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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대성인 시대의 제자들

宿屋光則(야도야미쓰노리

by 행복철학자 2024.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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宿屋光則(야도야미쓰노리)

 

야도야사에몬뉴도미쓰노리(宿屋左衛門入道光則)는 집권 호죠도키요리와

도키무네의 측근으로 종사했던 무사이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1263년 도키요리의 임종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최후의 간병을 위하여 출입을

허락받은 7명중에 야도야사에몬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日蓮대성인은 1258년부터 2년반동안에 일체경의 검색을 거쳐 1260년에

「입정안국론」을 완성, 전집권 사이묘지뉴도도키요리(最明寺入道時賴)에게

진상했지만 이 때에 사사봉행(寺社奉行)으로서 중개의 역할을 한 것이

야도야사에몬뉴도였다 물론 이 당시는 야도야뉴도도 다른 막부의

요직자와 같이 고쿠라쿠지료칸에 귀의하고 율과 염불을 신수하고 있었던듯 하다

그 때 대성인은 야도야뉴도에 대하여

『선종과 염불종을 버리시라고 말씀드리시라

이 일을 채택하시지 않으면 그 일문에서 일이 생길 것이며 타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시리라』(어서 287)

일본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호죠 일문이 사종교인 선종 염불종에의 귀의를 멈추지

않으면 멀지않아 타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도키요리에게 전하도록, 이라고 부언하시고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국주간효의 글에 대하여 사종사의를 신봉하는 위정자들은

수많은 박해로 응하고 그 때문에 마쓰바카야스법난 이즈유죄등의 법난이 일어났다

1268년,「입정안국론」상정으로부터 8년을 지나 타국침핍난의 예언이 적중,

몽고국으로부터 일본의 예속을 요구하는 국서가 가마쿠라에 도달했다

막부로부터 회답을 요구받은 조정에서는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한다는 위협적 언사에 분노하여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리하여 몽고국의 내습은 불가피한 문제로 되고 일본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8월 21일, 이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대성인은 야

도야뉴도에게 일서(一書)를 보내 집권 호죠도키무네에게 올리도록 했다

『그 후 서신이 끊어져 말하지 않으니 불심(不審)은 극에 달했느니라

대저 지난 정가원년 8월 23일 술해 때의 대지진은 日蓮이 제경을 인용

하여 이를 생각하건대 염불종과 선종 등에 귀의하시는고로 일본수호의

제대선신이 진에를 하여 일으키는 바의 재난이니라

만약 이를 대치하지 않으면 타국에 의하여 이 나라가 파멸되리라는 내용

의 감문 일통을 찬(撰)하여 정원2년 7월 16일 귀하편에 부탁드려 고사

이묘지뉴도전에게 이를 진람하였노라

그 후 9개년이 지나 금년에 대몽고국에서 첩장이 왔다는 것을 풍문하였

음 등 운운

경문대로라면 그 나라에서 이 나라를 책할 것은 필정이니라

그런데 일본국 중에는 日蓮 혼자 응당 그 서융(西戎)을 조복하는 사람이

라고 미리 이를 알고 논문에 이를 써놓았느니라

군주를 위해 나라를 위해 신을 위해 부처를 위해 내주를 경유할 지어다

상세한 취지는 만나 뵈옵고 말씀드리겠노라』(어서 169)

사종교에의 귀의에 의해서 이미 몽고의 내습은 필정으로 되었다

그 서역의 만족(蠻族)을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은 일본국에서 대성인 오직

한 사람이다 라는 자각을 피력하신 신장(申狀)이었다

그러나 막부의 요직자들은 또다시 무시묵살, 대성인은 9월에 다시

야도야뉴도에 대하여 「야도야뉴도재어장」을 보내고 있다

『만에 하나 타국의 군사가 이 나라를 습격해 오는 일이 있다면 알고도

진상하지 않은 잘못, 오로지 귀하에게 있느니라』(신편 371)

이렇게 재삼에 걸친 간언에도 불구하고 막부에서는 전혀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대성인은 집권을 비롯하여 막부의 중심자와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원 승려에 대하여 바로 간장(諫狀)을 보낼 결의를

굳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 10월 11일 대성인은 집권 호죠도키무네를 비롯한 막부요직자와

