의     실  천

 

용기있는 신심이야말로 불도수행의 요체 

각 신문의 신년호 사설 등에는 여러 가지의 주장을 거론하고 있는데,

어떤 신문에서는 인간주의를 자유주의 국제주의와 함께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치렌대성인의 불법(佛法)은 원래가 인간주의의 법이었으며,

그 길을 지향(志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가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대성인의 불법이 세계 1백 28개국, 지역에 넓혀지고, 민중불법의 여명을

알리는 동지들의 기쁨이 전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대성인의 불의불칙(佛意佛勅)을 받는 SGI의 평화세력으로서의

존재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빛이 되고 있다.

일찍이 해외의 저널리스트가 이케다SGI회장에게 학회 대발전의 이유를

질문해 왔을 때, SGI회장은 그 자리에서 그것은 목숨을 걸고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또 누구보다 진지하게,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행동했기에 승리한 것이다.

이런 것 없이 아무리 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법의 힘은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지도하신 바 있다. 또 제일 중요한 것은 용기이다.

니치렌대성인은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하니라(어서 1193쪽)고 말씀하셨듯이

겁쟁이 신심으로는 진실한 공덕은 나오지 않는다. 용기를 이기는 것은 없다.

 이 일년 용기있는 신심으로 싸워갑시다.

이깁시다라고 격려하시고 있는 것이다.목숨을 걸고 진지함 성실 용기 등의

말은 불법용어로 바꿔 말한다면 용맹정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용맹정진이란 마음이 용맹과감해서 고난에 이기고, 힘을 다해

불도수행에 면려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끊임없이 마(魔)에 맞서는 강함과 강성한 기원이 간요

니치렌대성인의 어서에는 이 경은 수지하기 어렵다. 만약 잠시라도

수지하는 자는 내가 즉 환희하고 즉 제불도 역시 그러하니 이는

즉 용맹이고(중략), 이는 즉 정진이며(어서 42쪽)라고 법화경

보탑품(寶塔品)의 문(文)에 인용돼 있다.

즉 석존의 멸후, 온갖 곤란을 극복하고 묘법을 스스로 수지하며

사람들에게도 넓혀가는 사람을 삼세의 제불은 칭찬하면서

수호(守護)해 가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용맹의 사람, 정진의 사람이라고 설해져 있다.

이 법화경 보탑품의 부분에 대해서 니치칸상인은 〈의의판문초(依義判文抄)〉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맹은 이는 신심이니라. 고로 석에 말하기를

용감히 하는 것을 용(勇)이라 하고, 지(智)를 다함을 맹(猛)이라고 말함 운운.

고로 용감하게 신심을 다함을 용맹이라고 이름하느니라라고.

니치칸상인은 이 보탑품의 글 가운데서 용맹정진을 삼대비법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중의 본문의 제목에 해당된다고 하시고,

그 본문의 제목에 신심(信)과 창제(行)의 이의(二意)가 있으니 용맹은

 신심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계속해서 석(釋)을 인용해서

용감하게 함을 용이라 하고, 지(智)의 한도까지 다함을 맹이라 함이라고.

즉 본문의 제목은 본문의 본존을 믿고, 성불을 목표로 해서 가는

수행이기 때문에 용기를 분기(奮起)시켜, 곤란에 도전(挑戰)하고,

지혜를 굴려서 그 곤란을 극복해 가는 단호한 신심의 자세, 즉 용맹일 것이며

성불에의 바른 신심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고 배찰(拜察)된다.

다음으로 정진이란, 창제의 행을 의미한다고 적혀 있다. 〈의의판문초(依義判文抄)〉

에 정진은 즉 창제의 행이니라. 고로 석에 말하기를 무잡인 고로 정(精),

무간인 고로 진(進)이라 운운 정진이란 창제의 실천임. 무잡-다른

잡행(雜行)을 섞지 않은 것을 정(精)이라 하고, 무간-끊임없이 실천해

가는 것을 진(進)이라 함이라고.

여기서는 어본존 근본으로, 여사(余事)를 섞지 않고, 게으름없이

제목을 봉창해가는 창제의 수행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어서에 월월 일일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생도 광포도

끊임없는 부처와 마와의 투쟁이다. 물러섬 없이 기심의 마와 대결하고,

부단한 창제의 실천이 있어서 비로소 성불의 경애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의 적을 남기지 말라의 실현에 환희하며 전진을

자행화타에 걸치는 실천, 광선유포를 지향하는 말법의 불도수행에서는

마(魔)는 삼류의 강적, 그 중에서도 권력과 결탁한 참성증상만

(僭聖增上慢)으로 돼 나타나서, 그것과의 대결에서도 바로 용맹한 정진이 불가결이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왕(惡王)이 정법을 파하는데,

사법(邪法)의 승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智者)를 살해하려 할 때는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가진자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어서 957쪽)

또 각기 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겁내지 말지어다

어서 910쪽) 결코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하니라(어서 1193쪽) 니치렌의

제자들은 겁장이로서는 할 수 없느니라(어서 1282쪽)고 말씀하셨다.

니치렌대성인은 어서의 도처(到處)에서 대성인 문하는 조금도

겁장이어서는 안 된다. 용기있는 신심이야말로 행복과 승리의 요체라고 말씀하셨다.

광포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마에게 맞서는 열렬한 기백, 현실과 정면으로

대치(對峙)하며 승리의 결과를 맺자는 강한 일념- 그 용기의 마음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깊은 지혜도 솟고, 자애(慈愛)도 생겨 일체의

행복과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다. 그 강인한 자기완성이야말로

불법자가 목표로 하는 구극(究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광포의 미증유의 신전(伸展)은 역대(歷代) 회장의 사제의 도(道)에

일관된 장절(壯絶)이라고도 할 용맹정진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맹정진이야말로 학회정신의 정수(精髓)요, 또 인간으로서의 지고

(至高)한 삶의 도리라고 해도 좋겠다. 이제 SGI의 왕성한 전진에

질투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닛켄종(日顯宗)의 마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바로 불적(佛敵),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의 출현이다. 닛켄과 결코

21세기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각오의 투쟁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복운을 쌓을 기회로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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