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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신앙과 실천

법화절복 파권문리

by 행복철학자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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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지혜>에서 배운다 -

 

법화절복 파권문리  

 

 

실천교학

<법화경의 지혜>에서 배운다 -법화절복 파권문리

광포(廣布)야말로 무상(無上)의 인생궤도.
파절의 경전

법화경(法華經)이란 어떠한 경전(經典)인가. 천태대사(天台大師)는 법화절복(法華折伏)

파권문리(破權門理) (법화는 절복이고 권문의 이(理)를 파(破)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즉 법화경은 권문(權門)<진실의 법문(法門)>인 법화경에 이르기까지의 가(假)의

 법문(法門)의 이(理)를 타파(打破)해 가는 파절(破折)의 경전(經典)이라고 했다.

니치렌(日蓮)대성인은 법화절복 파권문리라는 것을 알기 쉽도록 비유해 말씀하셨다.

다만 질남비 천(千)에다 망치 하나와 같으니라.(어서 1556쪽) - 천(千)개의 점토로

구워만든 남비 즉 질남비를 오직 한개의 쇠망치로 파쇄(破碎)해

버릴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여기서 천(千)의 질남비는 권문(權門), 하나의 망치는 법화경이다.

십(拾)이나 백(百)이라는 것이 아니다. 천(千)의 사의(邪義)도 하나의

정의로 파쇄해 버린다는 것이다.

대성인의 열렬(烈烈)한 투지가 울려오는 말이 아니가.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이 어문(御文)을 배(拜)하고, 사의(邪義)에 대하는 파절의 정신이 없어지면

이미 법화경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에는 권문(權門)을 마구 부셔서 권교(權敎)

권문(權門)의 무리를 한사람도 남김없이 절복하여(어서 502쪽)라고도 말씀하셨다.

권문을 감연(敢然)히 타파(打破)해 간다. - 이같이 싸우는 마음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대성인은 법의 정사(正邪)로
사교(邪敎)를 단호하게 파절

권문(權門)이란 - 대성인은 구체적으로 염불(念佛), 진언(眞言), 선(禪),

율(律)이라고 하는 당시의 제종교를 그것으로 지시(指示)하셨던 것이다.

법화경을 버려라. 덮어라. 내버려라. 팽개쳐버려라라고 비방한 정토종(淨土宗)의

호넨(法然). 법화경은 화엄경보다도 열등하며 대일경에는 삼중(三重)으로 열등하다고

한 진언종(眞言宗)의 구우카이(空海)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의 제종(諸宗)의 거의가 종교로서의 실체(實體)를 상실해버린

오늘의 일본에서 권문을 파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서 대성인은 법화경을 버려라고 했던 호넨(法然)의

주장에 대해서 일체중생의 마음을 가볍게 보았다(어서 25쪽)고 지적하시고 있다. -

마음(心)이란 생명(生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가벼이하고 있다는 지적이시다.

법화경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생명관을 설한 유일한 경전이다.

일념삼천이란 지금 아무리 대단한 고경(苦境),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더라도

 묘법을 믿으면 반드시 최고로 행복한 인생의 궤도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법문(法門)이다.

대성인은 일념삼천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니라(어서 773쪽)고 말씀하셨다.(

발고여락이란 괴로움을 뽑아버리고 즐거움을 준다는 뜻)

법화경의 부정(否定)은 일념삼천의 부정(否定)이다. 생명의 가능성을

부정(否定)하고 행복하게 되는 길을 막아버리고 마는 일이다.

대성인은 종파싸움 따위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법의 정사(正邪)의

차원으로부터 생명존엄(生命尊嚴)의 시점(視點)으로부터 민중을

미혹(迷惑)케 하는 사악을 단호하게 파절하셨던 것이다.

제멋대로 말을 해서 부처의 설과는 전혀 틀리게 되었다하자. 이 이상의

거짓말, 욕설은 없다. 그 잘못은 달리 비할 것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책하고도 남음이 있다.(어서 25쪽 취의)

국가악과 끝까지 싸운 역대회장

그 의미로 권문이란 생명을 경시하는 온갖 종교, 사상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다. <법화경의 지혜>의 연재에서는 국가주의도 하나의

종교라는 것을 배웠다.

국가주의(國家主義)라고 하는 종교 밑에서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국

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단으로 되는 것이고 도구(道具)로 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이 국가의 에고에 밟혀 뭉개져 버리는 종교이다. (98년 6월호)

마키구치(牧口) 초대 회장, 도다(戶田) 제2대 회장, 그리고 이케다(池田)

제3대 회장의 국가악(國家惡)과의 싸움 그것은 법화절복, 파권문리의

정신의 투쟁 그것인 것이다.

사제불이는 싸우는 정신에 약여(躍如)

또 법화경은 사제불이의 경전이다. 스승은 제자를 자기와 꼭 같은

경애(境涯)로 까지 높이려고 싸운다. 제자는 스승과 꼭 같은 경애, 같은

책임감으로 법화경 유포(流布)로 일어서 나아간다.

이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가 부처(佛)라고 하는 같은 하나의 경지로 되는 것을

사제불이라고 말한다. 불이(不二)란 둘(二)이면서 둘이지 않고, 그 본성은

일체(一體)이다라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로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되는데 그리되면 노력(勞力)도 수행(修行)도 없는 죽은 일체(一體)로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불이(不二)란 싸움이다. 둘(二)이라는 차별을 넘어서 진실의 하나(一)에로

 한없이 닦아가는 도전이다.
사제불이의 경전은 스승과 제자의 싸우는 경전인 것이다.

진리를 배우고 도전의 나날을
투쟁의 회피는 생명의 후퇴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인생(人生), 싸움이 있는 데서 팽팽히 당기는

맛이 나는 것이다. 진보도 있다. 기쁨과 충실도 있다. 이기면 즐겁다.

영원(永遠)의 역사도 남는다. 영원의 복덕(福德)도 쌓을 수가 있다.

싸움이 없어지면 타락해 버린다. 타락은 불행이다(99. 5.14)라고 지도하셨다.

또 인생도 사회도 문명도 우주도 모두 싸움인 것을 몇 번이고 가르쳐주고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도 일설(一說)에는 외적(外的)인 바이러스(virus)의 침입을

받아 싸우고 그것을 세포안으로 거둬들이는 것에 의해 새로운 힘을 획득해온 것이라고 한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싸운다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싸움을 회피하는 것은

생명의 정체인 것이 아니고 후퇴라는 것이다.

법화경 약왕품(藥王品)의 유명한 일절(一節) - 나의 멸도(滅度)후, 후(後)의

오백세(五百歲)중에 염부제(閻浮提)에 광선유포해서 단절(斷絶)해서

악마(惡魔), 마민(魔民), 제천(諸天), 용(龍), 야차(夜叉), 구반다(鳩槃茶)등에

그 소식을 얻게 하는 일없게 하라.(법화경 605쪽) 광선유포라고 하는

마(魔)와의 싸움이 있기에 우리들은 진보와 충실과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광선유포의 세계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광선유포의 지도자에 마음을 합해서 간다. 거기야말로 가장 생명의 본질에

합당한 무상도(無上道)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법화경의 지혜>의 연재 제1회에서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말했다.

21세기로 법화경을 이야기한다라는 장대한 도전의 여행을 독자들과 함께 시

작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이 부처(佛)이다라고 하는 진리에의 여행이다.

인생이란 자기 자신에로의 영원한 여행인 것이다라고. 영예있는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스승과 함께 어디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진리에로의 여행을,

도전의 여행을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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