겐쵸지도류 고쿠라쿠지료칸등 11명에게 간장을 보냈다

이 때 집권 도키무네는 18세로 집권직에 취임한 직후였다

거기서 도키무네에게 일을 도울 필요가 있으므로 집권의 집사(執事)에 해당하는

내관령(內管領) 헤이사에몬노죠요리쓰나(平左衛門尉賴綱)와 호죠 일문에

「입정안국론」상정 때부터 대성인에게 마음을 기울렸던 호죠야겐타(北條彌源太)

그리고 집권의 근시(近侍)로 유력자였던 야도야뉴도에게도 거듭 간장(諫狀)을

보냈던 것이다

『년전에 생각한바의 서(書)인 안국론에 보합한 것에 대해 말씀드렸나이다

대저 정월 18일 서융(西戎)몽고국으로부터 첩장(牒狀)이 도래했다 라고

이를 가지고 이를 생각하건대 日蓮은 성인의 일분(一分)에 해당하느니라

그렇기는 하나 아직 물음을 받지 않으므로 거듭 간장을 바치오니 원하건대

귀의한 사승(寺僧)을 정지(停止)하시고 마땅히 법화경에 귀의시킬지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후회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요

이 취지를 가지고 11개소에 말씀드렸으니 틀림없이 평의(評議)가 있어야 할 지니라

오로지 귀하를 우르러 받드니 빨리 日蓮의 본망(本望)을 이루게 하실지어다

11개소라 함은 헤이노사에몬노죠전에게 말씀드린 바이며 소상히 말씀 드리고자

하오나 상서(上書)에 분명하므로 생략하나이다

기색을 바르게 해서 피로하심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이외다 공공근언

문영5년 10월 11일

근상(謹上) 야도야뉴도전』(어서 170)

그 후 3년을 경과한 1271년 10월 12일, 대성인의 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법난인

다쓰노구치법난이 일어났다 본불대성인이 참수의 자리에까지 앉혀졌던

이 대법난의 여파는 물론 제자 단나에게도 미쳤다

대성인은 『지금의 염불자 등이 염불과 선과 율과 진언을

문책당하자 말할 방법이 없노라 (중략)

결국은 단나들을 꾀어서 日蓮의 제자를 죽이게 하고 나의 머리같은 데에 상처를

내고 참주를 해서 두 번까지 유죄 아울러 참수하려고 꾀하여 제자 등 수십인을

감옥에 넣게 할 뿐더러 가마쿠라 안에 불을 질러서 日蓮의 제자의 소위이다 라고

소문을 퍼뜨려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려고 한 것과 같도다』(어서 1289)

고 방법자(謗法者)의 비열한 소업(所業)을 술하시고 있지만 이 기회에 대성인의

일문을 일거에 말살하려는 의도에 따라 어떤 자는 소령을 몰수당하고 또 어떤 자는

집을 쫓겨나는 등 심한 탄압이 가해졌던 것이다

더욱이 요주의 인물로서 260여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가운데 5명의 제자 단나가

막부의 탄압에 의해 토굴에 유폐되었다

니치로 니치신(日心) 사카베뉴도(坂部入道) 이자와뉴도(伊澤入道) 도쿠교지뉴도

(得業寺入道)의 5명이었다고 말하여진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대성인은

『금야의 추위에 따라 더욱 내 자신보다도 마음 아픈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노라

옥을 나오시면 명년 봄 반드시 찾아오시라』(어서 1212)

『日蓮은 명일 사도지방으로 가느니라

오늘 밤 날씨가 추우니 옥중의 상황이 염려되어 안스럽기만 하도다 (중략)

옥을 나오시면 서둘러 찾아오시라 만나보고 만나보리라』(어서 1213)

등등 격려하시는 편지를 보내시고 있다

토굴에 갇힌다는 문하중에서도 가장 중한 처벌을 받아서 초겨울 토굴의 추위에

고생하고 있었던 니치로 등에 있어서 정말 고마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토굴은 야도야뉴도의 저택 안에 있었다고 말하여 진다

이 때 분기한 니치로 등 5인의 절복에 의해 야도야뉴도는 마침내 사종에의

집착을 버리고 대성인께 귀복했다고 전하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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