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2-6 어본존은 생명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
이 절에서는 거울을 비유로 들어 어본존이
생명 본디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생명의
실상을 바라보고 성불할 수 있도록
부처의 지혜를 나타낸 것이 바로 어본존입니다.
오늘은 ‘거울’을 통해 ‘신심’의 중요한 자세를
말하겠습니다. 거울은 불법상, 참으로 뜻이
여러 가지고 비유로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우리의 신심에 한해서
간결하게 언급하고자 합니다.
어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동경(銅鏡) 등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지만
아직 미음은 비추지 못하느니라.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을 비출 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추느니라.
마음을 비출 뿐만 아니라 선업도 미래까지도
비추어 보심이 흐림이 없노라.”(어서 1521쪽)
즉 “거울 등은 사람의 모습은 비추지만 마음은
비추지 못한다.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
(색법<色法>)뿐 아니라
마음(심법<心法>)도 비춘다.
마음뿐 아니다. 과거의 업인(業因)도 미래도
흐림이 없이 비춘다.”
거울은 눈에 보이는 얼굴과 모습을 비춥니다.
불법의 거울은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 비춥니다.
거울은 인간이 반사의 법칙 등 ‘빛의 법칙’을
응용해서 모습이 비치도록 연구한
‘지혜’의 산물입니다.
어본존은 ‘우주와 생명’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고 성불할 수 있게 한
부처의 ‘지혜’의 궁극입니다.
용모를 단정히 하려면 거울이 반드시 필요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인생을 응시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생활을 누리려면 ‘생명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앞의 어서에서 ‘동경’이라고 했듯이
옛날 거울은 동이나 청동, 철 등 금속을 갈고
닦은 것이었습니다. 주석 등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거울은 지금의 유리로 만든
거울과 달리 희미하게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잘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금방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자주자주 닦지 않으면 쓸 수 없었습니다.
거울을 연마하는 데에는 전문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거울을 연마하는 장인입니다.
니치렌대성인 재세(在世) 시의 가마쿠라 시대도
이러한 금속 거울 시대였습니다.
<일생성불초>에는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어서 384쪽)고 씌어 있습니다.
즉 “뿌옇게 흐린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빛나는 것처럼 미혹의 생명도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묘법의 빛을 내는
명경이 된다.”는 뜻입니다. 매우 유명한 구절인데
이 어서도 이러한 ‘거울 연마’의 전통을
배경으로 쓰셨습니다.
어쨌든 어떠한 사람의 생명도 본디
반짝반짝 빛나는 명경입니다.
그 명경을 닦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닦으면 부처, 뿌옇게 흐리면 미혹된 범부입니다.
묘법을 부르는 일이 생명을 닦는 일이며 우리는
몸소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묘법을 가르쳐 그 ‘생명의
거울’을 빛내도록 노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명의 거울을 닦는
장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굴은 잘 닦으면서 생명은
좀처럼 닦지 않습니다.
얼굴의 기미는 신경을 쓰면서 혼의 기미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웃음)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년~1900년)의
작품 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웃음)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미모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그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별명이 ‘빛나는 청춘’이었습니다.
어느 화가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고자
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멋지게 완성된
그림도 굉장히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리언은 어느 친구의 영향으로 점점 ‘쾌락’과
‘악행’의 길로 접어들어 문란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도리언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눈부시도록 화려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젊음은 그대로였습니다.
한편 초상화는 도리언의 무절제한 생활 모습
그대로 조금씩 추하게 변했습니다.
결국 도리언은 한 처녀를 농락해 끝내
자살로 몰아 넣었습니다.
이때 초상화의 얼굴은 보기조차 흉할 정도로
사익하고 잔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뒤에도 도리언의 악행이 심해질수록
초상화도 흉하게 변했습니다.
도리언은 두려워졌습니다. 추한 모습을
한 이 ‘혼의 얼굴’은 영원히 남습니다. 도
리언이 죽는다 해도 그 진실을 웅변으로
계속 이야기할 것입니다. 설령 선인(善人)이
되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언은 결심했습니다. “이 초상화를
없애버리자! 이 그림만 없어지면
‘과거’와 결별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도리언은 그림을 칼로 찔렀습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본 것은 젊고
아름다운 도리언의 초상화와 그 앞에
쓰러진 늙고 비루한 얼굴의 사나이(도리언)
였습니다. 사나이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즉 초상은 도리언의 ‘생명의 얼굴’이자
‘혼의 얼굴’이었습니다. 도리언의 행동으로
비롯된 인과가 남김없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화장할 수 있어도 혼의 얼굴은 속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과의 이법은 엄연합니다.
