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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생명의 기저부를 ‘불계’로
이 절에서는 십계호구의 법리를 바탕으로
생명의 기저부라는 사고방식을 밝힙니다.
생명에는 저마다 과거의 행위가 쌓여 만들어진
기저부가 되는 경애가 있습니다.
‘성불’은 이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하는
일입니다.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할 수 있어도
현실에서 구계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어떠한 고뇌가 닥쳐도 생명 근저에서
불계의 자비와 희망 그리고 환희가
넘쳐 나게 됩니다.
니치렌대성인이 <관심본존초>에서
법화경의 “내가 본래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여
성취(成就)한 바의 수명(壽命)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 등의 글월을
인용하며 “불계소구(佛界所具)의 구계이니라
.”(어서 240쪽)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의
실천적인 모습은 불계를 기저부로
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십계호구의 당체라는 관점에서
생명의 ‘기저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같은 인간이라도 지옥계를 기조(基調)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살계를
기조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저부’는 말하자면 생명의 ‘버릇’입니다.
지금까지 쌓은 업인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 나름의 ‘버릇’이 있습니다.
용수철이 늘어났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듯 자신의 기저부로 되돌아갑니다.
기저부가 지옥계라도 24시간 계속 지옥계는
아닙니다. 인계가 되기도 하고 수라계가
되기도 합니다. 수라계인 ‘승타(勝他)의
염(念)’이 기저부인 사람이라도 때로는
보살계나 천계가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기저부가 수라계인 사람은
일시적으로 보살계를 나타내더라도 다시 곧장
수라계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이 기저부를
바꾸는 일이 인간혁명이자 경애혁명입니다.
그 사람의 ‘오저(奧底)의 일념’을 바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생명의 기저부가
어디에 있는가로 결정됩니다. 비유하면
기저부가 아귀계인 사람은 아귀계라는
배에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귀의 궤도를 나아가면서 그 배 위에서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괴로워합니다.
여러 변화가 있지만 배는 엄연히 아귀계의
궤도를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풍경도 아귀계의 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죽은 뒤에도 우주의 아귀계 쪽으로
합치하고 말 것입니다.
이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하는 것이 성불입니다.
물론 기저부가 불계가 되어도 구계가
있기 때문에 고뇌나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근저가 ‘희망’이 됩니다.
‘안심’과 ‘환희’의 리듬이 됩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병에 걸려도 ‘이 정도쯤, 괜찮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낫는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경애가 바로
불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불계 속에
또 구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화가 나거나
곤란해 하기도 합니다. 안심하기에
화를 내지 않겠다거나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가 아니라 역시 걱정되는
일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저에서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입니다.”
“살아 있는 자체가 더없이 즐거운 것이
부처가 아닐까요. 이것이 대성인의 경애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수(斬首)한다는
데도 태연하셨습니다. 우리라면 정말
당황했을 것입니다. 혹한의 사도로
유배되서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개목초>와 <관심본존초>를 쓰셨을 정도니
말입니다. 안심하지 못하면 그러한
대단한 논문은 쓸 수 없습니다.”
근행창제는 부처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근행창제라는 불계를
용현시키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
우리 생명의 불계가 흔들리지 않는
대지처럼 단단히 다져집니다.
그 대지 위에서 매 순간 구계의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연기합니다. 또 사회의
기저를 불계로 바꾸는 일이 광선유포의
싸움입니다. 그 근본은 ‘동지를 늘리는’ 일입니다.
어쨌든 이 신심을 근저로 하면
무엇 하나 헛됨이 없습니다.
기저가 불계인 인생은 과거와 현재에
겪은 구계의 생활을 모두 살리면서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구계의 노고가 불계를 강하게 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번뇌즉보리로 괴로움(번뇌=구계)이 모두
행복(보리=불계)의 장작이 됩니다. 몸이 섭취한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흡수해 에너지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속 구계의 고뇌와 무관한 부처는
참된 부처가 아닙니다. 십계호구의
부처가 아닙니다.
그것이 법화경 수량품(壽量品)의 마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계는 ‘일부러 지옥의
괴로움을 떠안는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계소구의 지옥계, 그것은 동고(同苦)이며
일부러 떠안는 고뇌이자 책임감과
자비의 발로(發露)입니다.
‘홍교를 위해, 동지를 위해 굳이 고뇌한다.’
그 고뇌가 불계를 강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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