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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3-11 경문과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by 행복철학자 2024.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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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경문과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의미를 모르는 경문을 외우고 제목을 부른다고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는

미국 멤버의 의문에, 설령 의미를 몰라도

근행창제는 어본존에게 통해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전해진다며, 말하자면 ‘부처와 보살

세계의 언어’이며 근행창제를 통해

크나큰 행복과 충실 그리고 환희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경문과 제목은 당연히 뜻을 아는 편이 좋습니다.

단, 그것은 법을 강하게 확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 깊은 뜻을 전부 논리적으로

이해한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귑니다.

 

개에게는 개의, 새에게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고 말과 신호가 있습니다.

사람은 들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개는

개끼리, 새는 새끼리 틀림없이 서로 통합니다.

 

또 암호나 약어(略語), 외국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그 세계의 사람에게는

굉장히 잘 통합니다. 부부 사이라면 “그거요,

그거!”만으로도 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의미를 모른다 해도 근행창제하는

소리는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

(三世十方)의 부처와 보살의 세계에 정확히 통합니다.

 

말하자면 부처와 보살

세계의 언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본존에게 근행창제하는 소리는

모든 부처와 보살 그리고 제천선신에게

도달해 ‘좋구나, 좋구나’ ‘엑설런트(훌륭하다)!’

‘베리 나이스!’ 등이라고 기뻐하고

찬탄하며 전 우주가 우리를 복운의

광채로 에워쌉니다.

 

대성인은 ‘우리는 근행창제를 통해 날마다

앉은 그 자리에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듯한

위대한 경애를 얻는다.’라는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天竺)의

영산(靈山)을 보고 본유(本有)의 적광토(寂光土)로

주야(晝夜)로 왕복(往復)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도다.”(어서 1343쪽),

즉 “대성인의 출가(出家), 재가(在家)의 문하가 되는

사람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법화경의

회좌(會座)가 열린 인도의 영취산(靈鷲山)에 가고,

우주에 본디부터 있는 적광토(부처의 세계)에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왕복할 수 있으니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어본존을 배견하면 내 소우주의 문이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대우주를 향해 활짝 열리고

전 우주를 내려다보는 듯한 유유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충실감과 환희 그리고 일체를 손안에

넣은 듯한 대단한 확신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 에워싸인 소우주가 반대로

우주를 에워쌉니다.

또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쪽)

즉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소리가 무명의

알을 따뜻하게 품는 어머니가 되어 이윽고

부처라는 새가 되고 실상진여의 허공

(불계의 대우주)으로 반드시 비상(飛翔)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은 등()과 같지만 법화경이란

소나무에 걸려 묘각(妙覺)의 산에도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 1430쪽)

즉 “그대도 자신의 몸은 등나무와 같지만,

어본존이라는 소나무를 타고

‘묘각의 산’에 오를 것이다.

 

일승(묘법)의 날개의 힘으로 ‘적광(불계)의

하늘’로도 날아갈 것이다.”

최고봉인 산 정상에 서면 이 세상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듯 우리는 ‘최고의 지혜’(묘각)의

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 반짝이는 은하, 떨어지는

유성군,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며 생명의 무한한 확대와 그 깊이를

시시각각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常樂)의 경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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