불법에서는 음덕양보(陰德陽報, 보이지 않는
선행이 보이는 행복의 결과로
나타난다)라고 설합니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전혀 헛됨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거나 겉을 꾸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의 인과를 새긴 ‘혼의 얼굴’은
어느 정도 표면에, ‘상(相)’으로 나타납니다.
영국에는
‘얼굴은 혼의 거울’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혼의 얼굴’을 이름답게 닦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단정히 하듯 생명을 비추는
명경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관심’의 ‘어본존’입니다.
<관심본존초>에는 ‘관심’에 대해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자구(自具)의 육근(六根)을
보는 것과 같다.”(어서 240쪽) 즉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안(眼, 눈), 이(耳, 귀),
비(鼻, 코), 설(舌, 혀), 신(身, 몸), 의(意, 마음)를
볼 수 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관심’은 자신의 ‘마음(생명)’에
십계를, 특히 ‘불계’를 보는 일입니다.
그를 위해 대성인이 인류에게 ‘관심’의
‘어본존’을 주셨습니다.
니치칸상인은 “바로 본존을 명경에
비유하도다.”(<관심본존초 문단>,
문단집 472쪽)
즉 “이 어문은 바로 어본존을 명경에 비유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의구전>에는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는
만상(萬像)을 나타내서 일법(一法)도
남는 것이 없다.”(어서 724쪽) 즉 “묘호렌게쿄의
오자 즉 어본존은 우주 일체의 현상을
비추어 모자람이 없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어본존이 바로 우주 전체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명경 중의 명경입니다. 이 어본존에게
기원할 때, 우리 생명의 본디 모습(실상)을 보고
불계를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신심의 일념은 그대로 어본존에 비치어
대우주에 반영됩니다. 이것이
일념삼천의 법리입니다.
대성인은 사도의 문하 아부쓰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보여래의 보탑을
공양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양하시는 것이며”
(어서 1304쪽)
즉 “그대가 다보여래의 보탑 즉 어본존을
공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아부쓰보 자신)을
공양하고 있는 것이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는 장엄한 신심은 그대로
자신이라는 ‘보탑’을 장엄하게 장식합니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바로 우주의 모든
불보살이 우리를 수호합니다.
비방하면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마음’이 중요합니다.
신심의 일념은 미묘합니다.
예컨대 때로는 근행과 광포 활동을 ‘아 싫다.’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마음은 거울처럼
그대로 대우주에 비칩니다. 말하자면
제천(諸天)도 ‘아 싫다.’ 하고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제천선신(諸天善神)의 참된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일이든 ‘또 복운을 쌓자.’ 하고
기꺼이 행동하면 제천도 환희하며
기운차게 움직입니다.
어차피 행동할 거라면 그쪽이 이득입니다.
또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일념으로
불도수행을 하면 그렇게 불신하거나
푸념하는 마음이 공덕을 없애고 맙니다.
그 결과 당연히 공덕을 자각하지
못하고 ‘역시 시간 낭비였다.’
하고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웃음)
그러한 악순환입니다.
‘정말일까’ 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신앙해도
그 약한 일념이 우주의 거울에 비치어
애매한 결과가 나옵니다. 강한 확신을
지니면 복운은 무한대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하고 엄연한 신심의
‘마음’을 자신이 조절하면서
상쾌하게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도 경애도 드넓게 열립니다.
분명 모든 생활이 공덕으로 기득 넘칠 것입니다.
이 ‘일념의 미묘함’을 터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신심의 요체이며 거기에 일생성불의
열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거울이 나쁘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 불행은 모두 자기
생명의 인과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신심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거울이 없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울이 귀중품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도성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에게 거울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처음 거울을 본
아내는 거울에 비친 여인의 모습에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결국 도성에서 여인을 데리고 왔군요.”
하며 큰 싸움이 났습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유명한 희극 중 하나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일념, 인과)에 비친 그림자임이
분명한데도 인생의 여러 가지 현상을 보고 ‘
이 사람은 누구냐. 나는 모른다!’ 하고 화를 내거나
한탄하거나 합니다.
불법이라는 ‘생명의 거울’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모르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회현상의 본질도 간파할 수 없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지도선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 ‘십계’의 생명을 나타낸 어본존 (0) | 2024.11.05 |
---|---|
2-5 흉중의 어본존을 열다 (0) | 2024.11.05 |
제3장 생명변혁의 실천 (0) | 2024.11.05 |
3-1 근행은 우주와 교류하는 의식 (0) | 2024.11.04 |
3-2 민중에게 열린 수행 (0) | 2024.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