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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2-5 흉중의 어본존을 열다

by 행복철학자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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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흉중의 어본존을 열다

 

우리는 어본존이 자신을 초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절에서는 ‘흉중의 어본존’이라는

어본존의 심의(深義)를 밝힙니다.

무량한 생명력도 무한한 지혜도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신심으로

그것을 자유자재로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도 ‘본존’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니치렌대성인불법에서

‘본존’의 본의(本義)는 어디에 있는가.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흉중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어서 1244쪽) 즉 “이 어본존을 절대 다른

곳에서 구하면 안 된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흉중의

육단에 계신다.”라고.

도다 선생님은 이 글월을 배독하며

이렇게 강의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어본존이 정면에 있다고 생각하고

기원하지만 실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저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믿는 우리의

생명속에 살고 계십니다. 이는 고마운 말씀입니다.

 

이 신심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성이 희미하게

보이고 조금도 수행하지 않는

이즉(理卽) 범부입니다.

우리는 어본존에게 기원하기 때문에

명자즉(名字卽)의 위()입니다.

명자즉의 위가 되면

이미 이 속에 어본존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다만 밝기는 신심의 후박에 따라 다릅니다.

 

전구와 같습니다. 큰 전구는 밝고,

작은 전구는 밝기가 약합니다.

또 이 전구를 예로 들면, 신심하지 않는

사람은 전구에 선이 연결되지 않은 것과 같고

우리는 신심을 하기 때문에 대어본존이라는

전등이 켜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신심이 강하냐 악하냐입니다. 신심이 강하면

자신이 공덕취(功德聚, 공덕의 모임)가 됩니다.

 

대성인은 어본존을 ‘공덕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어본존도 다만 신심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어서 1244쪽) 즉

“이 어본존도 다만 신심의 두 글자에 들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심이 강성한 사람은 절대로 막힘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모든 것을

공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기나긴 인생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괴로움과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모두 자신의 경애를

여는 양식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자에게 근저는 일체가

공덕이고 행복입니다. 신심이 강한 사람에게

‘불행’이라는 두 글자는 없습니다.

니치칸(日寬)상인(1665년~1726년)은

《관심본존초 문단》의 끝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어본존을 신수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내 몸이 즉 일념삼천의 본존,

연조성인(蓮祖聖人)이니라. ‘유치(幼稚)한

자의 목에 걸게 하시느니라.’의 뜻은 틀림없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불력, 법력을

우러러 마땅히 신력, 행력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겁(万劫)을 후회하는

일 없을 지어다.”(니치칸상인 문단집, 548쪽)

즉 “우리가 이 본존을 신수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내 몸이 그대로 일념삼천의

본존이고 연조성인(니치렌대성인)이다.

‘(불법에 무지한 말법의) 유치한 자의 목에

걸게 하시도다.’라고 (관심본존초의) 글월의

원의(元意)는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불력과 법력을 우러르고

신력과 행력에 힘써야 한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영원히 후회를 남기면 안 된다.

 

어본존을 향한 ‘신심’으로 자신의 몸이 바로

‘본존’으로 나타나고, ‘연조성인

(니치렌대성인)’으로 나타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그렇게 되기 위해 어

본존을 도현하셨습니다. 여기에 대성인불법의

극리(極理)가 있습니다.

신심으로 자기 흉중의 어본존을 엽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부처의 생명을 열어 빛냅니다.

 

본디 무량한 생명력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한한 지혜의 샘은 자신의 흉중에 있습니다.

‘신심’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없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강하고 청정한 부처의 경계(境界)도, 약하고

추한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생명도

모두 자기 생명에 있습니다. 연()에

닿아 나타납니다.

 

또 생명은 삼세에 걸치기 때문에 과거의

숙업이 커다란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뇌’의 인이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그대로 ‘행복’으로 전환하는

힘도 ‘자기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불계의 힘입니다.

 

결국 인간은 어디까지나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의 대지를 일구어 풍부하고

깊은 행복의 뿌리를 뻗어야 합니다.

 

‘흉중의 어본존’을 열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과 같은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경애면에서는 뛰어난 인간성이나

훌륭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생활면에서는 공덕과

복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는

대성인의 말씀을 절대로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지위도 재산도 아닙니다. ‘

신심’이 있는 사람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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