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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越尼(나고에의 부인)
1253년, 세이쵸지(淸澄寺)에서의 입종선언후 가마쿠라로
들어가셨던 대성인은 나고에의 마쓰바카야쓰에 초암을 지으셨다
나고에의 땅은 막부 제2대 집권 호죠요시도키(北條義時)의
차남 도모도키(朝時)가 저택을 지은 땅으로 그로부터 도모도키
일족은 나고에의 일문이라고 칭하여 졌다
나고에 일문은 염불의 강신자(强信者)로 센코지(善光寺)
죠라쿠지(長樂寺) 대불전(大佛殿) 등의 건립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이 도모도키의 부인이 나고에의 아마(尼), 혹은 오오아마(大尼)
라고도 불려져 당시 대성인의 고향, 아와지방 도죠고
(東條鄕)에 살고 있었다
나고에의 아마에 대해서 대성인은
『日蓮의 부모 등에 은혜를 베푸신 사람』(어서 895)이라고도
『日蓮에게 중은(重恩)의 사람』(어서 907)이라고도 말씀하셔서
이 일로서부터 대성인께 연고가 깊은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성인은 그러한 연(緣)에 의해 마쓰바카야쓰에 초암을 짓고
나고에 일문의 원조를 얻어 가마쿠라의
홍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나고에의 아마(尼)도 대성인께
귀의하여 제목을 부르게 되었지만
그 신앙은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1271년 9월 12일, 다쓰노구치법난이 일어났다
막부의 이름으로 가해졌던 이 대탄압은 제자 단나의 몸에도
영향을 미쳐 박해에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제자 단나가
퇴전하고 있었다
이 해 10월, 유죄로 결정되어 사도 쓰가하라에 도착한 대성인은「
사도어감기초」를 쓰시고 그 중에
『영주의 부인에게도 서신을 드릴까 하고 생각했으나
우선 이러한 몸의 서신이고 보면 그립다고 생각하시지
않으리라고 말하더라고 편의가 있으면 여러분이 말씀 전하시라』
(어서 891)고 나고에아마의 신앙을 걱정하시고 있다
그러나 대성인의 대자비를 멀리 떠나 이 때 이미 나고에아마는
권위를 두려워 하여 퇴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 해인 1272년 2월, 대성인의 자계반역난의 예언이 현증으로
나타나서 호죠 일문에 의한 집안 토벌전이 일어났다
즉 집권 호죠도키무네와 형인 도키스케(時輔)가 정권을 다투어
도키스케가 토벌되었다
호죠도키스케의 난(또는 2월소동)이다
이 자계반역의 소동을 가리키는가
『선에서든 악에서든 법화경을 버림은 지옥의 업이 되느니라』
(어서 232)
는 금언 그대로 퇴전한 나고에아마의 자식 나고에도키아키라
(時章) 노리도키(敎時) 두 사람이 가담했던 죄로 주살되고 말았다
원래 나고에아마에게는 여섯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그 중
세 사람이 일찍 죽고 남은 세 사람 가운데 도키미쓰가 모반의
혐의로 이즈의 에마에 유배되고 사면된 후에도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여기에 겹쳐서 불운이 아마를 덮쳤던 것이다
그 후 대성인의 예언은 모두 계속 적중하여 드디어 1274년
2월 14일, 사면장이 발부되었다
대성인문하에 있어서 바로 꿈과 같은 대감격이었다 여기에
일문부흥의 바람이 강하게 솟아올랐던 것이다
또 막부에 있어서도 대성인에 대한 태도를 일변하여 예를
다해서 대성인을 맞이하여 토지 당사의 기진을 말해 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종사의를 고집하는 막부요인에 대하여
대성인은 이 말을 일축하고 미노부산으로 입산하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탄압도 부드러워지고 대성인의 이름이 높아지자
나고에아마는 다시 신심을 시작하려는 것으로 되었다
다음 해인 1275년 2월에는 미노부의 대성인이 계신 곳으로
곶감을 공양드리고 그 때 본존의 수여를 원했다
이에 대하여 대성인은『대니(大尼)부인의 본존의 건을 말씀듣고
보니 마음이 괴롭소이다
영주가는 거짓되고 어리석어서 혹시는 믿고 혹시는 파하여 일정치
않았는데 日蓮이 감죄를 당했을 때 이미 법화경을 버리셨노라
日蓮이 전부터 상면때마다 난신난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니라
日蓮에게 중은의 사람이기에 도와 드리기 위해서 이 본존을
보내드린다면 십나찰이 필시 편파의 법사라고 여기시라
또한 경문과 같이 불신(不信)의 사람에게 보내 드리지
않으면 日蓮 편파는 없겠지만 부인께
서 내 자신의 허물은 알지 못하시고 원망하실 것이니라』
(어서 906)
라는 편지를 며느리에 해당하는 니이아마(新尼)에게 보내어
나고에아마의 정직하지 못한 신앙자세, 다쓰노구치법난
때에 퇴전 등의 이유로 본존을 수여하시지 않고 한편
사도유죄 중에도 미노부입산 후에도 퇴전함이 없이 신심을
관철한 니이아마의 신심을 칭찬하고 본존을
수여하셨던 것이다
이 대성인의 재량에 불만을 가졌던 것일까 나고에아마는
그 후 신심을 하지 않았다
대성인은 1276년 1월에 쓰셨던 세이쵸지대중중에
영가의 부인께서는 여인이며 우치하므로 사람들이 말로
협박하면 과연 그러리라고 생각 하시리라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후생에 악도에 떨어지실
것이야말로 딱하게 생각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日蓮의
부모에게 은혜를 베푸신 사람이고 보면 어떻게라도 해서
후생을 구해 드리려고 기원하고 있도다』(어서 895)
고 나고에아마의 신심유약한 모습을 슬퍼하시고 후생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원하고 있다 라는
심정을 술하시고 있다
그 후 1280년, 어떤 일로 하여 핍박받는 사태에 빠졌던
나고에아마는 무절조하게도 대성인께 편지를 써서 기념을 원했다
그 답서에 『옥졸 염마왕의 키는 십정쯤이고 얼굴은
주색을 띠우고 눈은 일월과 같고 이는 쟁기 밑둥 같고
주먹은 대석과 같고 대지는 배를 바다에 띄운 것처럼
움직이며 음성은 뇌성처럼 연달아 울려퍼진다 해도 아마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지 않으리니 日蓮의 제자는 아니로다
깊이 깊이 내부를 정리하고 나서 분부를 받기로 하겠노라
두뇌를 깨고 육신을 책궁하면서 기원해 보겠노라
다만 앞으로의 기원이라고 여기시라 이제부터 후는
후생의 일을 착실히 다지시라』(어서 908)고 최후까지
정신(正信)을 일으키지 못했던 나고에아마에게 대성인은
재삼의 퇴전방법은 지옥의 업이며 사후 대고뇌를 받을 것은
틀림없다고 훈계하시고 더욱이 이미 나고에아마는 대성인의
제자는 아니다고 까지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방법을 후회하고 본존을 믿어 간다면
아마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불천에 기념하여 보겠으나
이로부터는 후생의 성불을 원하여 성실하게 신심에
힘쓰도록,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어서를 최후로 하여 그 후 나고에아마의 소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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